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64화 (64/486)

제64화

“자, 잠깐만!”

내가 자신을 질질 끌고 들어간 곳이 솔로아 공작성 정원과 연결된 숲이라는 것을 깨달은 여인이 화들짝 놀라 나를 잡아당긴다.

“아기야, 잠깐만!”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우직한 걸음만 계속해서 옮겼다.

“어후, 무슨 아기가 이렇게 힘이 세?!”

‘나도 시간 없어. 나도 빨리 인양된 보물선 구경하러 가야 한단 말이야!’

투덜거리는 여인의 말에 입을 삐죽 내민 나는 검붉은 벽돌로 지어진 솔로아 공작성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조금 으스스한데.’

하차니아 공작성만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성이었으니 당연히 그만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지만, 솔로아의 공작성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황량한 냄새를 풍겼다.

“아주머미, 곤자써에 사람 안 사라?”

내가 을씨년스러운 공작성의 뒤뜰을 가리키며 묻자, 어깨를 으쓱한 여인이 한숨처럼 입을 연다.

“살지, 왜 안 살아. 각하께서 사람이 제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서 그래.”

“후웅. 아주머미, 여씨 트리쯔딴 오모니 마꾸나.” (흐음. 아주머니, 역시 트리스탄 어머니 맞구나.)

“엇, 아! 아이참, 아니라니까?”

여인은 공작성에 오는 길 내내 제 아들이 솔로아 소공작과 조금 닮았을 뿐, 트리스탄은 절대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원작의 남자주인공처럼 생긴 인물이 또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 고개를 젓는 여인을 가늘게 뜬 눈으로 흘깃하다 거대한 고목 그림자 안으로 몸을 숨겼다.

“쉬이.”

자신은 이곳에 오면 안 된다고 염불을 외면서도 내 뒤를 졸졸 따라온 여인이 내 신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온다.’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원작 책을 뽀시락 뽀시락 꺼내 든 나는 외전 내용으로 트리스탄의 위치를 확인했다.

* * *

‘오늘은 혼자 정원이나 산책하고 싶군.’

공작성의 후원 안쪽으로 난 오솔길은 트리스탄이 즐겨 찾는 산책로였다.

지금 시기엔 그의 어머니가 좋아하는 페튜니아가 한아름 피어나는데다 들풀 사이사이에 제비꽃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으니까.

여려 보이지만 강한 빛을 품은 연보라색 작은 꽃.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소담한 제비꽃무리를 발견한 트리스탄의 입매에 미소가 고였다.

* * *

산책도 엄마 떠올리면서 하는 거냐고.

‘원래 이렇게 짠내 나는 남주였나.’

나는 갑자기 아이네스를 닮은 수선화에서 제비꽃으로 바뀌어 버린 트리스탄의 취향은 애써 무시하며 이제 막 정원에 들어선 소년을 힐끔했다.

“…트리스탄.”

나와 마찬가지로 소년을 발견한 여인의 목소리가 촉촉히 젖어든다.

“많이 컸네, 우리 아들.”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울망울망해진 그녀의 눈동자에 머쓱한 턱을 긁었다.

‘언제는 아들 아니라며?’

“아주머미, 빤니 나가바오.”

나는 트리스탄에게 달려가고 싶어 몸을 들썩이면서도 자꾸만 내 등 뒤로 숨어 버리는 여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 안 돼. 트리스탄은 날 싫어한단 말이야.”

나는 그녀의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눈썹을 꼼톨 움직였다.

“트리쯔딴이 왜 아주머미 시러해요. 아냐.”

“…나는 천출이야, 아기야. 그러니까 트리스탄이 나를 싫어하는 건 이해할 수 있어. 공작 위에 오르는 데 나같이 천한 출신의 어미를 두면 방해가 될 테니까.”

나는 우물쭈물 꺼내는 여인의 사정에 솔로아 공작이 이 두 모자(母子) 사이에 부린 술수를 눈치챌 수 있었다.

트리스탄에게는 엄마가 외도에 빠져 자식을 버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반대로 그녀에게는 트리스탄이 그녀가 제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해서 싫어한다고 한 모양이다.

‘하여간 누가 로판 남주 아빠 아니랄까 봐.’

쓰레기 같은 자식.

미모에 반해 뒷배 없는 여인을 공작 부인 자리에 앉혔던 건 본인이었으면서, 질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멀쩡한 모자 사이를 이렇게나 갈라놓다니.

“아효. 아주머미, 바부야?”

나는 먼지 한 톨 없이 잘 관리되어 있긴 하지만,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쓸쓸한 분수대에 털썩 주저앉은 트리스탄을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천츌이라구 자기 옴마 시러하눈 애가 어디이써.” (천출이라고 자기 엄마 싫어하는 애가 어디있어.)

어른들은 대개 내리사랑만 있는 줄 아는데, 아이들도 그만큼 제 보호자를 사랑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겐 엄마 아빠가 세상의 전부인걸.’

설사 천출 엄마라도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니니는 천츌이라도 엄마 이써쓰면 조켄는데.” (니니는 천출이라도 엄마 있었으면 좋겠는데.)

천생이 호구라서 가문의 입지를 바로 세우는 데 방해만 되는 아빠라도 돌아왔으면 좋겠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가스파르까지 떠올린 나는 핑 고인 눈물을 손등으로 꾹꾹 눌러 닦아 냈다.

“아, 아기야. 울지 마렴.”

내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몸을 움찔한 여인이 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끌어안는다.

“에고, 울지 마.”

“히잉. 잉!”

그녀가 다정한 손길로 내 등을 쓸어내리며 나를 위로해 주었지만, 나는 부러 크게 울음소리를 내며 트리스탄의 주위를 끌었다.

“뭐지.”

분수대 근처 수풀에서 서성이는 우리를 발견한 듯한 소년이 천천히 걸음을 움직인다.

‘지금이다!’

나는 타이밍에 맞게 호다닥 여인의 품에서 얼른 벗어났지만, 코앞까지 다가왔던 트리스탄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등을 돌렸다.

‘뭐야, 기척에 예민한 기사님 아니었어?’

설마 원작이 트리스탄과 어머니의 만남을 방해라도 하고 있는 걸까.

모자는 마치 막장 드라마처럼 아슬아슬하고 안타깝게 조우하지 못했다.

‘아직은 만날 때가 아니라는 거야?’

나는 내게 대답해 줄 리 없는 원작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다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원작 흐름이야 뭐, 이제 내 알 바인가.’

퉁.

“어맛!!!”

입술을 빼죽 내민 나는 거대한 고목 뒤로 몸을 숨기고 있는 여인을 앞으로 밀어 버렸다.

털썩.

그녀가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정원에 울려 퍼진다.

‘이러면 발견하지 못할 수가 없겠지.’

남주 앞에 잃어버린 어머니를 던져버린 나는 움후후, 사악하게 웃으며 놀라 눈을 홉뜬 트리스탄의 얼굴을 훔쳐봤다.

“…어머니.”

“트, 트리스탄.”

트리스탄의 부름에 당황한 여인이 더듬더듬 입을 연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온 소년은 나뭇잎이 덕지덕지 붙은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엇, 괜찮아! 엄마가 할게!”

그러자 트리스탄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매몰된 여인이 소년의 배려를 거절한다.

‘이 바보!’

나는 허공에 붕 뜬 손을 바라보는 트리스탄의 쓸쓸한 얼굴에 어쩔 수 없이 뽀쨕뽀쨕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안 되겠어.’

이 고구마 모자는 누가 나서 주지 않으면 절대 오해를 풀지 못할 거다.

“레오노라?”

“안넝.”

제 어머니를 조우했을 때보다도 놀란 얼굴의 트리스탄에게 작은 손을 팔랑인 나는 넘어진 여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주머미가 트리쯔딴 보구 시퍼 해서 데려와또요. 아주머미, 트리쯔딴 승개에 방해댈까 바 숨어 이썻서.” (아주머니가 트리스탄 보고 싶어 해서 데려왔어요. 아주머니, 트리스탄 승계에 방해될까 봐 숨어 있었어.)

이 한마디면 오해가 대강 풀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날 보고 싶어 하셨다고?”

내 설명에 트리스탄의 잘생긴 입매가 날카롭게 비틀린다.

“거짓말하지 마라. 내 어머니는 남자에 눈이 멀어 자식까지 버린 분이다.”

피식, 남주다운 바람 빠지는 소리의 웃음소리가 호젓한 정원을 울려 퍼졌다.

‘음. 이젠 아주머니가 나설 때 같은데.’

그럴 타이밍인 것 같아 뒤를 빙글 돌자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 누가 그래?! 각하께서 그러시든?! 엄마는 이제 남자 싫어!!”

‘솔로아 공작에게 단단히 데인 모양이네.’

나는 답지 않게 세차게 인상을 찌푸린 여인의 모습에 크흥, 헛기침을 했다.

“남자는 무슨 놈의 남자! 나는 남자 때문에 공작가를 나간 게 아니야, 트리스탄!”

발작하듯 와락 외친 여인은 소중하게 안고 있던 가방 안을 탈탈 털어 물건을 쏟아 냈다.

“엄마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매일매일 그리운 마음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참고 있었는데-!”

소매치기를 당했던 가방 안에는 온통 트리스탄과 관련된 물건뿐이었다.

배내옷, 그가 아주 어릴 때 쥐었을 법한 작은 목검, 그리고 의자에 얌전히 앉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어린 트리스탄의 초상화까지.

“…트리스탄, 엄마는 너를 버린 적이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 마.”

울컥 목소리를 높였던 여인은 묘하게 일그러진 트리스탄의 얼굴을 바라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했으면 네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 엄마 너무 속상해.”

오해를 받아 억울했던 게 아니라, 트리스탄이 슬펐을까 봐 속상했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아냐,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엄마가 미안해.”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트리스탄을 끌어안는 여인과 그녀의 품에 아이처럼-원래도 아이이긴 했지만- 안기는 남주의 모습을 확인하고 뒤로 물러났다.

“아효, 다행이댜.”

‘엄마도 찾아 줬으니 이제 내게는 관심을 끄겠지.’

말도 안 되는 착각을 단단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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