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55화 (55/486)

제55화

전설의 거상 자르파라.

그녀는 거래 성사를 위해서라면 금지된 사막을 횡단하는 것도 서슴지 않고, 최대이익을 내던 약초 사업을 위해서 웬만한 소울나이츠들도 들어가길 꺼려 한다는 죽음의 숲까지 정복한 위대한 상인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몸집을 지닌 자르사워 용병단까지 이끌던 그녀는 내가 태어나기 몇 년 전 갑작스레 모든 사업을 접고 자취를 감췄다고 들었다.

‘자르파라는 제국을 대표하는 사계절의 검에 준하는 실력자였으니 히스가 그녀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겠지.’

아무리 아크레아의 소년왕이었다지만 그에게는 정보를 물어다 줄 수족이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걸로 당분간 얘 정신을 빼놓을 수 있을 거야.’

쉬라고 해도 쉬질 못하니 일을 시켜주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자르파라 상인을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나는 단정한 고개를 끄덕이고 멀어지는 히스의 작은 등을 바라보다 아효, 한숨을 내쉬었다.

* * *

하차니아는 제국의 북부에 속한 영지였지만, 햇살만큼은 제법 따사한 지역이었다.

나는 작열하는 태양빛을 가려 주는 가제보에 앉아 여린 잎으로 만든 차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녀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가르덴의 안색은 퍽 어두웠다.

나는 디너 파티 때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수척해 보이는 가르덴의 얼굴을 흘깃하며 천천히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니니가 백잔니에게 하구 시픈 말, 대충 알 거라구 생각해오.”

가르덴 백작은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백잔니, 프라찌 나뿐 사라미야.”

내가 넌지시 띄운 운에 그가 한숨처럼 입을 연다.

“…사실 디너 파티 전부터 조금씩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저를 이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걸요.”

어른들은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속 얘기를 가끔 아이에게는 스스럼없이 털어놓곤 했다.

“공녀님, 요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건 아시지요? 행운의 요정 니켈리아는 가르덴 백작가가 수호하는 얼음 산맥에 사는 요정입니다.”

동화 같은 설화를 시작으로 가르덴 백작은 백작가의 위신과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쉽사리 상담하지도 못했을 제 사연을 내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소년이었을 때까지만 해도 니켈리아가 마을까지 내려와 행운을 흩뿌리고 가곤 했습니다. 니켈리아의 씨가 마른 건-”

목이 타는 듯 제 앞에 놓인 차를 벌컥 들이마신 가르덴이 울적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날부터입니다. 제가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첫 행운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소금을 찍어 먹은 날 말입니다.”

“그날부터 백잔니, 백잔니 탓을 하구 살아온 거에오?”

나는 나이가 지긋한 백작의 뒤로 투영되는 어린 소년을 바라보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저뿐만 아니라 온 영지민들이 저를 탓했지요. 오죽하면 제가 백작위에 오르기 전까지 다들 저를 불운의 가르덴으로 불렀겠습니까.”

“몬덴 사람들이녜.” (못된 사람들이네.)

내가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테이블을 내려치자, 가르덴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북부의 영지 내에서 오직 가르덴만이 끔찍한 가뭄을 되풀이했으니까요.”

“그치만 그건 백잔니의 잘모시-”

“아니지요. 압니다만, 저는 저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르덴의 의연한 태도에 괜히 내가 다 억울해진다. 입술을 꾹 깨문 나를 빤히 바라보던 가르덴이 눈물이 고인 눈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수그린다.

“그러던 어느 날, 프라치 자작이 가르덴 영지를 찾아왔습니다. 가르덴이 섬기는 행운의 요정을 쏙 빼닮은 그가 말입니다.”

‘프라치가 행운의 요정을 빼닮았다고?’

요정으로 오해 받으려면 적어도 벨루치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나는 순박한 프라치의 얼굴을 떠올리며 순간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프라치는 니켈리아 그 자체인 것 같았습니다. 그가 저와 친분을 쌓고 저택에 머물기 시작한 날부터 제가 늘 행운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가르덴의 설명에 신음을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불운이 사라지고 제 능력을 발휘하게 된 저는 가르덴의 가뭄을 해결하고 원로회의 수장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그를 믿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한숨을 꾹꾹 누르던 나는 가르덴이 덧붙인 말에 더는 참지 못하고 노호를 터뜨렸다.

“백잔니, 바부야?!”

“……네?”

손바닥을 쫙 펴 테이블을 탕탕 내려친 나는 당황한 얼굴의 가르덴을 새초롬히 노려보다 고개를 저었다.

“프라치 때무니 아냐. 백잔니가 언래 또또칸 사람이라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고자나!”

그가 프라치를 만난 후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건 단순히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리라.

“행운을 쟁치한 건 프라치가 아니라 백잔니에요.” (행운을 쟁취한 건 프라치가 아니라 백작님이에요.)

내 말에 가르덴은 입술만 달싹일 뿐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백잔니, 프라치가 ‘행운의 시험’ 속이구 잇엇서. 눈치채짜나요.”

내가 하루 만에 파악한 전말을 가르덴이 모를 리 없었다.

‘단지 부정하고 싶을 뿐이겠지.’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이 믿는 행운의 요정 니켈리아를 잃고 말 테니까.

“하지만 공녀님, 희망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 아십니까.”

나는 가늘게 떨리는 가르덴의 목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니켈리아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면, 저는 더는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의 갈색 눈이 촉촉하게 젖어든다.

겁쟁이, 비겁자, 도망자.

가르덴을 호통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 끝까지 치달았지만, 그의 곁에 그림자처럼 매달려 있는 어린 가르덴의 인영이 괜히 마음을 쿡쿡 쑤신다.

‘나는 왜 이렇게 아이들이 받은 상처에 약한 걸까.’

그러니 괜히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닌가.

아이답지 않게 한숨을 포옥 내쉰 나는 찻잔을 채 비우지도 않은 가르덴의 손을 쑤욱 잡아끌고 별채와 이어진 숲속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엉니 만나러.”

“…니켈리아와 닮은 그 숙녀 말입니까?”

나는 떨떠름한 가르덴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위해 밤새 준비한 ‘무대’를 가리켰다.

“니케 엉니, 니켈랴 달믄거 아니에오.”

햇빛을 받아 화사하게 빛나는 상아 분수에 앉아있던 벨루치가 내 신호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말인즉슨…?”

나는 잘게 떨리는 가르덴의 목소리에 폴짝폴짝 허공을 뛰어다니는 벨루치를 가리켰다.

“세상에.”

가르덴은 요정처럼 나뭇잎을 기워 만든 옷을 입은 채 하늘을 날아다니는 벨루치의 모습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니켈리아 님!”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무릎까지 털썩 꿇은 가르덴에게 나붓나붓한 걸음으로 다가온 벨루치가 생긋 웃는다.

“오랜만이야, 유진.”

유진, 아빠의 부관인 헨리에게 무려 레몬 사탕 30알을 쥐여 주고 알아낸 가르덴 백작의 아명이었다.

“저, 저를 기억해 주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나는 가르덴의 모든 소년을 기억하는걸.”

‘우리 벨루치, 연기 정말 잘하네.’

나는 전생의 삶에서 즐겨 봤던 미드를 떠올리며 룰루와 랄라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요정 날개를 단 벨루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하녀로 쓸 게 아니라 오페라 데뷔를 시키는 게 나으려나.’

벨루치의 천부적인 재능이라면 단박에 사교계의 스타로 떠오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유진, 우리 니켈리아들은 더는 가르덴을 찾을 수 없게 됐어.”

“어째서입니까! 역시, 역시 제가 후계자로서의 첫 행운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행운의 시험, 우리들이 만들어 낸 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

물론 모른다.

벨루치가 지금 치는 대사는 전부 내가 지어낸 순 거짓말이었지만, 가르덴은 충격을 받은 듯 떨리는 동공으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니켈리아 님께서 저희 가르덴 가문에만 알려 준 행운의 비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우린 인간에게 행운만 가져오는 요정이 아니야. 우린 분명 가르덴 일족에게 불운을 이겨 낼 힘도 줬어.”

벨루치는 제 앞에 무릎 꿇은 노쇠한 백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신비감을 자아내는 날개를 팔랑였다.

“유진, 넌 우리 없이도 가르덴을 이끌 수 있을 거야.”

“그럼 프라치는 정말 니켈리아 족이 아니었던 겁니까?”

“…유진, 널 슬프게 만들고 싶진 않지만 그가 나를 제외한 니켈리아의 날개를 전부 뜯어 버렸어. 그게 우리가 가르덴을 더는 찾아갈 수 없는 이유야.”

벨루치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하는 가르덴에게 친절히 프라치가 요정의 날개를 숨긴 장소까지 알려 주었다.

“그럼 안녕, 유진.”

팔랑팔랑.

마지막 대사까지 완벽하게 소화해 낸 벨루치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

나는 그녀가 저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땀을 흘리면서까지 쥐고 있던 마나 강화석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후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벨루치가 가르덴의 앞에서 명연기를 펼치는 동안 공기의 흐름을 마나로 조절해 바람을 연출했던 나는 겨우 몸의 긴장을 풀었다.

뿌우.

그러자 조그마한 방귀 소리가 조용한 숲속을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못 들었겠지.

“풉.”

분명 아무도 못 들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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