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53화 (53/486)

제53화

“엉니! 여기썬네!”

가르덴 백작과 벨루치의 대화가 무르익을 시점에 적절히 모습을 드러낸 나는 활짝 웃으며 벨루치의 다리를 답싹 껴안았다.

“어, 어머.”

여태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짜 놓은 각본을 잘 따라가던 벨루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힌다.

‘이럼 안 되는데.’

나는 벨루치가 행여나 실수할까 두려워 가르덴 백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잔니?”

“음? 레오노라 공녀님이 아니십니까.”

다행히 나를 바로 알아본 가르덴 백작이 내 쪽으로 허리를 숙인다.

“공녀님께서 경마장에는 어언 일로 방문하셨는지요.”

“엉니 따라와써.”

“언니라면 이 금발 숙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웅! 니케 엉니 니니 칭구야~! 숲에서 만나떠요!”

백작의 물음에 천진하게 대답한 나는 곧 실수했다는 양 눈에 띄게 놀라며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렸다.

“미, 미아내! 엉니가 니케라구 부르지 말랬눈데!”

내가 작은 발을 동동 구르며 당황하자 백작의 얼굴이 묘한 긴장으로 굳는다.

“니케라면, 니켈리아의 니케 말입니까?”

“아냐, 아녜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으로 받아들여지는 법.

나는 필사적으로 벨루치의 정체가 요정 니켈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필하며 양팔로 엑스자를 만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벨루치의 눈치만 슬금슬금 보는 나를 살핀 가르덴 백작이 느릿느릿 말문을 연다.

“공녀님, 혹시 오늘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일행분과 함께 저희 집에 놀러 오시는 건 어떠신지요.”

‘오케이! 걸려들었어.’

나는 백작의 초대를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쾌재를 불러 댔다.

* * *

“우와아. 백잔니 집 너무 예뽀!”

아이인 척하려는 게 아니라 가르덴 백작저는 정말 순수한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답게 꾸며진 고택이었다.

‘정말 요정이 살 것 같은 곳이잖아?’

새하얀 상아 분수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흰 드레스를 차려입은 벨루치와 그린 듯이 어울리는 광경을 힐끔하며 턱을 벌렸다.

“누추한 곳이라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싱긋 올라간 백작의 입가에는 은은한 뿌듯함이 맴돈다.

“오늘은 마침 제 친우인 프라치 자작과 작은 디너 파티를 열 계획이었는데 공녀님을 초대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지요.”

‘프라치? 하차니아의 봉신 가문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나는 가르덴의 입에서 튀어나온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다 벨루치의 손을 잡고 오도도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왔어요?”

현관에 들어서자 가르덴을 기다린 듯 금발의 남자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온다.

“디너파티의 초대객을 데려왔네.”

가르덴이 누군가를 데리고 돌아올 줄 몰랐다는 듯 초록색의 둥근 눈을 커다랗게 뜬 그는 순하고 푸근한 인상이었다.

“레오노라 공녀님과 공녀님의 친우분이시네. 자네는 정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니 처음 뵙겠지.”

“아! 론 프라치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님.”

가르덴의 소개에 남자가 황급히 허리를 숙인다. 나는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니니에요.”

“듣던 대로 정말 귀여운 아기님이네요. 자, 그럼 다이닝룸으로 가실까요.”

사람 좋게 웃은 남자가 나와 벨루치를 이끌고 저택을 안내하기 시작한다.

‘저건 니켈리아의 초상화인가?’

나는 계단 중앙 벽에 걸린 거대한 그림을 힐끔했다.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찬란한 금발, 벨루치의 것처럼 여름 녹음을 담은 듯 새파란 녹안의 소녀는 분명 책 속에 등장하는 행운의 요정 니켈리아의 묘사와 흡사했다.

‘초상화만 있는 게 아니잖아.’

조각상, 벽장식, 심지어 천장의 샹들리에까지 니켈리아의 상징인 뿔 모양이었다.

나는 저택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요정 니켈리아의 흔적에 가르덴 백작이 헨리가 설명한 것 이상의 니켈리아 진성 덕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대체 무엇이 유서 깊은 백작가의 가주이자 원로회의 수장이기까지 한 가르덴 백작이 행운에 의지하게 만든 걸까.

나는 마치 요정 니켈리아의 성전처럼 꾸며진 저택 내부의 모습에 침을 꼴깍 삼키며 백작과 남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공녀님 옆에 계신 숙녀님의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백작과 함께 벨루치와 나를 다이닝룸으로 안내한 프라치 자작이 상냥하게 묻는다.

벨루치는 나와 입을 맞춘 대로 대답을 머뭇거리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니, 아니, 리케입니다.”

“아하. 제가 준비한 음식은 입에 맞으시고요?”

“네. 너무 맛있어요.”

요정은 육식을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미리 숙지한 벨루치가 야채와 과일만 쏙쏙 골라 먹는 것을 주시하던 가르덴이 확신을 담아 눈을 빛낸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아, 네! 과일을 좋아해요.”

“오호! 네,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오물오물 과일을 씹어 삼키며 대답하는 벨루치의 모습에 가르덴이 감격스럽다는 듯 가슴을 움켜잡더니 프라치 자작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뭐라고 숙덕이는 거지?’

마나를 운용해 청각을 강화할까 싶었지만, 나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는 프라치의 행동에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만 냠냠 씹어 삼켰다.

“리케 님은 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 보네요. 제가 주방에 직접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아닙니다. 손님을 초대했으면 제대로 대접해 드려야죠.”

벨루치의 만류에도 한쪽 눈을 찡긋한 프라치가 서둘러 다이닝룸을 벗어난다.

황급히 움직이는 그의 걸음걸이에서 초조함을 읽어 낸 나는 눈을 가늘였다.

‘니켈리아의 등장에 요정 덕후인 백작이 황홀해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의 친구라는 프라치는 어째서 초조해 보이는 걸까.

“백작님, 오늘 치르실 ‘행운의 시험’을 대령하겠습니다.”

내가 스테이크를 반쯤 먹어 치울 무렵, 집사가 가르덴에게 다가와 은쟁반을 들이민다.

“벌써? 손님들이 아직 식사를 마치지도 않으셨는데.”

“예. 프라치 님이 서두르라고 명하셔서.”

가르덴 백작은 곤란하다는 듯 나와 벨루치를 힐끗한 뒤 제 앞에 놓인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별수 없군.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행운이 따를 테지.”

가르덴은 자신 있다는 듯 씨익 웃으며 벨루치와 쟁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게 모에오?”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내가 묻자, 가르덴이 회의 때는 절대 볼 수 없었던 호방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오랜 세월 동안 행운의 요정 니켈리아를 섬겼던 가르덴 백작가에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저희는 늘 저녁 만찬 때 이 ‘행운의 시험’을 치르지요.”

나는 가르덴이 내민 은쟁반에 미세하게 흩뿌려진 두 개의 가루뭉치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시험이에오?”

“네. 저희 가문의 사람들은 이 하얀 가루 중에 찍어 먹은 것이 설탕이면 다음날 행운이 따르고, 소금이면 불운이 따른다고 믿습니다.”

“백잔니두 믿어오?”

“미신을 믿는 늙은이 취급을 하시는 게지요. 하지만 행운의 시험 효력은 실재합니다. 저는 소금을 찍어 먹은 날에 늘 크고 작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프라치를 곁에 둔 이후로 소금을 찍는 날이 크게 줄었지만.

나는 가르덴 백작이 들릴 듯 말 듯 덧붙인 말에 흐음, 콧방귀를 뀌며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요정과 마법이 실재하는 세계라지만, 저딴 미신이 진짜일 리 없어.’

효력이 있었다면 원작에 등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벨루치의 등장에 프라치가 유독 초조해 보였던 이유를 대강 알 것도 같아서 가느스름히 눈을 뜬 채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니니, 쉬야.”

“제가 같이 갈까요?”

“시러. 찬피해요.”

나는 나를 따라 나오려는 벨루치를 만류하고 홀로 다이닝룸을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복도에 숨어들었다.

‘조무래기 악당들은 멍청해서 위기가 닥치면 바로 제 약점을 내보인단 말이지.’

제 눈에 재 뿌리는 말이었지만, 엑스트라의 한계란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봐.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실수를 해 버렸잖아.’

어둠이 드리워진 기다란 복도를 느긋하게 거닐던 나는 멀리서 새어나오는 가느다란 빛줄기를 발견하고 조용히 다가갔다.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인영은 예상한 대로 프라치였다.

“…아홉, 열, 열하나.”

들려오는 말은 전부 내 예상 밖이었지만.

“젠장! 날개는 분명 열한 개가 맞는데 저년은 도대체 뭐지?!”

날개? 누구의 날개를 열한 개나 모았다는 걸까.

나는 문에서 등을 돌린 채 상자를 끌어안은 프라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썹을 꼼톨 움직였다.

‘……설마.’

“행운의 요정이란 요정은 전부 잡아 죽였는데 어째서!”

열하나.

‘한 종류의 요정은 열한 마리까지만 존재할 수 있다고 했지.’

요정은 번식을 하지 않는 대신 영생을 살았지만, 소멸하기는 했다.

나는 프라치의 손안에서 번들거리며 빛나는 날개의 모습에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설마 요정들을 전부 잡아 죽인 거야?’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세계에서 가장 순수한 존재들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제 막 백작가가 내 손에 넘어올 참에 왜 저년이 갑자기 나타난 거냐고!!”

나는 방안에서 억울함 섞인 노호를 터뜨리는 프라치의 목소리에 까드득 볼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저놈은 또 어떻게 조진담.’

하차니아병이 돋고 말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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