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하차니아병이 옮아 버렸다. 시답지 않은 일에 마음이 쓰이는 몹쓸 병.
지금 내 행동은 하차니아병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가 왜 생판 모르는 애를 도와줘야 해?’
속으로 발악하면서도 짤막한 몸뚱이는 마정석을 추출당하는 소년에게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푸쉬식.
오러로 감싼 손바닥으로 컨트롤러 부분을 후려치자 기계가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동을 멈춘다.
“……?”
고통 속에 넋이 나간 듯 흐린 소년의 청안을 마주한 나는 한숨과 함께 그의 멱살을 잡아 끌어 내렸다.
“너, 마나 추쭐이 몬지 잘 모르는 거 가튼데.”
체내 마나량이 방대한 사람이라면 마나를 몸 안에서 빼내는 게 당최 무슨 짓인지 감이 안 잡힐 수도 있었다.
‘마나가 무한대로 흐른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모든 인간의 마나량은 유한했다.
“그러다 주글 수도 이써.”
“압니다.”
나는 소년의 무감한 대답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안다구?!”
자기 생명력을 깎아먹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행하고 있었단 건가.
내가 기가 막혀 입을 벌리는 사이 소년은 내가 멈춘 기계를 살피기 시작했다.
“당신이 추출기를 망가뜨렸습니다.”
“아라.”
일부러 망가뜨린 거니까 모를 리 없었다.
소년은 부러 저가 뱉은 말을 따라 하듯 중얼거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후작님이 화를 내실 겁니다.”
“난 그넘 안 무셔.”
사실 아주 조금 무섭긴 했다.
브리넨 후작은 <아.황.장>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조연이었다.
‘하지만 그런 놈에게 쫄기엔 미친개의 이름이 아깝다고.’
“후우, 어쩔 수 업찌. 내가 너두 구해 주께.”
소년은 벨루치처럼 비중 있는 악역도 아니었고 셀리아처럼 애타게 찾는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휼원은 아이가 지내기엔 최악인 곳이니까.
“인누 와.”
나는 내가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큰 선심을 베풀고 있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 있는 소년의 손목을 붙들었다.
“이거 써. 널 숨겨 주꼬야.”
후작이 제대로 먹이지도 않는지 빼빼 마른 소년의 손목에 아티팩트 팔찌를 채우면서 나는 아까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이거 지쨔 비싼 고야.”
탐지 마법에 걸리지 않는 수준의 위장 아티팩트는 매물도 귀한데다 전부 일회용이었다.
‘그래서 꼭 필요할 때 쓰려고 나도 쓰지 못했던 건데!’
소년은 제 허락도 구하지 않고 제 손목에 팔찌를 채운 내 행동에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내가 비싼 거라며 생색을 내자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자, 이졔 나 따라와.”
나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소년을 이끌고 갓난아기가 모여 있던 층에 올라섰다.
‘혼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아기들은 한 번에 빼오기 힘들 거야.’
구휼원에 머무는 모든 아이들을 탈출시키려면 합이 중요했다.
‘그리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아이들을 리드할 만한 인물이라면….’
벨루치가 적격이었다.
* * *
쨍그랑-!
연습 때는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던 찻잔이 미끄러졌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제 인생을 찢어 놓는 것만 같아서 벨루치는 하얗게 질려 브리넨 후작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그의 입꼬리가 쓱 올라가고 있었다.
“이런. 벨루치가 구휼원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브리넨 후작이 중얼거리는 말에 벨루치는 저가 서 있는 자리도 잊고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절대 싫단 말이야!’
구휼원에 남고 싶지 않다는 격렬한 의사 표시였지만, 가정 교사나 하녀장으로 키울 만한 인재를 찾는 귀족들 눈에는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할 만큼 성미 급한 아이의 고집처럼 보일 뿐이었다.
“저 아이는 어쩐지 실수가 잦네요.”
“저 정도로 잦으면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죠.”
하녀의 속삭임에 마담 마치가 냉랭하게 대꾸하자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벨루치의 손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빛 좋은 개살구군요. 얼굴만 예쁘지 손끝이 야무지지 못해 제가 데려갈 수는 없겠어요.”
벨루치는 절망해 마담 마치의 앞에 다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부, 부인! 제가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찻잔을 놓친 것도, 아까 부인의 드레스 자락을 밟은 것도 전부 실수였어요.”
마담 마치의 저택은 벨루치에게 마지막 희망이나 마찬가지였다.
적당한 시기에 입양되지 못한 구휼원의 소녀들 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아이들은 수전노인 마담 마치의 일꾼이 되거나 나이 지긋한 노귀족의 첩으로 들어갔다.
‘내 경우에는 그게 브리넨 후작일 거고.’
벨루치는 전대 후작 부인, 그러니까 자신과 불과 네 살 차이였던 소녀가 후작저에서 어떤 방식으로 죽어 나갔는지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저는 입이 짧아 밥도 거의 먹지 않아요. 잠도 없어서 부인의 곁을 밤이고 낮이고 지킬 수 있어요!”
마담 마치는 적은 돈으로 고된 일을 시킬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흐응. 그럼 그냥 데려갈까.”
절박한 벨루치의 말에 마담 마치가 고민하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자 브리넨 후작이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선다.
“부인, 벨루치를 데려가시렵니까?”
“생각중이에요. 데려간다면 제가 구휼원에 지불해야 하는 금액은 어떻게 되나요?”
“지불이라뇨, 부인. 구휼원은 오직 후원금으로만 운영되고 있습니다.”
결국 기부금 명목으로 아이들을 팔고 있다는 말이었다.
“부인께서 벨루치를 데려가시면 구휼원의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돌봐주던 큰언니를 잃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추가적으로 가정 교사를 고용해야 하고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브리넨 후작의 번지르르한 설명에 마담 마치는 귀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 뭐. 네. 후원금이요.”
“제가 생각하는 벨루치 몫의 후원금은 이정도입니다.”
브리넨 후작이 마담 마치에게 아이들의 값을 매긴 표를 스리슬쩍 보여주자, 그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오천 골드? 후작님, 실례지만 영재원을 수석 졸업했던 메이의 후원금이 천 골드였다고 알고 있는데요.”
“요즘 가정 교사 월급이 부쩍 올라서 말입니다.”
브리넨 후작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하는 설명에 놀란 사람은 비단 마담 마치만이 아니었다.
‘…오천 골드?’
평범한 영지민의 1년 생활비가 천 골드쯤이었다.
구휼원에서 이미 가혹하게 마정석을 착출당해, 한계까지 기력을 소진한 아이들만이 외부로 차출되었으니 오천 골드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다.
‘날 내보낼 생각이 없는 거야.’
벨루치는 그제야 후작의 뜻을 눈치채고 경악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 사기꾼!”
브리넨 후작은 분명 그녀에게 구휼원 연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조했었다.
“나랑 약속했었잖아요!!”
브리넨 후작은 평정을 잃은 벨루치의 모습이 외려 달갑다는 듯 비죽 웃었다.
“벨루치가 가끔 이렇게 이성을 잃곤 한답니다, 부인.”
“세상에. 이런 아이를 도대체 누가 그 가격에 데려가겠어요, 후작님?”
“그럼 저희 구휼원이 거두는 수밖에는 없죠. 안타깝게도.”
구휼원이 갈 곳 없는 고아와 성질 고약한 청소년을 위한 따뜻한 곳이라는 듯 가식적인 미소를 선보인 후작은 부르르 떨리는 벨루치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진정하렴, 벨루치. 오늘은 이만하고 내 침실에 가 있는 게 좋겠구나.”
“…….”
“구휼원의 아이들은 지금쯤이면 벌써 자고 있을 테니 말이야. 소란 떨지 말고, 어서.”
무력감에 빠진 벨루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채점표를 든 귀족들이 사방에 가득 모여, 그녀의 행동을 꼼꼼히 체크하고 있었다.
‘연습 연회에서는 단 한 번도 이런 허접한 실수 따위 한 적이 없었는데!’
후작이 자유를 약속했기에 잠까지 줄여 가며 몸가짐을 갈고 닦았다.
‘가정교사로 채용되지 않으면 쓸모도 없을 역사서까지 달달 외웠던 건 도대체 뭘 위해서였지?’
어차피 후작은 자신을 놔줄 생각이 없었는데.
벨루치는 허망한 헛웃음을 흘리다 자신을 재촉하는 후작에게 붙들려 뒤를 돌았다.
“베루띠, 여기 이썬네?”
그 순간, 붉은 빗줄기가 가득한 채점표 사이로 해맑은 아이 얼굴이 불쑥 솟는다. 어디서 세수라도 하고 왔는지 뽀얀 얼굴에 물기가 묻어났다.
“이고 다 모에요?”
눈부시게 빛나는 실버블론드에서 검회색 물을 뚝뚝 흘리며 레오노라는 활짝 웃었다.
“하차니아의 공녀님이시네요. 이 종이는 벨루치 양의 능력을 평가하는 채점표랍니다.”
레오노라의 정체를 알아본 귀부인 한 명이 빠르게 대답한다.
“후웅. 베루띠 97점 마잔네. 근데 왜 울고 이써?”
“어떻게 보면 높은 점수지만, 귀족가에서 일을 하려면 완벽한 모습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해서 오늘 벨루치 양을 고용하려는 가문이 없었답니다.”
레오노라는 귀부인의 친절한 설명에 씨익 웃으며 벨루치가 찻잔을 엎은 테이블 위에 올라섰다.
“니니두 해 볼래.”
채점표를 쓱 훑은 레오노라가 몸을 수그려 후작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든다.
퍼억-!
“헉!”
깨지진 않았지만, 후작의 이마를 강타한 찻잔이 데구르르 바닥을 구른다.
당황한 사람들의 숨이 사방에서 흩어졌지만, 레오노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후작과 눈을 바로 마주했다.
“실수했네.”
“…….”
“근데 애는 원래 실수해도 돼.”
그러면서 크는 거야.
벨루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울리는 레오노라의 목소리에 소녀는 가냘픈 주먹을 세게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