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공부를 꽤나 좋아하시나 봅니다.”
내가 품에 꼭 안고 있는 원작 책을 흘깃한 후작이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묻는다.
“녜.”
“아무쪼록 연회를 즐겨 주세요, 공녀님.”
“…녜.”
나는 후작의 꺼림칙한 시선을 애써 피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꾹 눌렀다.
‘원작의 인물이 주변에 있어.’
트리스탄의 외전이 펼쳐질 때와 마찬가지로 책이 누군가와 공명하고 있었다.
나는 나만이 볼 수 있게 반짝이는 오망성의 꼭짓점에서 노란색 빛줄기가 발화하는 모습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외전이 나올 정도라면 트리스탄만큼이나 원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라는 건데.’
원작의 주연들 중에서 브리넨 후작측 인물이 있었던 걸까?
나는 빛줄기가 가리키는 인물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장아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원으로 가시겠습니까?”
후작 곁에 시립해 있던 하인 한 명이 나를 안내하려는 듯 손을 뻗는다.
“마침 후원에는 어린 영애들을 위한 작은 티파티가 진행 중입니다.”
하인이 가리키는 방향과 빛줄기가 가리키는 방향이 일치한다.
“조아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룰루랄라 대신 내 하녀 역을 맡은 셀리아의 손을 꼭 붙들었다.
‘셀리아는 별 도움이 안 될 테니까,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에녹과 실비는 각각 검술 대회를 준비하고 있어 구휼제에 참가하지 못했고, 아빠는 황제의 호출로 황궁으로 향한 참이었다.
‘가족들 몰래 구휼원을 파괴하고 병기를 빼 올 기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정석 변태인 브리넨 후작에게 노출된 위기이기도 했으니까.
꼴깍 침을 삼킨 나는 하인을 따라 브리넨 후작저가 자랑한다는 아름다운 후원에 들어섰다.
“와아. 너무 예쁘네요. 오늘 아가씨 의상과 정말 잘 어울려요.”
요정의 정원처럼 반짝반짝 꾸며 놓은 후원의 풍경에 셀리아가 아이처럼 감탄하며 나를 돌아본다.
“오늘 아가씨, 꼭 요정 같거든요.”
나는 셀리아의 칭찬에 수줍은 듯이 뺨을 긁었다.
‘하긴. 오늘 내가 좀 깜찍하긴 하지.’
은빛으로 빛나는 빳빳한 드레스자락을 꼼질거리던 나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고 내게 다가오는 여자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머. 레오노라 님?”
여자아이들 중 가장 먼저 나를 알아본 로렐라인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알은체한다.
“미네, 피니아. 이분은 하차니아 공작가의 막내따님이신 레오노라 님이세요.”
“미네 다미아, 제국의 그림자를 품은 하차니아 공작가의 영애를 뵙습니다.”
“피니아 리콘입니다. 공녀님께 늘 영광이 깃들길.”
로렐라인과 친분이 있는 듯 보이는 소녀들은 각각 다미아 백작과 리콘 남작의 영애들이었다.
‘아니, 얘네들은 아니야.’
“안넝. 니니라구 해.”
“꺄아. 귀여우셔라.”
좋다고 꺄악거리는 소녀들에게 대강 인사해 준 나는 빛줄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티테이블 쪽인 것 같은데.’
노란 빛줄기는 분명 후원 중앙에 자리 잡은 유리온실 앞에 펼쳐진 기다란 티테이블을 가리키고 있었다.
‘찾았다.’
빛줄기에 맞닿은 인형은 물빛의 로렐라인이라고 불리는 로렐과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다.
‘구휼원의 입회 기준이 미(美)였던가.’
나는 바닷가에서 마주쳤던 소년을 떠올리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꿀을 녹인 것처럼 진한 금발, 여름 잔디처럼 촉촉해 보이는 녹안이라….’
그런 인물이 원작에 등장했던가.
“안넝?”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콧잔등을 찡긋했다.
“이름이 모야?”
“안녕하세요,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 공녀님.”
내 물음에 소녀가 깍듯한 태도로 내게 인사를 올린다.
“저는 벨루치 브리넨이랍니다.”
‘벨루치?’
나는 의아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황.장>의 유일한 악녀의 이름이 벨루치이긴 했다.
‘하지만 벨루치가 미인이라는 묘사는 없었는데.’
뭐, 확인해 보면 되겠지.
나는 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양 꼿꼿하게 등을 세우고 앉아 있는 벨루치에게 도도도 달려 나갔다.
“베루띠.”
“?”
콕-
나는 영문을 모르는 소녀의 무릎에 눈이 아플 정도로 발광하는 원작을 살짝 가져다 댔다.
그제야 공중에 흩어졌던 빛무리들이 오망성의 꼭짓점에 모여든다.
* * *
◈
어둡고 습한 지하.
언뜻 보면 감옥이라고 착각할 만큼 낡은 방구석에 쪼그려 앉은 벨루치는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구휼제를 준비하느라 악단을 불렀구나.’
브리넨 후작은 구휼제에 참가할 수 있는 아이의 수를 제한했다.
귀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구휼원의 아이들을 내보내고 있긴 하지만, 아이 하나하나가 모두 그의 재산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여기서 나가려면 구휼제에서 내 유능함을 선보여야 해.”
열여섯.
그녀가 구휼원을 반드시 탈출해야만 하는 나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까.
“곱게 컸군.”
눈치가 빠른 벨루치는 브리넨 후작이 제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며 윗입술을 핥는 이유를 알았다.
“여기서 나가지 못하면, 내가 다음 대 ‘후작 부인’이 되어 버릴 거야.”
브리넨 후작가에서 후작 부인의 직함은 방을 장식하는 인형과 다를 바 없었다.
빛 한 줌 들지 않는 침실에 갇혀 그 어떤 외부와의 접촉도 허락되지 않을 테니까.
“절대, 절대 실수하면 안 돼.”
차라리 아름다움이란 껍데기를 불로 지져서라도 없애고 싶었다.
◈
* * *
구휼제에서 실수를 연발한 그녀가 결국 대귀족가의 메이드 자리를 놓치고, 후작에게 머리채가 잡혀 끌려가는 장면까지 빠르게 읽어 내린 나는 착잡한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트리스탄의 외전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은 묘사하지 않았는데, 이상하네.’
마치 책이 그녀의 미래를 바꿔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문장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는 이제 손님들을 맞이하러 가야 하니 비켜 주시겠어요?”
나는 긴장으로 잔뜩 굳은 벨루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보 물러났다.
‘그래, 뭐. 원작 책이 구해 달라는데 까짓것 구해 줘야지.’
미래의 후작 부인 빼 가, 병기 훔쳐 가, 구휼원의 아이들까지 탈출시키면 브리넨 후작이 뒤로 넘어가는 꼴이 아주 볼만할 것이다.
“움후후.”
이왕 구해 주는 거, 위기의 순간에 짜잔-! 하고 나타나서 영웅처럼 구해 줘야지.
벨루치는 <아.황.장>의 유일무이한 악녀였던 만큼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내 편으로 만들어 두기에 나쁘지 않지.’
“어머. 아가씨, 또 꼬마 악마처럼 웃으시네요.”
저택의 고용인들과 달리 솔직한 편인 셀리아가 내 음흉한 미소를 보고 과감하게 평가한다.
“내, 내가 언졔!”
나는 비죽 올라간 입꼬리를 애써 잡아 내리며 그녀의 손을 잡고 뒤뜰로 숨어들었다.
“쎄랴. 내가 부타칸 물건 다 가져와찌?” (셀리아, 내가 부탁한 물건 다 가져왔지?)
“네. 전부 챙겨 왔어요. 아, 먼지 담아 오는 걸 깜박했다.”
“아효. 그럴 줄 아라써.”
무희였던 셀리아는 하녀 일에 몹시 재주가 없는 편이었다.
“어쩌죠?”
나는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셀리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갠차나. 진흑 묻히면 대.”
나는 셀리아가 품에서 꺼낸 염색약을 치덕치덕 머리에 바른 다음 넝마를 기운 듯 조야한 후드를 걸쳐 입었다.
“실버블론드라 염색이 금방 되네요.”
셀리아가 거무죽죽하게 물든 내 머리칼을 손끝으로 쥐며 작게 중얼거린다.
“이거 금방 빠지는 거 맞죠? 전 아가씨 원래 머리칼이 좋아요.”
“몰라. 지굼 그론 게 중요해?”
“아니죠, 정신 차려야죠. 아가씨가 우리 아기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신다고 했으니까! 꺄아!”
나는 구름 위를 걷는 듯 방방 뜨는 셀리아의 어깨를 잡아 누른 다음 잔디밭을 데구르르 굴렀다.
‘갈색인 듯 검은색인 듯 어두운 머리칼에 조야한 후드 아래로 이목구비까지 감췄으니 내가 귀족가의 영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자, 이제 나를 구훌언에 버리러 가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라고 했다.
“…버린 거 아니에요, 아가씨.”
당차게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뒤따르며 셀리아가 작게 중얼거린다.
“웅?”
“맡긴 거예요. 다시 데려올 수 있다고 지배인이 약속했었단 말이에요. 100밤만 그를 위해 일해 주면, 아기와 함께 떠날 수 있게 해 준다고 해서….”
나는 셀리아의 주눅 든 목소리에 그녀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쎄랴, 아기 안 버린 거 아라.”
내 말에 셀리아가 울음을 참는 듯 옅은 숨을 헐떡인다.
“…미안. 니니가 말실수해써.”
나는 이유도 모르고 따끔따끔 아파 오는 가슴을 꾹 누르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우리 아기가 그렇게 생각하면 어떡하죠? 제가 아기를 버렸다고.”
“말해 주면 대지, 아니라구.”
어쩌면 내 엄마도 셀리아처럼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
‘뭐, 이번 생에는 나도 가족이 있으니까 괜찮지만.’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떠올리며 뺨을 긁었다.
“그렇겠죠? 아, 드디어 우리 아가를 다시 안아 볼 수 있어요!”
“웅!”
셀리아를 달래기 위해 희망차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녀의 주인이었던 남자가 아기를 데리고 들어갔다는 지하실 문 앞에 섰다.
끼익-
문에 달린 종을 울리자, 낡은 나무문이 삐거덕 움직인다.
“덴당.”
나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첫 계단부터 삐끗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