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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51화 (51/486)

제51화

“각하, 황제 폐하의 급서가 전달되었습니다.”

루카스, 그러니까 가스파르를 찾아 침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아빠의 부관인 헨리 마사드였다.

“아가씨,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루카스에게 황실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내민 헨리가 상냥하게 웃으며 내 얼굴을 살핀다.

“가주님을 걱정하느라 날밤을 지새우셨다고 들었는데.”

“우웅. 갠차나, 헨니.”

사탕 몇 알 쥐여 줬다고 내게 홀랑 빠져 버린 헨리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인 나는 루카스의 손에 쥐여진 서신을 힐끔했다.

‘양반은 못 되겠어, 그레고르.’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급서까지 보낸 걸까.

“몬 내용이에오?”

퉁퉁 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빼꼼 내미는 내 머리를 쓰다듬은 루카스가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인다.

“…독촉장이군.”

“도쵸짱?”

“그래. 황명을 거부한 대가로 공작가 소유 사유지 오천 에르크와 삼십만 골드를 징수하겠다는 내용이다.”

나는 빚쟁이처럼 돈돈거리는 그레고르의 편지를 뜯어보며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루카스의 핏줄일 수도 있는 나를 싸고 도는 아빠가 그레고르에게 단단히 밉보이긴 했겠지.’

황명을 거부하는 건 반역 의사로도 볼 수 있었으니 벌금형이 떨어진 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 액수가 문제였다.

‘오천 에르크에 삼십만 골드?’

하차니아 공작가 영지 삼분지 일과 공작가 내정의 1년 예산 절반을 뚝 떼어 달라는 말이었다.

‘벌금치고 너무 과하잖아!’

그레고르가 돈을 요구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정도 액수인 줄은 몰랐다.

“아가씨-!”

내가 무려 황제의 서신을 와그작 구긴 다음 땅바닥에 내던지자 화들짝 놀란 헨리가 황급히 허리를 숙인다.

“벌써부터 공작가를 위해 이렇게 열을 내시다니, 이 헨리 마사드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서신을 집어 들 줄 알았는데, 헨리는 황실의 인장이 찍힌 봉투를 꾹꾹 즈려 밟은 후 내게 달려와 나를 안아들었다.

“아이고, 우리 아가씨는 어쩜 마음씨도 비단결이시고 얼굴도 고우신데다 똘똘하기까지 하십니까. 게다가 효녀이시기까지~!”

둥가둥가.

나는 나를 어화둥둥 어르는 헨리의 품에 안겨 고개를 갸웃했다.

‘효녀? 웬 효녀?’

* * *

루카스를 따라 대회의장에 들어선 나는 헨리의 말뜻을 알게 되었다.

“막내 아가씨가 오셨네요. 오늘도 역시나 귀엽고 사랑스러우세요.”

루카스의 손을 잡고 뽀짝뽀짝 원탁으로 다가선 나는 나를 향해 쏟아지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가주님의 건강을 위해 저 어리고 작은 몸으로 밤낮을 지새우며 신께 기도를 올리셨다죠?”

“가주님은 공녀님이 사생아라는 소문을 믿고 별채로 보내 버리기까지 하셨는데 말이에요! 착하기도 하시지.”

‘다들 내가 효녀 심청이라도 되는 줄 알잖아.’

내가 사생아라는 소문을 철석같이 믿고 나를 내쫓으려던 적도 있으면서, 원로들은 하나같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레이디 아르델이 앓던 병의 치료법을 발견한 사람이 아가씨라면서요.”

“물론 우연히 에녹 도련님의 오러석을 들고 계신 거였겠지만, 신의 은혜가 뒤따르는 분이 아니고서야 그런 기막힌 행운이 찾아올 리 있겠습니까?”

“공작가의 복덩어리나 다름없죠. 게다가 두 가지 속성의 오러를 사용하실 수 있는 권능자 중의 권능자 아니십니까.”

원로들의 주접에 왜들 저러나 눈썹을 꼼톨거리던 나는 론도 자작의 뒷말에 아하,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저번 정례 회의 때 허풍을 조금 떨어 놓긴 했지.’

사계절의 모든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소울마스터는 유니콘 같은 존재였고, 만약 하차니아에서 소울마스터를 배출해 낼 수만 있다면 공작가는 유례에 없던 입지를 세우는 게 가능할 터였다.

‘어떻게든 콩고물 얻어먹으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나는 남몰래 혀를 쯔쯔 차며 누가 정말로 공작가를 위해 일하는 봉신인지 살피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각하, 원로들은 무슨 일로 소집하셨습니까?”

주둥이를 벌린 검은 늑대가 인각된 새까만 보좌에 루카스가 안착하자 원로원의 수장인 가르덴 백작이 가장 먼저 입을 연다.

“…….”

루카스는 그의 질문에 대꾸하는 대신 옆에 선 나를 달랑 안아 들어 제 무릎에 앉혔다.

“각하?”

“뭐.”

“저희들을 왜 부르셨느냐고 여쭤봤습니다만.”

“아.”

가르덴 백작의 말에 시큰둥하게 대꾸한 루카스가 나를 내려다 본다.

‘원로들을 모아 달라고 한 게 나였지, 참.’

나는 일제히 내게 쏟아지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수그린 채 루카스와의 ‘공명’을 시도했다.

[루카스.]

[제대로 된 마법도 배운 적 없으면서 공명을 사용할 줄 아는 건가.]

공명뿐이랴, 원작에 대한 기억을 탈탈 헤집은 나는 이미 마나를 이용한 언령까지 사용할 줄 알았다.

‘방법을 터득하는 게 어려운 거지, 요령만 알면 마나가 많이 쓰이지도 않으니까.’

나는 놀란 듯 눈을 홉뜨는 루카스를 힐끔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원로들에게 내가 아르델 백작에게 받은 돈과 공작가 재산을 털어서 투자를 할 생각이라고 말해 줘.]

남은 하차니아의 재산이래 봤자 정말 하찮기 그지없었지만, 공식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은 거기까지였다.

‘브리넨 후작에게서 뜯어낸 돈은 비자금이나 마찬가지니까.’

공명으로 내 뜻을 읽은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을 바라보는 원로들을 향해 천천히 내 의사를 자신의 것인 양 전달했다.

“투자? 갑자기 무슨 투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님의 함선이 가라앉은 탓에 난 손실을 메꾸느라 이미 올해 예산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각하.”

그러자 원로들이 제각기 걱정스러운 얼굴로 의견을 내놓았지만, 루카스는 원로들의 침음성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무시하고 다시금 나를 돌아보았다.

[황실 소유의 섬 몇 개를 사야 해. 그렌섬, 나리아섬, 그리고 히노텐섬이야.”]

“섬을 사겠다. 그렌섬, 나리아섬, 그리고 히노텐섬을.”

“…예?”

루카스의 말에 가르덴 백작을 중심으로 한 원로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가라앉기 일보직전의 섬들 아닙니까? 줘도 안 가질 섬들이지만 황실 소유라는 이유만으로 땅값만 비싼!”

“그래.”

명색이 황태자였던지라 내가 말하는 섬들을 모르지 않는지 루카스가 대강 고개를 끄덕인다.

“안 됩니다!”

나는 루카스의 말에 대놓고 반발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원로들의 모습에 주먹 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움후후 웃었다.

‘지금 루카스가 자신들이 아는 가스파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건방지게 반대를 하는 거겠지.’

하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었다.

“안 된다고?”

지금 가주 자리에 앉은 사람은 가신 한 명 한 명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는 가스파르가 아닌, 황자로 태어나 황태자 자리까지 거머쥔 루카스였다.

‘그리고 윌레닌 황족들은 하나같이 성질머리가 거지같지.’

콰지직-!

원로들은 원탁 위를 지지듯 스쳐 지나가는 샛노란 스파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각하!!! 지금 저희를 오러로 공격하신-!”

“다음 회의까지 내가 말한 섬들을 사 놓도록. 사 놓지 않으면 원로회를 해산시키겠다.”

“예?!”

원로들은 청천벽력 같은 루카스의 말에 기겁하며 턱을 벌렸다.

‘아니, 그런 말까지는 안 시켰는데!’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주의 권한으로 밀고 나가라는 말을 해 놓긴 했지만, 원로회를 붕괴시키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깜짝 놀란 나는 단단히 기분이 상한 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운 루카스의 얼굴을 발견하고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원로들이 제 말에 반발했다고 기분 상했네, 이 자식.’

“…아반니.”

원로들을 살살 달래 그들의 돈까지 투자받아 섬을 살 계획이었던 나는 루카스의 소맷부리를 붙잡고 자그마한 입을 움직였다.

“그럼 니니 이졔 언노 아자씨, 할부지들 못 바요?” (그럼 리니 이제 원로 아저씨 할아버지들 못 봐요?)

내가 울망울망한 눈으로 입술을 꾹 깨물자 크게 당황한 루카스가 나를 천장 높이 안아든다.

“니니, 언노 아자씨 할부지들 엄쩡엄쩡 조아하눈데….”

내 고백에 원로들이 심장께를 부여잡으며 커헉, 거친 호흡을 토해 낸다.

“못 보게 대면 넘넘 슬플 꺼 가튼데….”

툭 치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똑 떨어뜨릴 것만 같은 내 눈을 마주한 루카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아반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을 선호하는 루카스를 향해 나는 두 손을 맞잡고 호소했다.

“웅?”

“…해산은 취소. 어쨌든 다들 감히 가주에게 반기를 든 대가를 각오하도록.”

아효효.

나는 철없는 청년 황태자와 내 아부에 울컥한 듯 눈물을 글썽이는 수염 숭숭한 원로들 사이에서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 내가 늙는다니까.’

어쨌든, 이제 그레고르 황제에게 반격을 할 차례였다.

‘바로 원작 여주이자 그의 딸인 아이네스가 발견했던 노다지섬들을 이용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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