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그래서, ‘골드러쉬’를 부숴 버리셨다고요. 아르델 중앙부에 위치한 그 대형 도박장을 말씀이십니까.”
아르델 백작은 ‘딸이 납치되어서 어쩔 수 없이 도박장 건물을 날려 버렸다.’는 루카스의 성의 없는 설명에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오러로, 말씀이십니까. 단신으로 건물 한 채를…….”
“그래… 악! 그렇게 됐습니다.”
나는 놀란 아르델 백작의 말에 황족 특유의 시건방진 어투로 대답하려는 루카스의 허벅지를 테이블 아래로 보이지 않게 꼬집었다.
‘가스파르가 공작이긴 하지만, 아르델 백작 또한 작위 상관없이 5대 귀족에 속한 가문의 주인이라고.’
루카스가 아닌 가스파르라면 필시 공대를 했었을 것이다.
아빠는 하차니아에 속한 관할지를 가진 봉신 가문의 귀족들이 아니라면 무조건 공대를 했었으니까.
“어디 아프십니까?”
“아닙니다. 갑자기 다리가 저려서.”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른 루카스가 나를 원망하듯 돌아보면서도 천천히 말을 잇는다.
“어쨌든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르델 백. 건물 수리에 관해서는 공작가에 청구해도 좋습니다.”
‘어차피 자기 돈도 아니면서 생색은?’
나는 하차니아의 곤궁한 처지를 떠올리며 루카스의 호언장담에 눈썹을 꼼톨 움직였다.
“아닙니다. 공녀님이 납치를 당하셨는데 공께서 화가 나신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건물에 대한 보상은 받지 않겠습니다.”
다행히 백작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며 손까지 내저었다.
아직 아이에 불과한 내가 도박장에 끌려간 데다-나는 납치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아르델에서 노예 매매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까지 밝혀졌으니 우리에게 함부로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긴 했다.
“불법 노예 매매가 이뤄지는 도박장이라면 제가 나서서 처리했어야 하는 곳입니다. 공께서 귀찮은 일을 대신 해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뭐, 감사 인사는 됐습니다.”
나는 여전히 가스파르답지 않은 건방짐이 묻어나는 루카스의 대답에 땀을 삐질 흘리면서도 응접실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방에 약재가 가득한 걸 보아하니 백작 영애가 아픈 상태는 확실하구나.’
<아.황.장>에 아르델 백작 영애의 병이나 아이네스가 그녀를 치료한 방법 따위는 서술되었지만 시기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걱정했는데.
“후움.”
미리 계획한대로 내가 신호를 주자 루카스가 미적미적 입을 연다.
“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네. 공녀님보다는 다섯 살 많은 딸아이가 한 명 있습니다.”
나는 백작의 대답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작은 두 손을 맞잡았다.
“니니! 언니랑 놀구 시퍼요!”
“그러신가요. 그럼 모처럼 아르델에 놀러 오셨으니 제 딸아이를 소개해드릴까요?”
내 천진한 얼굴이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히 오늘은 로렐라인의 상태가 좋아서 공녀님과 말동무를 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백작의 씁쓸한 미소에 그를 단순히 돈줄이라고만 생각했던 마음이 콕콕 쑤셔 오기 시작한다.
‘이럴 때 기분이 이상하다니까.’
단순히 원작에서 한 줄로만 쓰여 있던 인물들이 실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현실이 와닿을 때.
“로렐, 이리 와서 공작님과 공녀님께 인사드리렴.”
“로렐라인 아르델입니다. 안녕하세요.”
백작의 부름에 나붓한 목소리로 대답한 소녀의 모습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쁘긴 정말 예쁘네.’
청순가련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빚은 것만 같은 소녀는 후에 ‘물빛의 로렐라인’이라는 칭호를 황제에게 하사받을 정도로 대단한 술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녀의 병명은 ‘마나 폭주.’
‘타고난 물의 마나가 너무 거칠어서 몸이 아프게 된 만큼, 마나의 파동이 그만큼 대단한 사람인 거지.’
“안넝.”
내가 소시지처럼 짧은 손가락을 움직여 인사하자 로렐라인이 가냘픈 눈매를 접으며 웃는다.
“후후. 네, 정말 귀여운 공녀님이시네요. 저랑 정원이라도 산책하시겠어요? 오늘은 날이 정말 맑아요.”
물빛 머리카락, 하늘보다는 바다의 푸르름을 담은 로렐라인의 눈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하얀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엉니. 어디 아포?”
정원으로 걸어나가는 그녀를 뽀짝뽀짝 따라간 나는 하녀들이 다과를 준비하는 동안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오늘은 괜찮은 편인데, 많이 티가 나나요?”
“마니 아포?”
로렐라인이 내 물음에 걱정스레 대답한다.
“죄송해요. 공녀님까지 절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웅?”
“전 늘 아프니까요. 오늘은 공녀님과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까 봐 걱정이네요.”
나는 실가닥처럼 가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멀 그런 걸 거쩡해.”
‘레오노라’보다 다섯 살 많았으니 로렐라인의 나이는 고작 여덟 살.
몸이 아프다고 짜증내며 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애기는 그런 거 걱정하는 고 아냐.”
나는 그녀의 흰 이마를 작은 손으로 꾹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프면 우러야지.”
“…….”
“떼도 쓰구.”
내 말에 로렐라인의 표정이 묘해진다.
“아기답지 않은 말을 하는 건 공녀님이신 것 같은데요.”
나는 그녀의 말에 방긋 웃으며 다과가 준비된 가제보로 쫄랑쫄랑 걸어 나갔다.
“까까!”
로렐라인은 내가 부러 아이처럼 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지만, 말하지 않고 얌전히 건너편에 앉아 주었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물의 술사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랜만에 평화롭네.’
안온하다.
이런 티타임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싶을 만큼 좋았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내가 요즘 얼마나 정신없고 바쁘게 지내는지를 절실히 깨닫고 말았다.
내가 환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세계가 <아.황.장>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고, 가스파르의 몸에 루카스가 가끔 빙의된다는 것까지.
시한부 몸으로 살아남고 공작가까지 지키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정말.
“아효…….”
“왜요, 공녀님?”
“사눈 게 이런 곤가 시퍼, 지짜.”
푸흣.
내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로렐라인이 까르르, 듣기 좋은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요? 사는 게 힘드세요?”
“우웅. 엉니만큼은 아니게찌만….”
나는 산들바람에도 콜록콜록 간헐적인 기침을 터뜨리는 로렐라인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원래 상황을 지켜보면서 치료 방법을 알려 줄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다.
어린애가 아파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는 건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엉니, 사시른 내가…….”
“아가씨, 브리넨 후작님이 오셨어요.”
로렐라인이 앓고 있는 마나 폭주의 치료법을 입 밖으로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티테이블 위로 길게 지는 그림자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이구나, 로렐라인. 몸은 좀 괜찮니.”
다정하게 로렐라인의 안부를 묻는 회색 머리의 남자는 흐릿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브리넨 후작.
하녀가 그를 지칭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구휼원의 주인.’
브리넨 후작은 명실공히 <아.황.장> 최악의 악역이었다.
그것도 멋있는 흑막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비열하고 토 나오는 악당.
그는 갈 곳 없는 어린아이들을 보살핀다는 핑계로 고아들을 실험실에 가둬 놓은 채 마나석과 오러석을 추출해 내다 파는 파렴치한이었으니까.
‘내 양부 같은 놈이었지.’
그딴 쓰레기를 아버지라 믿고 따르며 생체 실험을 당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니 소매 아래로 감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온다.
‘브리넨 후작이 아르델에는 무슨 일이지?’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로렐라인에게 악수를 청하는 그를 째릿 노려보았다.
“이 귀여운 꼬마 아가씨는 누구인지요?”
“하차니아의 공녀님이세요.”
“아! 그 써머나이츠의 자질을 보이신다는!”
로렐라인의 소개를 듣자마자 그는 손뼉을 치며 내 오러 속성에 대해 언급했다.
“써머나이츠들의 오러석은 정말 아름답지요. 타오르는 불을 머금은 듯한….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공녀님?”
“……녜?”
“공녀님의 오러석이요. 분명 아름다울 텐데요.”
“시러요.”
나를 바라보는 후작의 시선에 담긴 탐욕에 나는 몸을 뒤로 빼며 테이블 아래로 로렐라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내가 잔뜩 겁을 먹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로렐라인이 후후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렇게 겁먹지 마세요, 공녀님. 오러나 마나를 조금씩 추출하는 건 건강에 좋으니까요. 아프지도 않아요.”
“……머?”
“저는 몸이 너무 약해서 어릴 때부터 마나 추출을 해 왔어요. 제 마나의 파동이 너무 거센 탓에 몸이 아픈 거라서요.”
물론 로렐라인의 건강이 나쁜 탓은 마나 폭주 때문이 맞았다.
‘하지만 마나 폭주에 마나석을 추출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금시초문이다.
아니, 아예 엉터리였다.
‘원작에서 아이네스는 로렐라인의 그릇을 넓히는 방향으로 병을 치료했어.’
마나를 담을 수 있는 몸의 그릇은 제각기 달랐고, 마나 폭주는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너무 작을 때 생기는 증상이었다.
‘마법사에게서 마나석을 추출하면 그냥 생명력을 빼앗을 뿐일 텐데?’
로렐라인의 설명에 인상을 찡그린 나는 브리넨 후작의 음흉한 미소에 그의 속내를 간파할 수 있었다.
‘이 자식, 치료를 핑계로 로렐라인의 강력한 마나를 추출해 가고 있었구나!’
“때찌!!!”
테이블 위에 폴짝 뛰어 올라간 나는 브리넨 후작의 머리채를 덥석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