제84화
나는 혹시 몰라 저택에 뿌려 놓은 여분의 마나 추적기가 멜리사의 머리카락 냄새를 킁킁 맡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두 눈을 가늘였다.
‘저게 왜 멜리사 왕녀 근처에서 작동하는 거지?’
루카스의 흔적만을 추적하게 설정해 놓은 아티팩트라 아직 황궁에 흩뿌려 놓은 추적기 중에서도 반응을 보인 개체가 없었는데.
“꺄악! 이게 뭐야!!!”
의아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데, 추적기를 발견한 멜리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버, 벌레가 내 머리카락에 붙어 있잖아!!!”
마나 추적기는 일부러 바선생의 모양을 따서 만든지라 누가 봐도 벌레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혹시라도 추적기를 발견하더라도 감히 손을 댈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후훗. 내가 생각한 거지만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단 말이지.’
나는 추적기를 확인하긴커녕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아티팩트를 던져 버리는 멜리사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왕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너!”
“네?”
버럭 목소리를 높이며 내게 다가온 멜리사는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는지 금세 목소리를 죽였다.
“일부러 내 품위를 망치기 위해 벌레를 푼 거니? ‘사교계의 꽃’ 자리가 그리 탐이 났어?”
탐이 나긴커녕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었지만, 멜리사는 내가 자신의 위치를 노린다고 철썩같이 믿는 것처럼 보였다.
“어림도 없지. 내가 어떻게 거머쥔 자리인데, 너 따위 발칙한 계집애에게 빼앗길 것 같아?!”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악의가 가득했으니까.
* * *
나는 내게 악의를 보이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정도로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비록 하차니아병을 앓고 있긴 하지만, 원래는 세계 최강 악당이 목표라고.’
조무래기 악당을 자처해서 강제 하차를 당할 바에는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흑막이 되는 게 낫지 않겠나.
“제, 제가 저택에서 자고 갈 수 없다뇨?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요, 공녀님.”
나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는 멜리사를 올려다보며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죄송하지만 공작가의 수도 저택이 그리 크지 않아서요, 왕녀님.”
물론 타운하우스치고는 아주아주 큰 편이긴 했지만.
소수의 사람들만 초대받는 애프터 파티를 위해 준비한 게스트룸은 총 여덟 개.
초대객들 중에서도 작위가 대단하거나 명망이 높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방들이었다.
‘왕녀는 당연히 자신도 게스트룸을 배정받았으리라 생각했겠지.’
멜리사 왕녀는 사교계, 그것도 수도인 바하무스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리는 여자였으니까.
멜리사가 초대받지 못하는 파티는 없었으니 그녀는 당연히 자신도 내 생일 연회의 애프터 파티에 초대받을 것이라 짐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까 나보고 발칙한 계집애라면서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활짝 열린 현관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멜리사를 향해 방긋 웃었다.
“너무 아쉬워 마세요. 어차피 왕녀님께는 재미없으실 거예요. 애프터파티에 제국의 밝은 앞날을 도모하기 위해 현자 에게이라 님을 초청했거든요.”
“어머! 어린 공녀님이 생각도 참 깊으시네요. 현자까지 초청하시다뇨.”
내 설명에 왕녀가 초청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같이 떨떠름해하던 귀부인들의 얼굴이 활짝 핀다.
왕녀가 아무리 망명했다지만 타국의 왕족, 제국의 앞날을 밝히는 건 제국 귀족들의 일이었으니까.
‘수도 귀족들은 윌레닌과 바하무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족속들이니까 좋아할 줄 알았지.’
“아무래도 왕녀님이 끼실 자리는 아니니까요.”
사교계라면 타국의 왕족이 설치고 돌아다닐 수 있겠지만, 제국 귀족들이 머리를 모아 정치에 대한 토론을 벌일 때까지 낄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루카스 스토커라며? 잠깐 마주친 걸로도 그렇게 힘들어 하는데 저택에서 재울 수는 없지.’
“하. 알겠어요. 다음에 보죠, 공녀.”
내 말에 분하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문 멜리사 왕녀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저택을 빠져나간다.
“어휴, 성가셔.”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진저리를 친 나는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로제와 라비를 발견했다.
“…아, 아가씨.”
“아가씨께 이런 면모가 있는 줄 몰랐어요….”
나는 말꼬리가 늘어지는 그들의 목소리에 멋쩍은 뺨을 긁었다.
‘이런. 내가 왕녀랑 기싸움하는 걸 본 모양이네.’
로제와 라비는 룰루나 랄라처럼 나를 어릴 때부터 본 하녀가 아니니까 어린아이가 못되게 군다며 실망할 수도 있었다.
“로제, 라비. 방금은….”
“너무 멋있었어요!”
변명하기 위해 입을 벌리는 내 말을 썩둑 자른 라비가 발을 동동 굴리며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아가씨께 이런 카리스마가 있으셨다니!”
“단순히 귀엽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아가씨인 줄로만 알았는데!”
“너무 멋있어! 짜릿해!”
나는 팔까지 방방 흔들어 대며 제자리를 뛰는 로제와 라비를 영혼 없는 시선으로 지켜보다 등을 돌렸다.
‘저런 팔불출들, 이제는 익숙해.’
* * *
까드득. 까드득.
수도 귀족들 중에서도 가장 계급이 높은 귀족들만 모여 사는 로열스퀘어.
타국의 왕족이었지만 ‘사교계의 꽃’ 위치를 공고히 지키는 멜리사의 명망을 높이 산 그레고르가 그녀에게 하사한 저택으로 돌아온 멜리사는 피가 나도록 손톱을 물어뜯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내게서 떠나가고 있어, 루카리나.”
“아녜요, 어머니. 사람들은 여전히 어머니를 좋아해요.”
초조한 걸음걸이로 거실을 빙글빙글 도는 멜리사의 등을 아이가 다정하게 껴안았지만, 그녀는 제게 매달리는 소녀를 휙 쳐 내며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단순히 좋아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아! 모두의 관심이 내게 쏠려야 한다고!”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긴 머리를 쓸어 올린 멜리사는 테이블에 널브러진 신문지를 집어 들었다.
곧 그녀의 손안에서 한쪽 눈썹을 꼼톨거리며 삐딱하게 서 있는 여자아이의 사진이 와그작 일그러진다.
“‘일간특급’의 1면은 늘 나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지난 10년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말이야!”
사교계의 꽃, 오랜 시간 공석을 지키는 황후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멜리사 왕녀는 늘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녀가 입는 옷은 반드시 유행했고, 그녀가 여는 모든 파티는 흥행에 성공했다.
‘남자들의 흠모와 여자들의 선망도 언제나! 늘! 내 차지였어!’
일간특급의 1면을 장식하는 건 멜리사 왕녀가 자신의 인기를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수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걸 고작 여덟 살 계집아이에게 빼앗겨 버리다니.”
분해서 어쩔 줄 모르며 발을 구른 멜리사는 거금을 주고 특별 제작한 드레스-그러나 레오노라의 드레스에 밀려 주목을 받지 못한-를 북북 찢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살롱을 바꿔야겠어! 아니, 액세서리가 문제였던 건가?”
초조하게 중얼거린 멜리사는 제 가느다란 목에 걸린 사파이어 목걸이마저 쥐어뜯었다.
“그래! 이 유행 지난 목걸이가 오늘 내 차림을 초라하게 만들었던 거야!”
“어, 어머니. 하지만 이건 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멜리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이가 화들짝 놀라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뭐? 아버지?!”
“아! 죄, 죄송해요!”
아이의 말에 안 그래도 험악하게 굳어 있던 멜리사의 얼굴이 야차와 같이 변한다.
“네 아버지는 루카스 황자 전하야, 루카리나. 사라진 황자 전하께서 내게 이 목걸이를 선물하셨겠어?!”
멜리사의 사나운 물음에 아이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벌벌 떨리는 몸을 껴안았다.
“대답해, 루카리나. 네 아버지가 누구라고?”
“루, 루카스 황자 전하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아이를 매섭게 노려보던 멜리사는 그제야 아이를 껴안으며 등을 다독였다.
“그래, 내 하나뿐인 딸. 너는 나와 루카스 전하가 나눈 사랑의 결실이란다.”
“네, 네에….”
“역시 내 딸은 너무너무 착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꼭 껴안아 준 멜리사가 몸을 돌린다.
“당신 깨면 안 되니까 조용히 들어갈게요, 여보.”
조심스레 침실 문을 열어젖힌 그녀는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남자에게 속삭이듯 말을 읊조렸다.
멜리사가 침대를 가리는 커튼을 거두자 창백한 피부가 눈에 띄는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루카스.”
남자는 그녀만의 루카스였다.
멜리사는 벌써 10년 째 의식이 없는 남자의 수염을 깎으며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 * *
“미친….”
수상한 낌새에 멜리사의 긴 머리카락에 작은 탐지용 마도구를 붙여 놨던 나는 수정구에 떠오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기함하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아니, 이 소설은 왜 이렇게 미친년들이 많이 나와?’
전연령 육아물이 아니라 피폐 19금 로판이었던 거 아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