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68화 (68/486)

제68화

“레이디 티에리, 제가 오늘 이 머리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세요?!”

“세상에, 제 드레스 찢어졌잖아요! 이거 오백 골드짜리예요!”

“저희 아버지가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거예요!”

돌돌 말아 올린 머리가 레이디 티에리의 지팡이에 꼬챙이처럼 꿰인 오리 세자매가 꿱꿱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너희들을 보고 있노라니 호수에라도 놀러온 것 같구나.”

여자들은 티에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마침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는 쿠쿡 웃음을 터뜨렸다.

“각설하고, 셋 모두 나가지 않겠느냐.”

“악! 까악! 내 머리!”

말은 권유에 가까웠지만 레이디 티에리는 여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지팡이를 움직였다.

후두둑.

여자들의 뜯긴 머리칼이 허공에 부유하는 모양을 구경하고 있는데 티에리가 쾅! 문을 닫아버린 다음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몸은 괜찮은 것이냐.”

“…녜.”

사실 몸이 불구덩이에 들어온 것처럼 더웠다가 오들오들 추웠다가를 반복하는 중이었지만, 티에리에게 적잖이 겁을 집어먹은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고얀 것!”

그러자 티에리가 사납게 눈매를 치켜세우며 내가 누운 침대를 팡팡 두드린다.

“지금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고해! 괜찮지 않지 않느냐!”

가뜩이나 아파서 정신이 아이 상태에 가까워진 나는 티에리의 노호에 찔끔 놀라 심장께를 눌렀다.

“히잉.”

놀란 걸 가라앉히기 위해 혼자 스스로 어깨를 도닥였는데도 콩닥콩닥 뛰는 가슴이 도무지 진정되질 않는다.

“끕!”

이러다 심장마비로 사망하겠어!

“후엥-!”

결국 눈물을 뚝 떨구고 마는 내 모습에 티에리가 허둥지둥 나를 안아든다.

“왜, 왜 우는 고! 뚝하지 못해!”

“할머미 무셔어.” (할머니 무서워.)

어려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레이디 티에리는 거의 도깨비 수준으로 무서웠다.

“무셔어-! 끄윽!”

자신이 무섭다고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녀가 내게 손을 뻗는다.

곧 티에리는 나를 둥기둥기 어르기 시작했다.

“아, 안 무섭다. 이 할미 무서운 사람 아니야.”

“아니에오! 엄쩡 무션 사라미야! 니니한테 소리 질러써!”

“아이고, 이 녀석아! 그건 네가 아픈데도 안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니까-!”

“후에엥.”

다시금 버럭 호통을 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려던 티에리의 입이 내 울음소리에 조개처럼 다물어진다.

“녀석, 겁이 많고 잘 놀라는 게 제 엄마 어릴 때랑 똑같구나. 눈물만 많아서는.”

아닌데, 나 잘 놀라지도 않고 겁도 없는 미친개였는데.

게다가 제국의 유일한 여자 제독이었던 노엘 또한 겁이 많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티에리의 말을 속으로만 부정하며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내 속을 알 길이 없는 그녀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내 이마를 쓰다듬었다.

“열이 나는 것 같으니 이 해열제를 먹고 자거라. 저 출처도 모를 쓰레기들은 입도 대지 말고.”

지팡이 끝으로 여자들이 가져다준 약들을 전부 바닥으로 쓸어버린 티에리는 동그란 알약과 함께 뜨끈뜨끈하게 데운 머그컵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쓸 테니까 따뜻한 초콜릿을 같이 먹거라.”

“쪼꼬레!”

어디서 달달한 향기가 올라온다 싶더니, 초콜릿 냄새였구나.

나는 카카오 버터가 듬뿍 들어간 것 같은 진한 초콜릿 냄새에 코를 벌렁였다.

“…단 거 좋아하는 것도 똑같구나.”

작게 중얼거리며 내 등을 토닥이는 티에리의 품은 생각보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노엘의 품에 안기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나는 그녀의 가슴에 뺨을 바싹 붙인 채 고개를 치켜들었다.

호로록.

초콜릿을 꿀떡꿀떡 마시는 내 모습에 티에리의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이렇게 보니까 노엘의 초상화랑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할머미. 언마 달마써.” (할머니. 엄마 닮았어.)

내 말에 티에리가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닮았을 리가 없지. 신데렐라는 내 친딸이 아니었는데.”

“…신데레라?”

“네 엄마 어릴 적 별명이었다. 하도 싸움박질을 하고 다녀서 늘 온몸이 재투성이였거든.”

나는 티에리의 설명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쩐지 노엘의 어머니치고는 너무 젊다 싶었다.

‘처음에는 맞선 상대라고 오해할 정도였으니까.’

뭐, 티에리의 꼿꼿한 자세도 한몫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노엘은 내 딸이다.”

내 놀란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가 다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내가 키운 내 딸이야. 배내옷도 내가 직접 기워 입혔다. 내딛는 첫 발걸음, 첫 옹알이도 내가 보고 들었어.”

나는 티에리의 느릿느릿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핫초콜릿을 홀짝였다.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계모라고 헐뜯어도 나는 노엘을 사랑했다. 알겠느냐?”

“우….”

티에리는 내가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대답하지 말거라.”

거참, 성질 한번 급한 할머니네.

“어차피 믿어 주지 않겠지. 남편이었던 이아론 공도 믿어 주지 않았는데 어쩌겠느냐.”

티에리의 눈가는 분명 건조했지만, 나는 왠지 그녀가 울고 있는 것만 같아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할머미, 울디 마.”

“안 운다. 열이 나서 헛것을 보는 게냐.”

“니니는 할머미 말 미더요. 할머미 언마 마니 사랑해써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안다고.”

“니니가 언마 업는 애라고 무시당할까 바 여기까지 와 줘짜나.” (리니가 엄마 없는 애라고 무시당할까 봐 여기까지 와 줬잖아.)

잔뜩 쉬어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인 나는 옅은 주름이 진 티에리의 눈가를 토닥였다.

“언마 사랑해서 니니까지 사랑하자나요.”

“고얀 녀석, 네가 뭘 안다고. 이 고얀 녀석….”

나는 단어가 뭉개질 정도로 젖어든 티에리의 목소리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뭐가 급하다고 이 어미를 두고…. 이 어린 것을 두고, 고얀 녀석….”

티에리가 자꾸만 중얼거리는 고얀 녀석이 더는 나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었으니까.

* * *

‘약효가 정말 좋네.’

이튿날, 맑은 정신으로 깨어난 나는 티에리가 여분으로 두고 간 알약을 손가락 끝에 올리며 눈을 가늘였다.

‘힐다보고 연구하라고 해야지~!’

더 발전시켜서 움베르토 제약 제품으로 출품해야겠다.

오전 일과 중 하나인 자르파라의 보고서를 빠르게 훑은 나는 오리 세자매-하차니아에 혼담을 넣은 귀족가의 여식들-이 원로 회의에 들이닥쳤다는 소식에 침대에서 발딱 일어났다.

당도한 대회의장은 평소와 달리 오리 우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각하, 저희에게 사과해 주세요! 재혼할 생각이 없으시다뇨!”

“힐베르트 백작가의 이름으로 정식적으로 각하를 고발하겠어요!”

“예! 저도 혼인 빙자 같은 걸로 각하를 신고하겠어요!”

‘도대체 루카스가 언제 너랑 결혼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기가 막혀 빠르게 회의장 안으로 들어선 나는 여자들이 소리를 지르든 말든 무심한 얼굴로 서류를 보고 있는 루카스에게 오도도 달려갔다.

“아반니.”

그러자 그가 재빨리 나를 제 무릎에 앉힌다.

“끙차.”

루카스의 무릎에 무사히 안착한 나는 원로 회의 진행 상황과 더불어 여자들의 프로필을 뒤적였다.

“제가 누군지 모르지 않으시잖아요? 저희 전부 폐하의 오촌조카들이에요!”

그러나 내가 제 신상 정보를 다 파악하기도 전에 성질 급한 여자 한 명이 먼저 목소리를 높인다.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설치나 했는데 전부 그레고르의 친척이라고?’

“각하와 레이디 티에리께서 저희에게 저지르신 무례를 황제 폐하께서 어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네요.”

오리 세자매의 수장인 듯 보이는 여자가 어제 쥐어뜯긴 머리가 아픈지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잇는다.

“안 그래도 하차니아와 황실의 사이가 좋지 못한 것으로 아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여자의 말에 사색으로 질린 원로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그녀를 만류한다.

“아이고, 레이디 드루엘라! 일단 진정하십시오. 각하께서 재혼 생각이 전혀 없으시다고 한 건 아마 당황해서 그냥 하신 말씀이실 겁니다.”

모리츠 백작이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는 루카스를 저지하고 입을 열었다.

“웅. 아반니가 구냥 한 말이래오.”

“여,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나는 내 말에 맞장구를 쳐가며 기괴하게 입을 찢는 모리츠와 흥, 콧방귀를 뀌는 여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긍데 울 아반니 얼굴 마니 바. 니니처럼.”

“……예?”

“모생긴 아준마드른 안댈 거 가태. 미아내.” (못생긴 아줌마들은 안 될 것 같아. 미안해.)

“지금 뭐라고-! 모, 못생겨요?!”

내 건성건성한 사과에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린 여자들이 앞으로 나서는 순간, 루카스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공녀의 말이 맞다.”

마치 추한 것을 보지 말라는 양 내 눈까지 가려 준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웃음기까지 섞여들었다.

“이아론 후작가의 장녀는 상당히 예뻤거든.”

결국 너네는 안 예쁘다는 말이었다.

“어, 어찌 정중하고 젠틀하기로 소문난 각하께서 숙녀인 저희들에게 그런 모욕적인 발언을 하실 수 있나요?!”

그거야 네 눈앞의 남자는 가스파르가 아니니까.

“정말로 폐하께 발고하겠어요!”

나는 울컥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오리 세자매를 바라보다 푸에치, 기침소리를 냈다.

“에찌-! 에치이!!!”

“간밤에 공녀를 찾아가 못살게 굴었다던데. 감히 공녀를 괴롭힌 죄에 대한 벌은 어떻게 받을 생각인가.”

“그, 그건 저희가 간호하는 법을 잘 몰라서.”

“간호할 줄 모르는데 아픈 공녀를 찾아갔다? 해코지라도 할 생각이었나.”

살인미수로군.

루카스의 살벌한 단어 선택에 여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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