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에노끄-!!!”
나는 트리스탄의 검기에 밀려 바닥에 떨어진 에녹의 모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호, 아기 공녀님이 제 막내 오라비를 걱정하는 모습이 참으로 귀엽네요.”
마침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귀부인 한 명이 쥘부채를 흔들며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내가 에녹을 걱정하고 있으리란 건 순 그녀의 착각이었다.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실수를 할 수가 있지?’
검기에 밀려 발을 헛디디다니.
흔하다면 흔한 실수였지만, 앙당그레 말아 쥔 내 주먹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려 온다.
훈련시킨다고 산속에서 곰도 잡아 와, 원작에서 검술 비법 빼 와 가르치느라 직접 오러소드를 다루는 방법까지 숙지했거늘.
‘이런 훌륭한 스승 밑에서 훈련받은 주제에…! 감히 실수를 한다고?!’
거꾸로 뒤집힌 채 나와 눈이 마주친 에녹이 이글이글 불타는 내 눈빛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디질래? 연무장 오백 바퀴 돌고 싶어?’
‘아니, 아니, 아니!’
다행히 우리 막내는 내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 후딱 제정신을 차렸다.
목검은 잃었지만, 허공에서 오러소드를 생성해 낸 에녹이 자세를 바로하며 트리스탄을 노리기 시작한다.
“흐아압!”
순간적으로 빈틈을 보였던 전과 달리 훈련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는 에녹을 트리스탄은 막는 데 급급했다.
아니, 막는 데 급급해 ‘보였다.’
“후움.”
나는 에녹의 검을 피하기만하고 도통 반격은 하지 않는 트리스탄의 모습에 눈썹을 꼼톨 움직였다.
“에녹 하차니아 공자님의 승리입니다!!!”
결국 수세에 몰린 트리스탄의 목에 활활 타오르는 에녹의 오러소드가 겨눠진다.
“오오! 우리 막내 공자님이, 솔로아 소공작을 이기셨다!!!”
하차니아 진영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지만, 차양이 드리워진 높은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던 나는 주머니를 뒤져 트리스탄의 외전을 꺼내 들었다.
“공녀님, 에녹 도련님이 상 받는 모습을 그리시게요?”
“…우웅.”
나는 룰루의 말에 고개를 까딱이며 남들에게는 수첩으로 보일 정도로 작게 축소한 원작을 뒤적였다.
“수땅해.”
아무리 내가 에녹 훈련을 빡세게 시켰다지만, 허점까지 보였는데 남주인 트리스탄을 수월하게 이겨 버리는 건 말이 안 된다.
* * *
◈
‘내가 에녹을 이겨 버리면 저 아이가 슬퍼하겠지.’
트리스탄은 군중 속에서도 홀로 빛이 나는 작은 아이를 흘깃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작은 제비꽃처럼 상냥한 연보랏빛 눈망울에 슬픔이 비치는 건 그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털썩.
트리스탄은 결국 검을 놓았다.
◈
* * *
“미찐넘아~!”
아이고, 이 화상아!
나는 거의 가스파르급으로 답답한 트리스탄의 행보에 기가 막혀 외전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벨루치 때처럼 잉크가 번지듯 흐려진 글씨가 새로운 문장을 이어 나간다.
* * *
◈
“실베스테르와 자카리에 비해 별 볼 일 없다는 평가를 듣는 것도 모자라, 그 하찮은 삼남에게까지 졌다는 건가?”
트리스탄은 자신을 버러지보다 못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공작의 시선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죄인인 양 사죄했지만, 공작은 제 앞에 무릎 꿇은 트리스탄의 손을 구둣발로 짓밟으며 차갑게 일갈했다.
“이 쓸모없는 놈을 당장 지하실에 가둬. 물 한 모금도 주지 말거라!”
“제가 스스로 가겠습니다.”
트리스탄은 에녹의 오러가 스친 어깨가 빠질 것처럼 욱신거렸음에도 티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
* * *
“……하.”
미치겠다, 정말.
나는 트리스탄의 외전을 읽어 내리며 또 돋아난 내 ‘하차니아병’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요기서 잠깐만 기다료, 눈누.”
나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린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룰루에게 눈을 찡긋했다.
오지랖 넓게 트리스탄을 돕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내 몸을 움직이게 했으니까.
하지만 나 때문에 부상까지 당한 채로 지하실에 갇힌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아니, 이 세계 부모란 놈들은 왜 우리 아빠 빼고는 다 이렇게 절망적일 정도로 사람이 덜 된 거야?’
로판이라 그런가?
로판 남주는 꼭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야만 한다는 공식이라도 있는 거냐고.
나는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은 채 싱글벙글 웃고 있는 에녹과 바리스탄에게 어깨가 붙잡힌 채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트리스탄에게 아장아장 다가갔다.
“리니!!! 나 이겼어!!!”
나를 먼저 발견한 에녹이 큰 소리로 외친다.
‘트리스탄이 봐준 거야, 이 바보야!’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다니.
당분간 에녹의 특훈 스케줄을 넉넉하게 잡아 놓으려던 나는 마음속 계획을 변경하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어? 어디가?”
나는 내게 트로피를 자랑하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에녹을 지나쳐 트리스탄 앞에 오똑 섰다.
“트리쯔딴.”
내가 에녹이 아닌 자신을 찾았다는 사실이 의아했는지, 트리스탄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다랗게 뜨인다.
나는 찬란한 햇볕이 스며드는 그의 태양 같은 금안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트리쯔딴, 다쳐떠요.”
나는 바리스탄이 거칠게 붙잡고 있는 트리스탄의 어깨를 흘긋하며 말을 이었다.
“니니가 치료해 주께오.”
“어허. 공녀님, 소공작님은 이제 솔로아 영지로 회귀하셔야 합니다.”
아르델에서의 사건으로 내게 굉장한 악감정을 품은 바리스탄이 나를 쥐잡을 듯 노려보면서도 공손히 입을 연다.
“솔로아의 일에는 상관 마시고 물러나시지요.”
그의 말은 일종의 경고였다.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
솔로아에, 그러니까 트리스탄이 당하는 학대에 눈을 감으라는.
“하지만 트리쯔딴 소공잔니 다쳐떠요.”
“무슨 말씀이신지? 소공작님은 멀쩡합니다. 트리스탄, 움직여 보거라.”
바리스탄은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트리스탄의 어깨를 밀어 버렸다.
“보세요. 멀쩡하지 않습니까?”
고된 훈련으로 바싹 마른 트리스탄의 몸이 앞뒤로 낙엽처럼 흔들린다.
“아푼데 그러디 마!!!”
셔츠 속 어깨는 피만 안 흘렀지 생살이 드러난 것처럼 벌겋게 부었을 텐데!
나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팔을 움직이는 트리스탄의 행동에 경악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암튼, 니니가 트리쯔딴 데꼬 갈 꺼에오.”
언젠가는 당연히 솔로아 영지로 돌아가야만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적어도 몸만이라도 멀쩡해진 다음에 보내야 해.’
지금 트리스탄은 바리스탄에 의해 오러석을 추출당한데다 에녹의 검에 당해 몸이 완전히 넝마가 되어 버린 상태였으니까.
“공녀님께는 그럴 만한 권한이 없으십니다. 트리스탄은 솔로아 공작가 소유의 사람이니 솔로아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얼씨구.
나는 바리스탄의 말에 흥,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는 애를 아예 물건 취급을 하네?’
불법 노예 시장에 들락거리더니 머리가 완전히 돌아 버렸나.
“니니, 건한 이떠요.”
나는 바리스탄을 똑바로 노려보며 트리스탄의 손을 붙잡았다.
작지만 방향이 확실한 힘을 주자, 그가 실에 묶인 인형처럼 내게 천천히 딸려 온다.
“트리쯔딴, 니니 기산니미야.” (트리스탄, 니니 기사님이야.)
“…예?”
“맹셰두 해떠. 그러치요?” (맹세도 했어. 그렇지요?)
“하지만 그때 네가,”
콰직.
나는 내가 맹세를 거부했었다고 눈치 없이 반박하려는 트리스탄의 발등을 즈려 밟았다.
“…그랬지. 네, 제가 레오노라 공녀에게 기사의 맹약을 했습니다. 단장님.”
“뭐?! 네가 왜! 네가 왜 하차니아 공녀에게 기사의 맹약을 해!!!”
검술 대회에 하차니아와 솔로아의 사정이 얽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전말의 진실까지는 알지 못했던 듯 바리스탄이 노호를 터뜨린다.
“공작 각하께서도 이 사실을 아는 것이냐!”
“…아직은 모르십니다.”
자신의 손을 꽉 붙든 내 작달만한 손가락을 힐긋한 트리스탄이 느릿느릿 말을 덧붙인다.
“다만, 제 레이디가 원하시니 당분간은 레이디 곁을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트리스탄을 내 뒤로 숨기며-전혀 안 숨겨졌지만- 바리스탄을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줬다.
“그러태, 아저씨.”
“아, 아저씨?!”
바리스탄이 내 말에 크게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는 그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휙 등을 돌렸다.
‘아무리 트리스탄과 내가 어려도, 기사의 맹약에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영지전으로 번질 수도 있는 문제니까 당분간은 건들지 않을 거야.’
레이디와 기사는 그런 관계였으니까.
보호를 원하는 레이디를 지키겠다는 기사를 억지로 떼어 놓는 행위는 자칫하면 솔로아 공작가의 면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다.
“아효, 어깨 보여 주세오.”
트리스탄을 재빨리 마차에 태워 저택까지 실어 나른 후, 나는 곧잘 넘어지는 나를 위해 룰루랄라가 준비해 둔 구급상자를 찾아 펼쳤다.
‘화상 치료쯤이야 껌이지.’
박힌 총알도 뽑아내던 특수부대원이 바로 나였다.
나는 진물이 나는 제 어깨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트리스탄의 시선을 무시한 채 화상 연고를 쭈욱 짜냈다.
“어떻게 안 거지?”
“웅?”
“내가 다쳤다는 거. 나와 검을 맞댄 에녹도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
나는 트리스탄의 예리한 질문에 흠칫 몸을 떨었다.
“역시….”
‘역시…? 설마 내가 모종의 힘을 이용해 제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나!’
나는 트리스탄의 주홍빛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넌 천사인 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