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76화 (76/486)

제76화

루카스 윌레닌은 가족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족다운 가족을 가져 본 역사가 없었다. 황실은 혈연관계의 사람들이 서로의 목을 겨누는 게 일상인 곳이었으니까.

“아반니. 아나 조.”

슥슥, 이제는 익숙해진 공작가의 서류를 살피던 그는 제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던 작은 뒤통수를 떠올렸다.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항상 루카스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타인이 곁에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작디작은 잇새로 새어 나오는 부름이 마음에 짙은 파동을 남길 때가 있었다.

“아가씨께서 요즘 각하를 부쩍 따르십니다.”

“네, 전보다 훨씬 더 각하를 좋아하십니다!”

가신들이 그저 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레오노라가 사랑하는 아버지는 자신이 아닌 공작, 가스파르였으니까.

그런데도 그 입바른 말들이 귓속에 쏙쏙 박혀 들어와 버석 메마른 그의 입가를 웃음 짓게 했다.

허울뿐인 말임을 알고 있음에도 루카스는 부러 가신들을 자극해 ‘아가씨는 각하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는 둥, ‘전보다 더 각하를 사랑하시는 것 같다.’는 둥 하는 말을 듣곤 했다.

“루카쯔, 루카쯔는 니니의 하나뿌닌 파뜨너야.”

제 아비가 사라졌는데도 레오노라는 주눅 든 기색 없이 씩씩하게 공작가를 이끌어 나갔다.

영지 관리뿐이랴, 아이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신통방통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사업에 손을 대더니 순식간에 공작가의 재산을 눈덩이처럼 불려 나가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내게 마법을 배우고 레이디 티에리에게는 예법을 배웠지.’

몸이 두 개였어도 모자랄 만큼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레오노라는 투정 한 번 부리는 법이 없었다.

제국의 재산과 비등한 수준으로 불어난 공작가의 재정 상태를 살핀 루카스는 턱을 괸 채 집무실 구석에 놓인 소파로 시선을 돌렸다.

곤히 잠든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소리 없이 다가가 꼼꼼하게 살핀 레오노라의 고운 얼굴은 구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편안했다.

잘 먹고, 잘 자면서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이는 이제 막 봉우리를 맺은 봄 장미처럼 어여쁘기만 했다.

‘이제 공작이 없어도 괜찮은 게 아닐까.’

문득 루카스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갈 순간이었다.

“……아빠.”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든 것처럼 보였던 레오노라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힌다.

“……아빠, 아빠!”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두 눈을 질끈 감은 아이가 소파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팔을 흔들었다.

허공에 안쓰럽게 팔랑이는 아이의 손을 잡은 루카스는 헛웃음 비슷한 한숨을 흘렸다.

‘내가 무슨 미친 생각을.’

루카스 윌레닌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여태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레오노라가 그의 눈에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어떤 때는 정말로 제 딸인 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어도.

그럼에도.

* * *

여덟 살 생일을 맞아 대공사에 들어간 별관은 나만을 위한 저택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으아, 시원해.”

서재에 딸린 집무실 바닥에는 제랄드에게 의뢰해 특별 제작한 온돌까지 깔아 놨다.

“시원해? 방이 이렇게 더운데?”

“그 말이 그 말이야, 바보.”

뜨끈뜨끈한 땅바닥에 몸을 지지며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에녹이 서류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그림을 집어 든다.

“이건 뭐야?”

에녹이 발견한 그림은 세 살 무렵의 나를 안아 들고 있는 가스파르의 초상화였다.

“아빠 옛날 초상화네. 왜 최근에 그린 게 아니라 옛날 걸 액자에 끼워 놨어?”

대귀족은 보통 1년에 한 번쯤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린다.

당연히 올해 그린 최신 초상화도 있었지만, 내게는 에녹이 손에 든 그림만이 특별했다.

‘저 그림은 진짜 가스파르의 초상화니까.’

세 살 이후에 그려진 초상화는 전부 루카스의 것이었다.

“그냥. 별 의미 없어.”

들끓는 오러를 제어하는 것을 버거워하는 에녹이 행여 실수라도 해서 그림을 상하게 할까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그냥 나는 이 초상화가 가장 마음에 들어, 에녹.”

내게 순순히 그림을 빼앗긴 에녹이 내 말에 잘생긴 미간을 좁힌다.

“나나 형이 없는데도?”

“너희랑 함께 나온 건 여기 있잖아.”

입안에 볼록 바람을 집어넣던 에녹은 내가 책상 위를 장식한 다른 초상화를 집어 들고 나서야 표정을 풀었다.

“내가 형보다 리니 너랑 더 가까이 붙어 있네.”

“……그래?”

에녹의 말에 가늘게 뜬 눈으로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보지만, 쉬이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0.001센티 정도 가깝나?’

“응! 역시 우리의 우애가 그림에도 나타나나 봐.”

“으응, 그런가 보네.”

나는 에녹의 헛소리에 대강 맞장구를 쳐주며 가스파르의 초상화를 안주머니에 챙겨넣었다.

‘아빠랑 나랑 단둘이 나온 건 이 초상화뿐이야.’

언제쯤 그림 속 아빠가 아닌 진짜 아빠를 볼 수 있을까.

한숨을 내쉰 나는 뒤적이다 만 연금술 서적을 다시 집어 들었다.

[육체와 떨어진 영혼이 인계를 떠돌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 시간이 길어야 10년이라는 서술에 나는 초조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루카스가 아빠 몸에 빙의하게 된 지 이제 10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잖아.’

그의 영혼과 육체의 실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돌려보내야만 했다.

‘후…. 아냐, 황성에는 분명 단서가 있을 거야. 걱정 마.’

생산성 없는 걱정으로 전전긍긍해봤자 실전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불안함에 울렁이는 속을 애써 가다듬으며 에녹 몰래 주머니 속 초상화를 꺼내 들었다.

그림 속 아빠는 특유의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얼굴로 나를 꼭 끌어안은 채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리니 널 사랑한단다.”

“사랑스러운 내 딸.”

가스파르는 아무 재주도 없는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 준 유일한 어른이었다.

“……보고 싶다.”

그의 초상화를 꼭 끌어안은 채 내가 중얼거린 말에 에녹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아빠 말이야? 보러 가면 되잖아. 본관에 계실 텐데.”

당장 몇 분만 달려가도 볼 수 있는 사람을 왜 그리 애틋하게 그리워하냐는 핀잔에 나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으응, 이따 가려고.”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핑계로 에녹을 내보낸 나는 수신인이 없는 편지를 꺼내 들었다.

[아빠에게

오늘도 보고 싶어요, 아빠.

정말 정말 보고 싶어요.

잘 지내고 있는 건지, 날 지켜보고 있는 건지 루카스를 통해 귀띔만 해 줄 수는 없는 거예요?

레오노라가]

평소에 쓰던 편지와 그리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펜촉을 내려놓은 나는 늘 그랬듯 화로에 다 쓴 편지를 던져 넣었다.

화르륵- 소리와 함께 편지 귀퉁이가 타닥타닥 타들어 간다.

나는 매일같이 가스파르에게 편지를 썼고, 매일같이 그 편지를 태워 버렸다.

누구도 내가 가스파르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되었으니까.

형제인 에녹과 실비마저도.

해서 가스파르는 내게만 사라진 사람이었다.

* * *

레오노라의 서재를 빠져나온 에녹은 훌쩍 길어진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 빠르게 공작의 집무실에 당도했다.

“아빠.”

벌컥 문을 열어젖히자, 무척 귀찮다는 듯 서류를 휘적휘적 넘기던 루카스가 고개를 든다.

“왜.”

‘언제부터 저렇게 업무 보는 걸 싫어하셨었지.’

에녹은 루카스의 뚱한 얼굴에 미간을 좁히며 제 아비가 가주로서의 임무를 등한시하려고 기를 쓰게 된 시점을 떠올렸다.

‘옛날에는 너무 완벽해서 거리감이 느껴졌는데, 요즘 아빠는 조금 더 친근하다고 해야 하나.’

아마 자신이 커서 어른인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모양이라고, 대충 판단을 내린 에녹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벌렸다.

“리니가 아빠 보고 싶다고 울적해하던데요. 요즘 바빠서 안 놀아 주시는 거예요?”

“……그래?”

핀잔을 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에녹의 기대와 달리 그가 반색하며 얼굴을 들었다.

“아, 아빠가 보고 싶다고 했다고.”

그러나 곧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수그린다.

‘뭐야. 왜 저래?’

에녹은 이랬다저랬다 왔다 갔다 하는 공작의 태도에 인상을 찡그리며 그의 책상에 다가섰다.

“네, 뭐. 황녀님 생신 연회에는 히스를 데려가기로 결정한 모양이지만, 리니는 원래 아빠 좋아하잖아요.”

“뭐? 그 자식을 왜 연회에 데려가.”

“우리 집에서 걔가 제일 예쁘대요.”

에녹의 말에 와락 얼굴을 찌푸린 루카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찬다.

“그 자식이 도대체 뭐가 예쁘다는 거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 머리칼이랑 눈 색이 옅어서 그런가? 리니는 그 자식 눈이 구름이 잔뜩 낀 하늘같아서 좋대요. 흐리멍덩한 게 취향인가 봐.”

“색이라면 나도 못지않게 흐린데!”

버럭 목소리를 높이는 루카스의 말에 에녹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 얼굴을 구겼다.

“아빠, 거울도 안 보세요? 아빠 머리는 까만색이잖아요.”

“…….”

“혹시 노안 오셨어요?”

가스파르라면 매를 들고 호통을 쳤을 에녹의 버릇없는 말에도 루카스는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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