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잡아!”
에녹과 내가 등을 돌림과 동시에 건달 무리의 두목처럼 보이는 남자가 목소리를 높인다.
“아코!”
에녹의 손을 꼭 붙잡고 골목길을 내달리던 나는 코너에서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리니, 괜찮아?”
넘어진 나를 달랑 들어 올린 에녹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살핀다.
‘괜찮겠냐!’
오러를 쓸 줄 아는 고품격 건달 무리에게 걸린 것이 에녹 탓은 아니겠지만, 나는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듯 여유를 부리는 막내의 작태에 인상을 찡그렸다.
“에노끄, 이딴 내가 시선을 끄 테니까-” (에녹, 일단 내가 시선을 끌 테니까-)
“잠깐만. 내가 조금만 있다가 상처 봐줄게.”
에녹부터 도망치게 하려는 내 말을 짧게 끊어 낸 그가 나를 낮은 담벼락 위에 올려놓고 등을 돌린다.
“에노끄?”
나는 나를 두고 저벅저벅 건달들을 향해 나아가는 에녹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 입을 벌렸다.
‘큰일 났네.’
아직 상대의 힘을 제대로 간파할 능력을 키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히익!”
나는 내가 애써 키운 삼남이 객기를 부리다 큰코다치는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 앙당그레 쥔 주먹으로 두 눈을 가렸다.
퍼억-! 퍽!
다행히 아이를 상대로 검을 쓰진 않는 건지, 맨몸을 구타하는 주먹소리가 고즈넉한 골목에 울려 퍼진다.
‘우리 막내 어떡하면 좋아!’
진짜 막내는 나였지만, 내 마음속 막내는 에녹이었다.
그런 그를 걱정하느라 끙끙 앓던 나는 소리가 잦아들 즈음 슬그머니 눈을 떴다.
“……!”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에, 에노끄? 이긴 고야?!”
오러 쓰는 성인 건달 여섯 명을 상대로?!!
나는 주먹을 설레설레 흔들며 다시 내 쪽으로 걸어오는 삼남을 향해 황망한 턱을 벌렸다.
“오또케?!”
“뭐? 당연하잖아. 애들 코 묻은 돈이나 뜯는 허섭스레기들인데.”
놀라는 내가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 에녹이 잘생긴 눈썹을 스윽 추켜세운 채 고개를 기울인다.
“뭐야, 리니. 나 무시하는 거야?”
내 콧잔등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씨익 웃는 에녹의 뺨에는 붉은 피가 살벌하게 튀어 있었다.
‘이 자식, 완전 각성했잖아!’
나는 잘 키운 삼남 하나가 여섯 건달 안 부럽다는 생각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 맛에 애 키우나 보다.
완전 짜릿해.
* * *
“후아, 배부르다.”
“우웅. 엄쩡 배분너.” (으응. 엄청 배불러.)
길거리 음식도 실컷 먹은 데다 에녹의 실력은 내 예상보다 더 일취월장해 있었다.
‘몸과 마음이 아주 든든하구먼.’
나는 볼록 튀어나온 배를 통통 두드리며 방긋 웃었다.
‘마음 곳간에 여유가 흘러 넘친다고.’
조무래기 악당을 벗어나 더 큰 스케일의 악당 포지션을 노리는 나라지만, 오늘은 곤란에 처한 행인1 정도는 도와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도, 도와주세요!”
음,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 거지 꼭 도와주고 싶은 건 아니니까.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말자.’
그런 건 여자 주인공이나 하는 거다.
귓등에 내리꽂히는 누군가의 외침을 슬그머니 한 귀로 흘려들은 나는 서둘러 호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아무나 제발 도와주세요!!!”
“아효….”
이름 모를 아주머니, 당신은 구조 요청의 기본을 모르세요.
‘원래 도와달라고 할 때는 대상을 콕 집어서 말해야 도와줄 확률이 높아지는데.’
그냥 도와달라고만 하면 양심의 가책이 안 느껴져서 나서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내 생각대로 대로변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그녀에게 다가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지, 리니?”
그러자 엑스트라 악당 가문의 삼남인 주제에 양심이 살아 있는 에녹이 내 소매를 붙잡고 둥그렇게 눈을 뜬다.
“아빠가 곤란에 처한 영지민을 보면 꼭 도우라고 하셨어.”
‘가스파르도 참, 애들한테 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그러니까 엑스트라 신세를 못 벗어나는 거라고.
나는 내 소매를 붙잡은 에녹의 손을 휙 뿌리치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요기 우리 영지 아냐, 에노끄.”
게다가 도움을 요청하는 상대가 어른이질 않았나.
원래 애들은 어른들 일에 끼어드는 거 아니었다.
“그건 그렇지만….”
건달들 몇 명 쥐어 패 준 걸로 영웅 심리에라도 젖었는지 에녹이 말끝을 흐리며 앓는 소리를 낸다.
“아효, 아라써. 가 보자.”
이놈의 하차니아병.
아직 소년이긴 했지만 에녹은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였고 나는 슈퍼 울트라 강한 빙의자 아기니까 어쩔 수 없지.
“고마워, 리니!”
내 허락에 활짝 웃은 에녹은 애처로운 얼굴로 이미 거리가 꽤 벌어진 소매치기를 손가락질하는 여자에게 다가섰다.
“아주머니, 저 남자를 잡아 오면 되는 걸까요?”
“앗, 으응! 하지만 네가 도와줄 필요는 없단다. 괜히 너까지 위험해져.”
나는 어눌한 어투로 에녹의 도움을 거절하는 여자의 말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에녹을 걱정해 주는 걸 보니까 나쁜 사람은 아닌가 보네.’
줄무늬 패턴 두건으로 새빨간 머리칼을 감추고 있는 여자는 이름 없는 조연치곤 굉장한 미녀였다.
“져 남자가 멀 훔쳐 간는데요?”
“응? 아아, 내 가방.”
나는 이제 막 코너를 도는 남자가 휘두르고 있는 가죽 가방을 가리키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쪼고? 돈이 마니 드러이써요?”
“아니, 돈은 없어. 그렇지만 내 아들의 하나뿐인 초상화가 들어 있단다.”
내 질문에 더듬더듬 대답한 여자의 고운 눈가에 눈물이 핑 고인다.
“이, 이제는 만날 수가 없어서…. 나는 내 아들을 그림으로만 봐야 하거든.”
“…덴당.”
나는 여자의 울망울망한 시선에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초상화라고? 그것도 이제는 다시 만날 수가 없어?
아들이 먼저 죽기라도 한 거냐고.
‘이러면 또 안 도와줄 수가 없잖아!’
“에노끄. 소매치기 자바 와.” (에녹. 소매치기 잡아 와.)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나는 소매치기가 사라진 코너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응!”
내 명령에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달려 나간 에녹은 금방 소매치기를 잡아 와 우리 앞에 집어던졌다.
“자, 리니! 잡아왔어!”
“잘해떠, 에노끄.”
내 칭찬에 보이지 않는 꼬리를 강아지처럼 팔딱인 에녹이 싱글벙글 웃으며 오러가 몸에 칭칭 감긴 남자를 발로 밟는다.
“훔쳐 간 가방 내놔.”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알고!”
에녹의 발에 밟힌 남자는 지렁이처럼 꿈틀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놓아라!!!”
“네가 누군지는 내 알 바 아니고, 뒈지기 싫으면 가방이나 내놔.”
나는 남자의 윽박을 완전히 묵살하며 등이나 꾹꾹 즈려밟는 에녹이 기특해 물개박수를 쳤다.
‘아이고, 우리 막내. 이제 협박도 잘하네!’
싹이 아주 훌륭하다.
“어머나! 어린애가 힘이 대단하네.”
여인의 눈에도 에녹의 싹이 아주 누래 보였는지, 가방을 돌려받은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칭찬한다.
“우리 아들도 힘이 아주 장사인데! 너도 소울나이츠구나?”
“아, 네! 맞아요, 아주머니.”
“얼굴도 우리 아들처럼 아주 잘생겼어!”
“감사합니다.”
나이는 가스파르와 비슷해 보였지만 어딘지 소녀다운 면모가 있는 여인은 언제 눈물을 보였냐는 듯 까르르 발랄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신사다운 것도 우리 아들이랑 비슷하네!”
이제는 에녹을 칭찬하는 건지 제 아들을 자랑하는 건지 모를 말이 이어졌다.
“우리 아들도 너처럼 힘도 세고 잘생긴데다 예의가 발라서 인기가 아주 많거든.”
음?
나는 순간적으로 태양 빛이 스며들어 샛노랗게 빛나는 그녀의 금안에 묘한 기시감이 들어 눈살을 찌푸렸다.
‘적발에 금안….’
어디서 많이 본 조합인데.
“아주머미.” (아주머니.)
“응?”
“아둘냄 얼굴 쫌 보여 주세오.” (아들내미 얼굴 좀 보여 주세요.)
공손히 내민 내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인이 부끄럽다는 듯 호호 웃으며 가방을 뒤적인다.
“그래! 얼마나 잘생겼는지 궁금한 거구나?”
나는 팔불출 여인의 말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꺼내 든 초상화를 잡아챘다.
“…….”
초상화의 주인공은 그녀의 주장대로 정말 잘생기긴 했다. 오히려 너무 잘생겨서 문제였다.
그러니까 주인공스럽게 잘생겨서.
“우리 아들이야. 너무 잘생겨서 넋이 나갔나보네.”
호호홍.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고운 여인의 웃음소리가 얼이 빠진 내 뺨을 찰싹찰싹 때린다.
‘도대체 왜 원작 남주의 엄마가 시장 한복판에서 소매치기 따위를 당하고 사는 거야!’
아무리 쫓겨났다지만 명색이 전 공작 부인 아니었냐고.
나는 예고도 없이 내 앞에 뚝 떨어진 트리스탄의 어머니를 힐끔하며 고뇌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주 엄마 찾아 주는 일은 아이네스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귀찮단 말이다. 어차피 아이네스가 찾아 줄 테고.
게다가 트리스탄의 냉정한 성격이면 지금쯤 공작가에서 내쫓긴 엄마 따위 전부 잊지 않았을까.
살짝 머리가 아파진 나는 고민하다 에녹 몰래 트리스탄 외전을 펼쳐 들었고,
* * *
◈
‘엄마 보고 싶다.’
쓸쓸하고 외로운 솔로아와 달리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던 하차니아의 공작 성을 떠올린 트리스탄은 베개에 남은 눈물의 흔적을 손으로 꾹 눌러 가렸다.
“괜찮아.”
그는 이제 엄마가 그립지 않았다. 전혀 보고싶지 않았다. 괜찮았다.
아니, 사실은….
“괜찮아, 트리스탄.”
◈
* * *
“띠바….”
‘전혀 괜찮지 않잖아, 이 자식아!!!’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책을 덮었다.
“아주머미. 니니랑 어디 좀 가오.”
어쩔 수 없이 원작 남주 어머니의 손목을 붙든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다려, 트리스탄.’
엄마 배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