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젠장. 루카스 앞에서 울지 말걸.’
아무리 해묵은 감정이 폭발했어도 그냥 꾹 눌러 참을 걸 그랬다.
나는 여덟 살이나 먹은 나를 아기처럼 무릎에 올린 채 가신들 하나하나를 추궁하기 시작한 루카스를 올려다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론도 자작. 공녀가 간밤에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들었는가?”
황성 정원에서, 그것도 루카스와 단둘이 나눈 대화를 이제 막 황도에 올라온 론도 자작이 들었을 리 없지 않은가.
“아뇨, 각하. 듣지 못했습니다만.”
자작이 떨떠름히 대답하자 루카스는 내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 사라질까 무섭다더군.”
“……예?”
“자기 곁을 내가 항상 지켜 줬으면 좋겠다고, 절대 자신을 떠나지 말라면서 울음까지 터뜨렸다네.”
‘아니, 그런 말은 한 적 없거든?’
그러나 망상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 루카스의 말에 눈치 빠른 가신들이 하나둘 맞장구를 치기 시작한다.
“막내 공녀님께서 각하를 정말 사랑하시나 봅니다. 이제 여덟 살이 되셨는데도 아빠를 이리 따르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각하.”
“이러다 결혼도 하지 않고 각하와 평생 살겠다고 하시겠습니다. 제 딸은 사춘기에 들어섰는지 저와는 말도 잘 섞지 않으려고 하는데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날 너무 좋아하니 몹시 곤란하다.”
“곤란하시긴요. 저는 공녀님처럼 아빠를 따르는 따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복하십니다, 각하.”
“그나저나 노에베 백작, 그대가 공녀가 어릴 때보다도 날 더 따르는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예, 예! 그럼요! 공녀님께서 어릴 때보다도 지금 훨씬 각하를 사랑하고 귀애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내가 더 점점 더 좋아지는 모양이다. 걱정이군.”
난감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 올리는 루카스의 태도에 민망한 주먹만 부르르 떨던 나는 애써 서류를 뒤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공녀님, 황성 연회는 즐거우셨습니까?”
내가 이 자리를 불편해한다는 것을 눈치 챈 헨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주제를 돌려준다.
“응. 나름 재밌었어.”
나는 황성에서 마주쳤던 아이네스와 그레고르 부녀, 그리고 교황 발레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의 몸이 어디쯤에 있는지도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됐고.’
그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아이네스의 생일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수가 생각보다 적어서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황성에 마나 추적용 아티팩트를 잔뜩 흩뿌려 놓고 돌아올 수 있었다.
‘공격력이 전혀 없는 아티팩트니까 보호 결계에도 걸리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도 소리 없이 발을 움직이며 루카스의 흔적을 찾고 있을 벌레 모양 추적기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랄드의 역작이라고 볼 수 있지.’
오롯이 루카스의 몸을 찾기 위해 개발한 거라 아직 시중에 풀지는 못했지만, 나는 마나 추적기를 황도 치안대에 아주 높은 가격을 매겨 팔 생각이었다.
‘역시 수도야. 돈 벌 구석이 넘쳐난다니까?’
물론 우리 하차니아 영지 치안대에는 무료로 보급할 계획이지롱.
“네, 말씀대로 재밌으셨던 것 같습니다.”
움후후, 악독한 웃음을 지은 나는 헨리가 내게 쓱 내미는 종이를 힐끗했다.
“이게 뭔데?”
“발렌타인 사가 발행하는 오늘자 일간특급입니다.”
[혜성같은 신인 레오노라 공녀 등장, “사교계의 꽃들, 전부 다 비켜!”]
“……내, 내가 1면이네?”
“예. 이 기자의 말에 따르면 공녀님께서 발하는 빛의 열기로 수도가 용암처럼 들끓고 있다는데요.”
“…….”
[레오노라 공녀의 곁을 지키는 정체 모를 꽃소년은 누구?!]
따위의 문구를 실눈으로 읽어 내린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신문을 치웠다.
‘뭐, 다행히 히스와 루카스의 의상이 마담 아그네스가 디자인한 제복이라는 건 언급해 줬네.’
고작 일간지였으니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홍보를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아, 오늘 회의가 끝나면 공녀님의 탄신 연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민망하게 턱을 긁적이는 나를 귀엽다는 듯 웃으며 바라보던 헨리가 느긋하게 입을 연다.
“응? 내 생일 연회?”
“네. 공작가가 수도 저택에서 여는 첫 파티가 될 테니까요.”
내 생일은 부랴부랴 황도에 올라올 준비를 하는 탓에 소리 소문 없이 지나 보내는 줄 알았다.
‘다들 그냥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내 생일까지 챙겨 가며 놀 상황이 아닌지라 부러 말하지 않고 있었던 건데.
“설마 연회를 열지 않으실 생각은 아니신 거죠? 여덟 살 생일 연회는 어린 여자 귀족들 사이에선 제법 각별할 텐데요.”
“열지, 뭐. 수도 귀족들과 안면을 트긴 해야 하니까.”
나는 헨리의 물음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인 후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괜찮겠어요? 아무나 초대해도?”
혹시나 그의 정체를 알아볼 만큼 친밀한 귀족이나 황족은 미리 리스트에서 제외시켜야만 했다.
내 뜻을 알아들은 루카스가 무심한 얼굴로 턱을 괸다.
“글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서.”
“…….”
“혼자 놀았거든, 나.”
그레고르도 왕따더니, 윌레닌 황족들은 왜 황족인 주제에 따돌림이나 당하고 사는 걸까.
* * *
수도 귀족들에게 무시 받을 수 없다며 오데트와 손을 잡은 헨리는 이를 악물고 내 생일 파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돈이야 넘치도록 많으니 별 상관은 없긴 한데….’
나는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게스트 리스트에 턱을 긁었다.
‘겨우 여덟 살짜리 공녀 생일 축하한다고 이만한 사람들이 올까?’
헨리가 추려 낸 리스트에는 하차니아와는 영 연이 없는 5대 귀족 발탄 자작의 이름도 있었다.
“헨리, 네임카드를 너무 많이 준비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안 오면 민망하잖아.”
나는 네임카드가 테이블 위를 가득 메웠던 아이네스의 생일 연회를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걱정 마세요, 공녀님. 오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초대장을 받지 못한 손님들을 위해 대기열도 준비해 놨는걸요.”
무슨 아이돌 콘서트도 아니고 웬 대기열?
‘아니지. 요즘 한창 인기가 치솟고 있는 벨루치가 초대 가수로 오니까 반쯤 콘서트인가?’
의아한 고개를 반쯤 기울이던 나는 곧 헨리가 알아서 하겠지, 싶어 어깨를 으쓱했다.
“특별 관리할 게스트는 전부 추리긴 했는데, 이 모녀가 조금 고민되네요. 어떡할까요, 아가씨?”
나는 헨리가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드리는 초상화를 힐끔하며 눈을 깜빡였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와 그녀의 품에 안긴, 나보다 조금 어두운 빛을 띠는 실버블론드 소녀였다.
“누군데?”
“멜리사 왕녀와 그녀의 딸이에요. 십 몇 년 전에 제국에 망명해 수도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타국 왕녀면 딱히 조심할 것도 없잖아.”
“아, 요즘 이 왕녀의 딸이 황실의 사생아라는 추문이 돌고 있어서요.”
나는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속삭이듯 낮아지는 헨리의 목소리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생아? 누구의?”
“그, 사라진 루카스 황자님과 멜리사 왕녀가 연인 사이였거든요.”
‘누가 누구의 애인이었다고?’
나는 언제나 뚱하다 못해 살벌한 루카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성격으로 연애를 했었단 말이야?’
“딸이 자랄수록 루카스 황자 전하의 외모를 빼닮아서, 공녀님이 아기였을 적 신전에 내려왔던 신탁의 해석이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거든요.”
아무래도 공녀님과 연관이 되었다 소문이 돌았던 신탁이다 보니 공녀님까지 구설수에 오를까 조심스러워서요.
나는 헨리가 덧붙인 사려 깊은 말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애매하네. 전 연인이었다면 루카스를 알아볼 수도 있는 거잖아.’
하지만 루카스는 친하게 지낸 귀족이 거의 없다는 식으로 말했었는데?
“일단 초대하지 마.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어린애 생일 파티에 오고 싶지 않을 거 아냐.”
* * *
애석하게도 멜리사 왕녀는 내 생일 파티에 엄청 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초대하지 말라고 했잖아?”
“안 했습니다. 초대객의 파트너 자격으로 파티에 올 줄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네요.”
나는 수도 사교계의 꽃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사람들의 이목을 한 번에 사고 있는 멜리사 왕녀를 힐끔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유명인이 나 같은 어린애 생일 파티에 어거지를 부려 가며 왔을 때에는 목적이 있는 걸 텐데.’
설마 그 목적이 루카스는 아니겠지?
‘하지만 신전도 루카스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 실패했는데, 일개 왕녀가 성공할 리 없잖아.’
나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 자꾸만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멜리사 왕녀의 모습에 침을 꼴깍 삼켰다.
‘루카스를 찾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다. 아니어야만 했다.
“……각하.”
루카스를 발견한 멜리사 왕녀의 눈에 고인 눈물에 나는 볼 안쪽을 콱 깨물었다.
‘누가 봐도 헤어진 연인과 재회한 얼굴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