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75화 (75/486)

제75화

“이제 곧 여덟 살이 된다지.”

서재 한가운데에 깔린 푹신한 융단 위에서 원작을 뒤적이던 나는 티에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

방긋 웃으며 알은체를 하자 그녀의 무뚝뚝한 입매가 씰룩쌜룩 춤을 춘다.

“이제 곧 여덟 살이나 되는 녀석이 할미 반갑다고 그렇게 품위 없이 웃는 것이냐.”

저 말은 자신을 반기는 내가 귀여워 죽겠다는 뜻이었다.

“할머니가 너무 반가운 걸 어떡해요~!”

나는 부끄럽다는 듯 부러 몸을 베베 꼬다 가까이 다가온 티에리의 품에 덥석 안겼다.

“이번 주는 수업도 없는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지난 5년간 티에리는 내 가정교사를 자처하며 티에리 자작저와 하차니아 내성에 위치한 저택을 오고 가며 지냈었다.

‘영지를 돌보느라 티에리로 내려간 줄 알았는데.’

세월을 빗겨간 듯 여전히 꼿꼿한 티에리의 등을 쓰다듬는 나를 뚱한 얼굴로 노려보던 그녀가 불쑥 상자 하나를 들이민다.

“여덟 살이 되면 너에게도 여기저기서 초대장이 날아오지 않겠냐. 티파티든, 살롱이든, 황궁 연회든 말이야. 그때 비루먹은 꼴을 보여 내 체면을 상하게 둘 수는 없지.”

낯이 뜨거운지 괜히 틱틱댄 티에리가 턱을 높이 치켜들며 말을 덧붙인다.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이거 설마 드레스예요?!”

나는 티에리의 말에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상자 포장을 풀어헤쳤다.

지금 제국에서 가장 핫한 디자이너, 마담 아그네스는 여태 아동복을 제작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 드레스, 반드시 유행한다!’

나는 몸을 딱딱하게 조이는 기존의 보디스(Bodice)와 다르게 누르면 폭 들어갈 정도로 폭신폭신한 재질로 이루어진 라일락색 드레스를 한 아름 품에 안았다.

“너무 예뻐요! 역시 마담 아그네스!”

제자리에서 방방 뜰 정도로 좋아하는 내 모습에 티에리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코끝을 쓱 닦는다.

“녀석. 역시 옷을 참 좋아하는구나.”

아니, 전직 특수부대 출신의 나는 옷에는 쥐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돈이지!’

하지만 속내를 들킬 수 없었던 나는 티에리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헤벌쭉 웃었다.

“응! 나 할머니가 만드는 드레스, 엄청 좋아하니까요!”

마담 아그네스의 드레스 살롱, 그러니까 티에리의 의류 사업은 내가 아이네스의 아이디어를 참고하지 않고 진행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사업 중 하나였다.

아이네스는 여덟 살 무렵에 천재지만 자신의 재능을 믿지 않던 코코를 만나 의류 사업에 손을 뻗는다.

원래는 내가 먼저 그 ‘코코’를 찾아 살롱을 차려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패션 문외한인 내 눈에도 티에리는 늘 멋진 옷을 입는 것처럼 보였는걸?’

가정교사 역할을 하겠다고 내성에 저택까지 매입한 티에리는 3층짜리 저택을 드레스로 가득 채울 만큼 멋쟁이 할머니였다.

‘하녀들이 티에리의 패션 감각이 탁월하다며 숙덕이기에 혹시 몰라 자르파라와 손을 잡게 했더니….’

티에리의 놀라운 패션 센스와, 돈 냄새 하나는 귀신같이 맡는 자르파라의 상업적인 감각이 만나 마담 아그네스의 드레스 살롱이 탄생할 수 있었다.

‘개인 자산으로만 치면, 티에리는 이제 이아론 후작만큼 부자지롱!’

후작가의 재산을 모두 합하면 당연히 따라잡기 힘들겠지만, 개인 소유 재산은 티에리가 앞설 것이다.

“움화화.”

아, 뿌듯하다.

최근 손대는 사업마다 족족 망해 코르티잔인 카멜리아와 불화까지 생겼다는 이아론 후작의 소식을 떠올린 나는 쾌감에 부르르 몸을 떨며 라일락 드레스에 코를 묻었다.

“드레스에서 꽃향기가 나요, 할머니!”

“장식에 생화를 섞었단다. 파티 가기 전에 보여 주렴. 시든 생화는 교체해야 하니까.”

“응!”

나는 씩씩하게 대답하며 티에리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자, 한번 걸어 보겠느냐?”

테슬 장식이 풍성한 스커트는 뒤쪽이 훨씬 길어서 걷기가 조금 불편했지만, 이 정도 걸림돌은 지금의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무려 ‘그’ 아그네스 티에리에게 5년이나 교육받은 몸이었으니까.

“좋아. 어깨가 조금 흔들리긴 하지만 그 정도면 완벽하구나. 황녀의 옆에 서도 내 새끼의 기품이 더 빛나겠어. 아니, 내 새끼 우아함이 넘쳐흘러 황녀가 아예 잠겨 버리겠구나.”

나는 줄줄 나오는 티에리의 칭찬에 머쓱한 뺨을 긁었다.

5년 동안 성장한 건 내 예법이나 태도뿐만이 아니었다.

‘티에리의 팔불출 멘트가 나날이 길어진단 말이지.’

“정말 고마워요, 할머니. 잘 입을게요. 이 드레스, 할머니의 역작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인걸.”

“내 새끼의 사교계 데뷔를 허투루 준비할 수는 없지.”

“하지만 내 데뷔탕트는 아직 멀었는걸요?”

내 말에 티에리가 나는 아직 멀었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연다.

“여덟 살을 기점으로 각종 파티에 참석할 수 있게 되지 않느냐. 첫 황궁 연회가 쁘띠 데뷔탕트나 마찬가지다.”

“아아, 그렇구나.”

아이네스 견제와 루카스의 몸 찾는 것에만 치중할 생각이었는데.

티에리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럼 파트너도 있어야 하나요?”

“당연하지.”

“흐음. 누굴 데려가야 하나.”

내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분명 굳게 닫혀 있다고 믿었던 창문이 벌컥 열리며 에녹의 환한 얼굴이 튀어나온다.

“나, 나나나!!!”

“에녹, 내가 창문으로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훈련을 막 마친 에녹의 몸은 채 열기가 가시지 않아 조심하지 않으면 집 안 살림을 전부 녹여 버리곤 했다.

“창가 망가진다니까.”

나는 푸시식 소리를 내며 연기가 폴폴 피어오르는 대리석 창가를 가리키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저게 다 얼마인데!’

“그래, 에녹은 몹쓸 놈이군. 그러니 내가 가겠다.”

언제 왔는지 모를 실비가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는다.

“……추워.”

마찬가지로 훈련을 받다 왔는지 실비의 손에서는 허연 냉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리니가 춥다잖아, 형! 형이랑 다니면 리니 감기 걸려서 안 돼.”

“나는 오러를 통제하지 못하는 천방지축인 너와는 다르다.”

“아니거든?! 나 통제 잘하거든!!!”

나는 버럭버럭 목소리를 높이는 에녹과 그를 밀어내기 위해 오러까지 사용하는 실비를 번갈아 바라보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휴….”

내가 늙는다, 늙어.

둘 중에 한 명을 고르게 되면 다른 한 명이 단단히 삐질 것이 뻔했기에 고민하는 내 앞에 나와 적당히 어울리는 크기의 흰 손이 뻗어 나온다.

“공녀.”

“…히스?”

“내가 공녀를 에스코트하고 싶습니다.”

나는 감정의 고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러면서도 묘한 긴장을 담고 있는 소년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자들보다는 내가 더 강하니 공녀를 지킬 수 있을 겁니다.”

“뭐? 한번 붙어 볼래, 이 새끼야?”

자신을 무시하는 히스의 말에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린 에녹이 두 팔을 걷어붙인다.

“덤벼!”

“하지 마, 에녹. 어차피 네가 져.”

에녹의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긴 했지만, 히스는 무려 아크레아를 통솔하던 소년왕이었다.

‘루카스랑 붙여 놔도 히스가 과연 질까 싶은데 에녹이 싸움이 될 리가 없지.’

나는 드레스 소매에 붙은 생화 장식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히스를 데려갈까?’

티에리가 그를 양자로 입양한 덕에 히스는 이제 티에리 자작가의 영식이었으니 자격은 충분했다.

나는 구휼원에서 탈출했던 그 순간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히스의 얼굴을 흘긋하며 손을 뻗었다.

“좋아. 히스랑 갈래.”

“뭐?! 왜!!!”

“여기서 히스가 제일 예쁘니까.”

울컥해 목소리를 높였던 에녹이 내 대답에 깨갱하며 풀이 죽는다.

“……그래, 알았어.”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추종자를 몰고 다니는 에녹과 실비조차 한 수 접어 줄 수밖에 없을 만큼 히스는 예뻤으니까.

신이 심혈을 기울여 섬세하게 조각한 작품처럼 아름다운 히스의 미모는 세월을 빗겨 간 듯 조금도 닳지 않고 여전히 눈이 부셨다.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언제 또 히스를 밖에 데려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

티에리의 가슴 선에 겨우 닿을 만큼 작은 소년.

저주의 여파일까?

히스는 내가 구휼원에서 탈출시킨 이후로 전혀 자라지 않고 있었다.

‘티에리의 양자가 자라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돌아다니기 곤란해질 거야.’

이렇게 순하디순한 아이인데, 집 안에만 갇혀 있는 건 너무 가여웠다.

“내가 황성 구경시켜 줄게.”

“좋습니다, 공녀.”

‘아휴. 우리 불쌍한 히스.’

“저, 저 자식 표정 좀 봐, 형!”

“허. 기가 막히는군.”

나는 내 손을 붙잡은 히스가 어떤 얼굴로 에녹과 실비를 보고 있는지 새까맣게 모르는 채 안타까운 고개만 수그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