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산책이라도 다녀오고 싶군.”
그레고르 황제에게 최근 북부 산맥 근처에서 벌어졌던 토벌전에 대한 보고를 마친 가스파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른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같이 가겠습니다.”
그를 보좌하기 위해 황도까지 따라온 헨리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제 주군을 살핀다.
“아니, 혼자 가겠다.”
가스파르는 끝끝내 헨리의 동행을 거부하며 황성 내에서도 가장 한적한 산책로에 들어섰다.
‘폐태자궁이 이쪽이었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닌데 아무도 드나들지 않게 된 궁은 곧 무너질 것처럼 낡아 보였다.
가스파르는 한때는 무척 아름다웠던 궁전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제 날카로운 턱을 쓸었다.
‘루카스 윌레닌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곳이 이 폐궁전이었지.’
그레고르의 적장자인 프란츠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황태자궁을 사용하지 못했다.
황위에 오르기 전날 밤, 전대 황태자였던 루카스 윌레닌은 태자궁에서 행방불명되었고 눈앞의 궁전은 황위 계승권자조차 제대로 지켜 내지 못한 황실의 수치로 남았다.
‘왜 그의 영혼이 내 몸에 머물게 됐는지, 이유라도 알아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가스파르는 인적이 드문 폐궁전에 거침없이 들어섰다.
사라진 황태자, 그것도 그가 모시는 그레고르 황제의 경쟁자였던 루카스 윌레닌의 영혼이 왜 하필이면 가스파르의 몸 안에 들어왔단 말인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해결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직접적으로 맞부딪힌 적은 없었지만, 루카스 윌레닌과 가스파르는 따지고 보면 적대적인 관계였다.
지금까지 루카스 윌레닌은 제 몸을 차지하고도 제법 온건한 태도를 보였고, 자신의 딸인 레오노라와 모종의 계약을 맺었다는 것도 눈치챘지만 가스파르는 루카스 윌레닌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레오노라는 아이일 뿐이다.’
루카스 윌레닌은 대마법사로 이름을 날렸을 만큼 명석한데다 그레고르를 누르고 황위를 쟁취했을 만큼 권력욕 또한 대단한 ‘어른’이었다.
‘아무리 우리 리니가 아이답지 않게 똑똑하고 영리하고 잘났고 또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지만….’
어른인 루카스가 언제 마음을 바꿔 제 몸을 이용해 레오노라나 다른 아이들을 공격할지 모르는 일이질 않나.
“이곳인가.”
루카스의 침실에 들어선 가스파르는 태풍이라도 맞은 듯 정신없이 어지러운 방의 정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폐하께서 질색하는 루카스 황태자의 처소였다지만, 이토록 방치되었을 줄이야.’
생각해 보면 시체를 찾을 수 없다는 핑계로 그레고르 황제는 루카스 윌레닌의 죽음조차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한번 말씀을 올려 보는 게 좋겠군.’
와중에도 정적에게 예의를 다할 생각을 품은 정중한 가스파르는 루카스 윌레닌의 실종에 대한 작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난잡하게 흐트러진 침대가로 발을 뻗었다.
“그럼 실례하겠소, 황태자.”
파지직-!
그 순간, 가스파르가 발을 디딘 바닥에서 튀어나온 새파란 스파크가 지지직 소리를 내며 거대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가스파르는 재빨리 검을 발도했지만, 그를 구심점으로 빙글빙글 돌던 스파크가 마법진을 연성하는 게 먼저였다.
쾅!!!
갑작스레 불어 닥친 바람이 창문을 벌컥 열어젖힘과 동시에 가스파르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 * *
의사들에게 가스파르의 병명을 알아 오라고 닦달한 후에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빠 곁을 떠나지 못했다.
‘원작에서도 이렇게 가스파르가 갑자기 쓰러지는 일이 있었던 걸까?’
애석하게도 알 방법은 없었다. 엑스트라인 가스파르가 쓰러졌든 말든 언급되었을 리 없으니까.
“리니, 그러다 손 다친다. 숨도 쉬고.”
이성을 잃고 손가락 끝만 잘근잘근 깨물던 나는 실비가 다정하게 내 손을 잡아오는 덕에 겨우 심호흡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곧 깨어나실 거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리니. 그러다 네 몸이 더 상하겠어.”
자기들도 가스파르가 잘못될까 봐 잔뜩 겁을 먹었으면서, 실비와 에녹은 오빠 노릇을 하기 위해서인지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그러니까 안심해. 우리들도 있잖아.”
“…우웅.”
나는 에녹의 상냥한 목소리에 느릿느릿 대답했다.
“형이랑 내가 의사들을 다시 재촉하고 올게.”
“나두 갈-”
“아, 아니. 리니는 아버지 곁을 지키는 게 좋겠어.”
의사들을 만나고 오겠다는 에녹의 말에 덜렁 침대에서 내려오자, 하차니아의 차남과 삼남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다녀오겠다. 네가 괜히 움직일 필요없어.”
‘…내가 의사들을 패기라도 할까 봐 그러나.’
나는 실비의 단호한 거절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인 후 턱을 긁었다.
‘내가 좀 심하긴 했지.’
의사들의 책임감 없는 태도에 잔뜩 열이 받은 나는 그들에게 다짜고짜 오러구(球)를 집어던지며 호통을 쳤었다.
‘하지만 여태 아빠가 너무 무르게 굴어서인지, 의사들이 태연자약하게 군 건 사실이잖아.’
가스파르는 회복력이 뛰어난 소울나이츠인데다 다치는 일이 좀처럼 없을 만큼 무예가 빼어난 기사라서 하차니아의 의사들은 거의 놀고먹는 한량들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부상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제 실력은 알아서 갖춰 놨어야지.’
그래야 지금처럼 공작가의 일원이 쓰러졌을 때 빠른 대처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고용인 물갈이도 한 번 해야겠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나는 아이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효오.”
그 순간, 숙인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진다.
“어린애가 한숨이 길어.”
“악! 깜딱이야!”
나는 갑작스레 몸을 일으킨 인형에 화들짝 놀라 입을 벌렸다.
“…압빠?”
“네 아빠가 아니라서 미안하군.”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내게 사과하는 사람은 가스파르가 아닌 루카스였다.
‘하지만 오늘은 초승달이 뜨는 날이 아닌데?’
나는 초승달은커녕 태양이 작열하는 창밖의 푸른 하늘을 확인하곤 루카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우리 압빠 어디써.”
“…….”
“가쯔파르 어딘냐구!!!”
루카스가 낮에도 가스파르의 몸을 차지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지금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기분이 이상해.’
가스파르를 영영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놓으면 말해 주지.”
나는 잔뜩 고양된 불안감에 콩닥콩닥 뛰는 가슴께를 애써 잡아 누른 채 루카스에게서 떨어졌다.
“울 압빠 어딘는데?”
“나도 모른다. 내가 지금 왜 눈을 떴는지도 모르겠고.”
“거진말쟁이!”
나는 루카스의 책임감 없는 대답에 인상을 와락 찡그리며 다시금 침대 위에 올라섰다.
퍼억-!
“울 압빠 돌려조!!!”
자신의 가슴을 내가 앙당그레 말아 쥔 주먹으로 퍽퍽 내려치는데도 루카스는 저항하지 않았다.
퍼억, 퍽.
나는 루카스를 몇 번이나 더 때리고 나서야 전혀 시원하지 않은 가슴을 움켜잡은 채 몸을 수그렸다.
“우욱.”
“레오노라.”
“…약속해짜나. 니니 배신 안 하기루 해짜나.”
“…….”
“근데 왜 우리 압빠 몸 빼앗아써?”
내 원망에 루카스는 답이 없었다.
‘변명이라도 하지, 멍청이.’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루카스의 마나가 내게 전혀 흡수되지 않았다는 걸.
그건 그가 나와 맺은 마법사의 맹약을 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가스파르의 의식이 전제도 없이 사라진 것에 루카스의 의지가 없었다는.
‘하지만 그럼 아빠를 되찾을 방법도 모른다는 거잖아.’
나는 아무런 대비도 없이 아빠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에 볼 안쪽을 꽉 깨물었다.
의사들에게 오러구를 만들어 던지느라 마나를 잔뜩 소모한데다 가스파르가 걱정되어 끼니를 걸렀더니 정신력이 점점 무너져간다.
결국 루카스의 앞에서 완전히 아이가 되어 버린 나는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루카쯔.”
엉엉 우는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지켜보던 그가 느릿느릿 대답한다.
“루카쯔, 대마법사라먼서요.”
“…그랬지.”
“그럼 울 아빠 되찾아 주세오. 할 수 이짜나.”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뺨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닦으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니니가 마나 주께.”
“뭐?”
“니니가, 몸에 담은 루카쯔 마나 다 돌려주께. 니니가 다 주께.”
내 말에 루카스는 굳은 얼굴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그에게 매달려 자꾸만 울음이 비집고 나오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웅? 다 주께오. 제발요….”
가스파르는 나의 가족이었다.
내 아빠.
내가 처음, 평생 처음으로 가져 본 보호자.
“아이는 조건 없이 사랑받아도 된다, 리니.”
“나는 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단다.”
“나는 내 목숨보다도 너를 아껴.”
그간 가스파르가 끊임없이 내게 속삭여 줬던 상냥한 말들이 귓가를 웅웅 울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날 사랑해 줬어.’
아이는 그래도 된다고. 원래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해도 되는 거라고.
“허어엉….”
나는 입술만 달싹이는 루카스의 품 안에 안긴 채 결국 다시금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