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46화 (46/486)

제46화

“눈누….”

“네, 아가씨.”

“저게 다 모야…?”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믿을 수 없어 아연실색했다.

☆ 구국의 영웅,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 ☆

본관과 맞닿은 도개교를 장식한 현수막에 새겨진 새까만 글씨는 분명 내 이름이었다.

‘…구국의 영웅?’

난 세 살짜리 아기인데요?

게다가 하차니아라는 성은 영웅이라는 수식어와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아침부터 저택 밖이 수선스럽다 싶어 창밖을 확인했을 뿐인 나는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과 저택의 정원을 가득 메운 붉은 갑주들의 향연에 턱을 벌렸다.

“글쎄요. 오늘 아침에 갑자기 솔로아 소공작님이 찾아오시긴 했어요.”

“트리쯔딴이?”

“네.”

나는 마찬가지로 당황한 기색인 룰루의 대답에 이를 악문 채 방을 벗어났다.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오도도 중정으로 달려 나가자, 나를 발견한 트리스탄의 얼굴이 환하게 물든다.

“레오노라.”

“트리쯔딴!!!”

“내 선물은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군.”

나는 트리스탄이 답지 않게 수줍은 얼굴로 가리키는 현수막에 매섭게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마음에 안 든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었다.

“저게 도대체 모에요!”

“말하지 않았나. 네 선의를 그 누구도 잊지 않게 하겠다고.”

나는 잊고 있던 트리스탄의 다짐을 그제야 떠올리며 아, 탄성을 내질렀다.

‘아니, 그 말이 이런 뜻이었다고?’

뜬금없이 남의 집에 찾아와 나를 찬양하는 팡파르를 울리겠다는 말이었나.

“공작저로 돌아와 일을 처리해보니 네 공로를 인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

당연했다.

세 살짜리 아기가 존경받던 브리넨 후작이 운영하는 구휼원을 와해시켰다는 말을 누가 믿겠나.

게다가 나도 내가 구휼원을 무너뜨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 막 구휼원의 더러운 운영 방식이 괴한-나-의 습격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진 참이었다.

황실과 솔로아 공작가는 꼬리를 밟히고 싶지 않아 몸을 내뺄 테니 지금 내가 일부러 주목을 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너의 선의에 존경을 표하고 싶다.”

“트리쯔딴.”

쿵.

솔로아의 철없는 도련님은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털썩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싶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데 내 조약돌만 한 손을 트리스탄이 냉큼 끌어 잡는다.

“그리하여 오늘부로 나는 너를 나의 레이디로 섬기겠다.”

“…녜?”

“트리스탄 드 솔로아-굴렘. 루엘라의 인애와 솔로아가 비추는 태양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나는 말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트리스탄의 맹세에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오늘부로 나는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의 기사로 살 것이며-”

“자, 잠깐!!!”

“죽음을 불사하고 너를 지키겠다.”

쿵-! 쿠쿠쿵!

트리스탄의 맹세를 뒤따라 수십 명의 기사들이 무릎을 꿇는 소리가 중정을 가득 메운다.

“레오노라 공녀님을 위하여!”

“위하여-!!!”

우렁찬 외침에 듣는 나까지도 가슴이 웅장해질 뻔했지만,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트리스탄의 어깨를 달달 흔들었다.

“치소해~!!!” (취소해~!!!)

트리스탄이 지금 내게 한 ‘기사의 맹세’는 보통 맹세가 아니었으니까.

평생 단 한 번,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충성을 바칠 만한 주군을 만났을 때나 기사들이 하는 맹세였는데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바친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요즘은 아무도 하지 않는 맹약이었다.

게다가 트리스탄은 솔로아 공작가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였다.

‘이건 솔로아 공작가를 내게 바치겠단 거나 다름없잖아!’

물론 어린애에 불과한 트리스탄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겼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나를 기사로서 받아 줄 수 없다는 건가? 내 기사의 맹세를 거부한다는 건.”

“트, 트리쯔딴은 쏘로아구… 니니는 하차니아니까.”

나는 대강 우리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관계이며, 솔로아 소공작이 하차니아의 공녀를 레이디로 섬길 수는 없다는 말을 짧게 축약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솔로아는 기꺼이 너를 맞이하겠다.”

“뭔 개소리야.”

에고, 깜짝이야.

트리스탄의 쌩뚱 맞은 발언에 내 마음의 소리가 툭 튀어나온 줄 알았는데 에녹이 살벌하게 트리스탄을 노려보며 계단을 내려온다.

“누가 누굴 맞아?”

“솔로아가, 레오노라를.”

“우리 리니가 왜 솔로아에 가야 하는데?”

“레오노라가 자신은 하차니아고 내가 솔로아이기 때문에 나를 자신의 기사로 삼을 수 없다고 하기에.”

자신이 묻는 말마다 따박따박 대답하는 트리스탄에게 빠르게 가까이 다가온 셋째는 나를 제 등 뒤로 숨기며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레오노라의 기사가 될 사람은 하차니아에도 넘쳐, 트리스탄.”

“양보다 질이란 말은 모르는 건가, 에녹.”

하차니아에 기사들이 아무리 넘쳐나도 자신만한 기사는 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재수 없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

싶었는데 에녹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주먹을 까득 쥔다.

“네가 그토록 대단한 기사인지는 검술 대회에서 판가름 나겠지!”

“검술 대회에서 내 실력을 입증하면 나를 너의 기사로 삼아 주는 건가, 레오노라.”

검술 대회를 언급한 건 에녹이었는데 트리스탄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웅? 우웅.”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부담을 느낀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시니어 검술 대회에 비해 이목을 끌지 못하던 주니어 검술 대회는 이례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 * *

“아가씨, 드디어 오늘이에요!”

“오늘이 바로 솔로아 소공작님과 에녹 도련님이 아가씨를 두고 혈투를 벌이는 날이랍니다!”

나는 룰루랄라의 신이 난 목소리에 아효, 한숨을 내쉬었다.

솔로아 공작가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게 충성 맹세를 하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사건의 전말이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지금 제국은 주니어 검술 대회에 대한 관심으로 떠들썩했다.

“이번 주니어 검술 대회에 솔로아 공작가가 사활을 걸었다면서요?”

“듣자하니 솔로아 소공작이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면 공작가의 기사단 반절을 떼 내 주게 생겼다던데요.”

“어머. 하차니아에서는 레오노라 공녀를 걸었다고 들었어요. 솔로아에 양녀로 보낸다나?”

“세상에! 판이 아주아주 크네요.”

룰루와 랄라가 오전부터 열심히 준비한 차양 아래 앉은 나는 주변에서 숙덕거리는 사람들의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에녹이 반드시 이겨야 할 텐데.’

셋째가 우승을 차지하지 못해도 내가 솔로아에 양녀로 갈 일은 없겠지만, 대신 트리스탄을 내 기사로 삼아 줘야 했다.

‘그 욕심 많은 솔로아 공작이 제 아들이 하차니아인 나를 레이디로 섬기는 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잖아!’

하차니아 공국을 세워 제국에서 독립하는 걸 목표로 두고 있는 나는 되도록이면 다른 5대 귀족 가문들과 무난한 이해관계를 맺고 싶었다.

‘원작에서는 분명 아이네스를 레이디로 섬기는데, 왜 갑자기 나를 레이디로 모시겠다고 난리야?’

나는 에녹을 제외한 다른 소년들은 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듯 한 번에 쓸어버리는 트리스탄을 멀찍이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에녹도 막판에 불이 붙어서 미친 사람처럼 훈련에 임하기는 했지만….’

남주 버프라는 게 있긴 있는 걸까.

그간 여러 고초를 겪었음에도 트리스탄은 또래 소년, 아니, 성인 기사를 통틀어도 뛰어난 무예를 자랑하고 있었다.

당장 시니어 검술 대회에 출전해도 실력을 뽐낼 수 있을 만큼 화려한 불의 향연에 내 마음 한구석에 슬금슬금 걱정이 피어오른다.

“자, 그럼 다음 출전자는…!”

사람 애간장을 녹이며 말을 늘어뜨리던 진행자가 북을 둥둥 두드리다 입을 연다.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에녹 하차니아 공자와 트리스탄 솔로아 공자입니다!”

“우오오오-!!!”

“우와아아아아!!!”

대결이라도 하듯 하차니아와 솔로아 양측에서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나는 붉게 물결치는 솔로아의 붉은 사자와 검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검은 늑대의 휘장을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른들이 애들 싸움에 더 신났네, 신났어.’

한동안은 전쟁도 없었겠다, 무료했던 기사들은 에녹과 트리스탄의 대결에 열을 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도록.”

먼저 검무장 위에 오른 트리스탄이 오러소드를 길게 늘어뜨리며 입을 연다.

“네 걱정이나 해, 트리스탄.”

에녹 또한 기다렸다는 듯 오러소드를 발동시키며 그에게 대꾸했다.

채캉, 챙-!

트리스탄과 에녹의 시합은 아이들 싸움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금속성의 소리가 군중의 웅성거림을 억누를 정도로 맹렬하게 울려 퍼진다.

“공자들의 실력이 정말 대단하군요.”

단순히 오락거리로 에녹과 트리스탄의 시합을 소비하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땀범벅이 되어서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는 그들에게 매료되었다.

합과 합, 검에서 검으로 이어지는 살벌한 경쟁이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던 와중,

“어머!”

소년 중 한 명이 검을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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