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무사히 함선을 인양하는 데 성공한 나는 아크레아의 유물을 쌓아 올린 창고에 자르파라를 데려갔다.
“이, 이건…!”
브리넨 후작의 금은보화에도 시큰둥하던 그녀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다.
“아크레아의 유물 아니냐? 이 성배는 아크레아 왕실의 성배이고 이 보관은 아크레아 대신관의 것인데!”
“웅. 마자.”
그녀가 자리에서 팔짝팔짝 튀는 통에 먼지가 떠올라 콜록콜록 기침한 나는 손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르파라가 간리해 조요.” (자르파라가 관리해 줘요.)
내가 불쑥 내민 창고 열쇠를 바라보는 자르파라의 동공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온다.
“뭐? 어째서 본좌에게 이런 귀한 유물들을 맡기는 것이지?”
그거야 현 제국의 상인들 중에 자르파라만큼 아크레아 유물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본좌를 뭘 믿고?”
나는 나에 대한 믿음이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는 자르파라의 눈빛에 민망한 턱을 쓸었다.
“자르파라는 히스 배신하지 아늘 거자나요.”
그런 히스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아기가 전하를 구속하고 있기 때문이로구나!”
내 건성건성한 설명에 자르파라가 와락 인상을 찡그리며 목소리를 높인다.
“나쁜 아기 같으니! 본좌가 전하를 자유롭게 해 드릴 것이다!”
병기 컨트롤러나 마찬가지인 셉터의 존재를 알고 있는 모양인지 자르파라는 내가 히스를 조종하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세떠가튼 거 업따니까오.”
아무리 말해도 믿질 않으니, 원.
어깨를 으쓱하며 제 말을 부정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자르파라가 스윽 팔을 올려 창고 선반을 가리킨다.
“저기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자르파라의 말에 고개를 돌린 나는 중앙 선반에 덩그러니 놓인 셉터를 발견하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잉.”
저건 또 어디 있었던 거람.
“이 셉터로 전하를 구속하고 있었던 것이로구나! 본좌가 파괴하겠느니! 으악!”
내가 이미 없애 버린 셉터와 쌍둥이처럼 닮은 셉터를 향해 손을 뻗은 자르파라의 몸에서 푸쉬식 연기가 피어오른다.
“겨, 결계가 있었구나.”
뽀글뽀글 부풀어 오른 자르파라의 적발에 푸후훕 웃음을 터뜨린 나는 셉터가 보관된 상자에 가까이 다가갔다.
“만지지 말거라, 아기! 위험하다!”
‘언제는 내가 이 셉터로 히스를 조종하고 있는 거라더니.’
나는 내게 버럭 목소리를 높이는 자르파라를 힐끔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색깔만 다르지, 정말 내가 파괴한 셉터랑 똑같이 생겼네.’
설마 예비용인 걸까.
‘그래서 히스가 자유를 찾아 떠나지 못하고 내 곁에 머무는 건가?’
“레세로.”
묵색의 셉터를 빤히 바라보던 나는 명주실처럼 섬세하게 마나를 뽑아내 상자를 감싸고 있는 결계 마법을 해제시켰다.
“아기가 어찌 그런 마법을 아느냐?”
“배워쩌.”
요즘 나는 대마법사 루카스에게 직접 마법을 사사받는 중이었다.
‘내가 이 집에서 최약체라나, 뭐라나.’
단지 오러소드를 사용하지 못하고 아직 몸이 에녹과 실비보다 작을 뿐인데!
나는 내 작은 몸을 힐난하던 루카스의 눈빛을 떠올리며 억울함에 발을 동동 구르다 셉터를 품에 안았다.
‘어쨌든 예비용일 수도 있으니까 이것도 파괴해야지.’
가라앉은 아크레아의 함선은 말 그대로 보물선이나 다름없어서 유물이야 차고 흘러넘쳤다.
나는 셉터를 품에 안은 나를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르파라를 무시한 채 뽀쨕뽀쨕 창고를 벗어났다.
“히스.”
히스가 자주 찾는 후원에 들어서자 가제보에 앉아 바람을 쐬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공녀.”
내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내가 꼭 끌어안고 있는 셉터를 발견하고 예쁜 미간을 좁혔다.
“그건….”
“히스의 세떠랑 달마써.”
“같은 물건인 것 같습니다.”
나는 히스의 담담한 대답에 고개를 까딱인 후 셉터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롬 이것두 업애야지.”
팡-!
오러로 감싼 손바닥으로 셉터를 꽈악 누르자 안 그래도 미세한 균열이 가득했던 셉터가 공중에 부스스 흩어진다.
나는 셉터를 감싸고 있던 검은 마나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때?”
‘저주가 걸려 있던 모양인데.’
“모가 달라져써?”
내가 셉터를 파괴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소년이 내 물음에 느릿느릿 입을 연다.
“무엇이요.”
“니니 떠나구 시퍼져써?”
내 물음에 평온하기만 했던 히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아뇨.”
그는 대개 무표정했지만, 가끔 저렇게 사납게 얼굴을 찌푸릴 때면 조금 무서울 때가 있었다.
‘너무 예뻐서 그런가.’
나는 찬란한 햇볕이 그에게만 쏟아지는 것만 같은 착각에 고개를 갸웃하다 방긋 웃었다.
“다행이녜.”
“…네?”
“이거 땜에 안 떠나는 곤가 쪼꼼 고민해꺼든.”
히스가 자유롭게 살고 싶어 공작가를 떠나겠다고 하면 절대 막을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소년이 공작가에 머무는 게 좋았다.
히스 같은 미인의 존재는 복지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니니는 히스가 요기 인는 게 조아.”
내가 방싯 웃으며 하는 말에 히스의 무감한 얼굴이 천천히 붉어진다.
“웅? 어디 아포?”
히스의 반응에 당황한 내가 그에게 한걸음 다가서려는 순간이었다.
“왕이시여-!”
언제 창고를 벗어났는지 모를 자르파라가 감격한 얼굴로 히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진정 자유를 되찾으신 것이었군요!”
자르파라의 외침에 히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아기의 말이 사실이었어요!”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은 자르파라가 불쑥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기, 아니, 빛이시여-! 그대가 저의 왕을 구원하셨나이다!”
나는 자르파라의 느끼한 말에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반보 물러났다.
“빛이시여-!”
“쩌리 가….”
“아크레아를 비추는 태양이시여-!”
“쩌리 가, 졔빠루!” (저리 가, 제발!)
부담스러워 미치겠네.
* * *
나를 빛과 소금, 태양 따위에 비유하며 쫓아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자르파라는 매우 열성적인 일꾼이 되어 주었다.
‘그전에도 유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말 인간을 벗어난 수준이지.’
거상(巨商) 자르파라.
상인이 괄시받는 풍조가 있는 제국이라지만, 거상이라는 호가 아무에게나 붙는 건 아니었다.
“빛이시여, 당신께서 말씀하신 제약 사업 또한 성공적으로 발족했느니.”
자르파라가 깔끔하게 정리한 서류를 한눈에 훑은 나는 그녀의 보고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웅. 고마어.”
힐다가 맡게 된 의료원을 중점으로 한 제약 사업,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함선 투자를 중심으로 한 무역 사업, 그리고 아크레아 유물을 전시하며 개장한 박물관까지.
자르파라는 거상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며 사업을 미친 듯이 확장해 나갔다.
“자르파라 전말루 대다내.”
“전혀 아닙니다, 빛이시여! 당신께서 그려 내시는 청사진이 대단한 겁니다! 당신의 선구안은 정말로 놀랍습니다!”
마치 미래를 보시는 것처럼.
자르파라가 덧붙인 말에 양심이 콕콕 찔려 온 탓에 나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뭐, 아직 아이네스의 사업 아이디어를 훔친 건 없다고.’
이제 막 꼬물꼬물 자라면서 그레고르를 꼬시는 중인 아이네스는 사업을 시작할 만한 단계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아직일 뿐, 훔치긴 할 거다.
‘그러게 누가 내 마나 탐내래?’
같은 시한부 육체면서 주인공이라 그런지 치사하게 군다.
움후후.
나는 틈만 나면 하차니아를 압박해 내 마나 그릇을 빼앗으려 드는 아이네스의 속마음이 적힌 원작을 들여다보며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한 살 정도 더 많으니까 얼른 선수 쳐야지.’
“그롬 니니 아반니 집무시 다녀오께.”
“넵!”
나는 힘차게 대답하는 자르파라의 기특한 머리를 쓰담쓰담해 준 다음 그녀의 방을 벗어났다.
“아반니.”
뽀쨕뽀쨕 정원을 지나 본관에 도착한 나는 헨리와 행정관의 눈치를 보며 집무실에 들어섰다.
“바빠오?”
내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서류산에 갇혀 있던 루카스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보면 모르나.”
‘내가 굶는다고 협박한 이후로 일을 참 열심히 한단 말이지.’
나는 그의 시큰둥한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책상에 다가섰다.
“아나조.”
내 요구에 루카스가 나를 달랑 안아 올려 제 무릎에 앉힌다.
‘역시 루카스랑 붙어 있어야 일하기가 편하다니까.’
나는 공작가의 현 상황을 나타내는 서류들을 한눈에 훑으며 방싯 웃었다.
‘새로 뽑은 행정관들이 유능해서 일당백을 하고 있구나. 그렇다면 하차니아의 이름으로 굴리고 있는 상단 쪽으로 사람을 충원해도 되겠어.’
나는 루카스가 가스파르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이점을 극한으로 이용하며 공작가의 재산을 쌓아 올리는 중이었다.
아무리 공녀의 권력이 있다지만 아기의 몸으로는 공작가를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었으니까.
“막내 아가씨께서 요즘 부쩍 각하를 따르시는 것 같습니다.”
장난치는 척 루카스가 보고 있던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나를 지켜보던 헨리가 히죽 웃으며 입을 연다.
“매일같이 집무실을 들락거리시잖아요. 원래는 재미없다고 가끔 오셨는데요.”
‘뭐래? 그냥 서류 보려고 오는 건데.’
“아니-”
나는 헨리의 뜬금없는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부정하려고 입을 벌렸다.
“…그런가?”
그러나 내 정수리에 턱을 받치고 있던 루카스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먼저였다.
“예! 요즘 아가씨의 아빠 사랑이 아주 대단해 보입니다!”
피식.
나는 헨리의 열성적인 대답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루카스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왜 좋아하고 난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