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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41화 (41/486)

제41화

아크레아의 소년왕.

이름 대신 그런 명칭으로 불리던 소년은 여섯 살에 왕위에 올랐고 여덟 살에 제 왕국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사방에서 솟아오른 불기둥이 소년의 작은 왕국을 씹어 삼킬 듯 입을 벌린 것이 시작이었다.

바다를 헤엄치고 사막을 건넌 제국의 군대가, 병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무력한 왕국을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왕국을 배반한 왕족과 귀족들은 일찌감치 왕도를 떠났고, 거대한 성에 덩그러니 남은 소년만이 홀로 제국군을 맞이했다.

“당신이 아크레아의 마지막 왕인가.”

크기조차 맞지 않아 목걸이처럼 덜렁 내려온 왕관을 쓴 소년에게, 제국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총사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

차분한 대답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왜소하고 작은 소년이었다.

“나는 아크레아와 끝을 같이하겠다.”

왕좌의 팔걸이에 간신히 팔을 걸친 소년이 느릿느릿 말을 덧붙였다.

“부모와 형제가 모두 배신하고 떠난 망국과 끝을 같이하겠다고.”

아크레아의 왕실이 고작 여섯 살 작은 아이에게 왕위를 던져 준 이유는 간단했다.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부정부패를 감당하지 못해 썩어 버린 왕국은 갱생이 불가능했으니까.

소년의 아비는 헐값에 자신의 왕국을 팔아치웠고, 제국은 왕국과의 전쟁에서 정당하게 승리했다는 명분이 필요했다.

“내 목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나.”

소년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먹구름이 낀 하늘처럼 빛바랜 소년의 머리칼을 바라보던 총사는 한숨 끝에 입을 열었다.

“네 아비가 죽음이 두려워 아크레아의 비밀에 대해 입을 열었다.”

제국군이 도개교를 무너뜨리고 쳐들어오는 순간에도 무표정했던 소년의 얼굴이 그제야 창백한 흰빛으로 물들었다.

소년은 비겁한 아비와 달리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너는 제국을 지킬 영광된 무기로 쓰일 것이다. 영원히.”

영원.

그 단어가 참담하게 두려웠다.

* * *

드레스 안주머니에 잘 챙겨 넣었던 원작이 소년의 대답에 미친 듯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잔뜩 당황해 허둥거리는 내게로 소년의 과거가 흘러들어온다.

‘미친놈들….’

나는 시간과 기억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괴로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크레아의 장인들이 매달려 만든 무기라더니-! 그게 사람이었어?’

소년은 마도 왕국이라고 불릴 만큼 마법이 발달했던 아크레아에서도, 천년에 한 번 나올 대마법사가 될 거라 여겨질 정도로 뛰어난 자질의 천재였다.

소년의 몸은 아크레아를 지키는 12사도의 영혼을 담기에 적절한 그릇으로 선정되었고, 아크레아를 버리고 도주한 비겁한 왕이자 소년의 아버지였던 남자는 제 아들을 병기로 개조시킨다.

‘나라 하나를 통째로 가라앉혔는데도 소년의 영혼이 채 마모되지 않은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의 힘을 두려워해 그를 아크레아와 함께 소멸시킬 계획이었지만, 제국군의 압박에 결국 기밀을 누설해 버렸고 소년의 안위는 제국군 손안에 떨어져 버렸다.

“아무리 죽는 게 무셔도 그러치, 제 자식을 파라?”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소년의 과거가 경악스러워 주름이 길게 잡힌 이마를 콱 눌렀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마정석 추출도 모자라 소년은 제국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소환되어 몇백 번의 죽음을 반복해야만 했다.

아크레아-윌레닌 전쟁에서 총사령관을 맡았던 초대 브리넨 후작이 자신만이 아크레아의 비밀 병기를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며 5대 귀족의 단상에 오르는 모습까지 확인한 나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고통스러운 숨을 가쁘게 내쉬는 나를 셀리아가 깜짝 놀라 부축한다.

소년은 바닥에 엎어진 나를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너야말루 갠차나?”

내가 실금처럼 남은 소년의 흉터를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리자 적당히 붉은 소년의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네. 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의 말은 제 몸에 억지로 욱여넣은 12사도의 영혼이 다 고갈되었다는 뜻이었다.

마나가 전부 소진될 때까지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었던 소년은 드디어 안식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딴 인생을 살아와 놓고 괜찮다고?’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나.

그런 삶이 괜찮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이 저를 빼앗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후작이 저를 ‘발동’시킬 겁니다. 그전에 죽이세요.”

“…….”

“당신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저랑 비슷한-”

비슷한?

소년의 뒷말이 궁금해 수그렸던 고개를 들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마저 듣지 못했다.

“쥐새끼처럼 누가 내 집무실에 숨어들었나 했더니.”

나는 브리넨 후작의 얇은 목소리에 봉긋 솟은 이마를 찡그렸다.

“당신이었군요, 레오노라 공녀.”

나는 후작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느긋하게 소파까지 걸어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왜 책 속 악당들은 위기의 순간에도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걸까.’

말도 많고 혓바닥도 길어서 주인공이 대처할 시간이 충분하다 못해 남아돌아 버리던데.

‘그러니까 주인공들은 늘 단체로 옷도 갈아입고 마법 주문까지 외우잖아.’

“후후. 이 로베르 브리넨, 사실 당신을 기다려 왔-”

삐빅-!!

삐이익-!!!

주인공처럼 악당과의 대치 장면을 연출할 만한 인내심이 없는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호루라기를 불어 젖혔다.

기다렸다는 듯 벨루치가 이끄는 아이들 무리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엄마아빠가 날 찾으러 왔대!”

“진짜? 우리 엄마도 왔다고 했어!”

“누나가 날 데리러 왔대!”

어떻게 아이들을 이 짧은 시간 내에 설득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을까 궁금했는데,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한 모양이었다.

‘진실을 알게 되면 아이들이 실망할 텐데 어쩌지.’

나는 시큰하게 아려 오는 가슴을 꾹 누르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밖에 나가서 실망을 하더라도 여기서 이용당하는 것보다는 나아.’

“하! 구휼원의 아이들을 데려가서 도대체 뭘 하시려는 겁니까.”

“신고하꼬야.”

나는 아이들이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 속에서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는 브리넨 후작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누구한테요? 브리넨 구휼원은 그레고르 황제 폐하께서도 후원하는 사업입니다.”

“그곤 당신이 거진말 하니까!”

“순진하신 공녀님. 폐하께서 정말 구휼원의 정체를 모를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나는 후작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원작에는 아이네스가 구휼원의 정체에 충격을 받는 장면만 묘사되어 있었어.’

아이네스가 울먹이며 구휼원의 정체를 발고한 뒤 그레고르는 트리스탄과 손을 잡고 구휼원 소탕 작전을 펼치긴 한다.

‘하지만 그가 구휼원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는 언급은 없긴 했지.’

빌어먹을 황제.

아무리 딸바보가 되고 나서야 사람다운 감정을 품게 되는 폭군 아빠 역이라지만, 이 정도면 애초에 인성이 글러 먹은 거 아닌가.

“…어째뜬, 당신이 더는 아이들을 이용하지 몬하게 하꺼야.”

“좋습니다. 데려가세요.”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후작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꿍꿍이지 싶어 소년이 건넨 소총의 방아쇠를 만지작거리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후작이 히죽 입꼬리를 올린다.

“구휼원의 아이들을 전부 합쳐도 네게서 뽑아낼 마정석의 가치보다는 못할 테니까.”

후작은 생쥐처럼 말린 수염을 매만지며 품안에서 손바닥 길이의 셉터를 꺼내 들었다.

‘아이네스가 발견했던 고대 병기가 저거구나!’

“저X을 잡아, 빌헬름.”

셉터는 소년을 조종하는 아티팩트인 듯했다.

“죽여.”

나를 향해 달려오고 싶어 안달이 난 듯 움찔거리는 몸을 간신히 억제한 소년이 미약한 숨을 흩뜨리며 나를 돌아본다.

“날 죽여, 제발.”

무감했던 소년이 처음으로 드러낸 감정의 발로였다.

“움직이지 않고 뭐하는 거야, 이 개자식아!”

나는 후작의 외침에도 제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는 소년을 향해 총구를 기울였다.

“어서.”

소년이 나를 재촉한다.

“…미안.”

나는 소년을 향해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난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전생의 나처럼 평생 타인의 욕심에 이용만 당했던 소년의 목숨을 지금 거둘 수는 없었다.

“젠장, 가드! 가드를 불러 와!”

미동도 하지 않고 나만 바라보는 소년을 시뻘게진 눈으로 노려보던 후작이 결국 설렁줄을 흔들었다.

나는 문을 덜컥 열고 들어오는 병사들의 모습에 내 옆을 지키고선 셀리아를 창가로 밀었다.

“내가 아까 준 아티팩뜨로 도망갈 수 이써, 쎌랴.”

“네?”

“도망쪄!! 빤니!!!”

오러로 몸을 감쌀 수 있는 나는 모르겠지만, 힘없는 일반인인 셀리아는 위험할 게 뻔했다.

내 외침에 둥근 눈을 크게 뜬 셀리아가 허리를 굽혀 도약한다.

“왜 글루 가~!!!”

창가로 뛰어내려 도망을 치랬더니 셀리아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휘익-!

경악한 내 외침을 뒤로한 그녀가 후작의 책상을 밟고 공중에 떠오른다.

“커억!”

그녀의 북실북실한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머리핀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싶더니, 곧 병사가 목을 움켜쥐며 고꾸라졌다.

“?”

나는 셀리아가 혼자서 병사 다섯을 처리하는 살기등등한 모습에 침까지 주르륵 흘려 가며 입을 벌렸다.

“…쎌랴, 집시라묘?”

“네! 집시는 원래 이런 거 다 해요!”

이 세계 집시는 내가 아는 집시랑은 완전 다른 종족인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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