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악!!!”
내가 토끼 앞니처럼 뾰족한 이빨로 콱 깨문 사람의 다리는 지배인의 것도, 오늘 또 한 판 하고 갈 수 있겠다며 쾌재를 부르는 바리스탄의 것도 아니었다.
‘미안!’
나는 최면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트리스탄의 종아리를 개처럼 물어뜯었다.
“지금, 이게 무슨… 스승님?”
나는 소파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다 투명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트리스탄이 발작하며 깨어난 이유를 알지 못했다.
“트, 트리스탄.”
바리스탄은 갑작스레 최면에서 깨어난 트리스탄이 당황스럽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당신은 뭐야.”
제 이마에 붙어 있던 추출기를 떼어 낸 트리스탄은 기계의 끝을 붙들고 있는 지배인을 향해 날카로운 눈매를 치켜세웠다.
“지금 내게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지.”
“이런. 저는 솔로아의 도련님께 어떤 대답을 드려야 하는 걸까요?”
지배인은 트리스탄에게 대답하는 대신 난감한 얼굴로 바리스탄을 돌아보았다.
“최면을 다시 걸어 주실런지요?”
“불가능하네. 난 마법은 쓸 줄 모르거든.”
다행히 트리스탄에게 최면 마법을 건 사람은 바리스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공범이 있다는 뜻이구나.’
지배인과 바리스탄의 유착 관계를 봤을 때, 트리스탄의 오러는 한두 번 뽑힌 게 아닌 것 같았다.
“제게 최면을 거셨던 겁니까? 명상요법으로 오러를 다스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어허. 최면이나 명상이나, 다 비슷하다는 걸 아직도 모르느냐. 아둔해도 정도가 있지!”
나는 혀를 끌끌 차며 트리스탄을 나무라는 바리스탄의 작태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저 기계는 오러추출기가 아닙니까.”
“불순한 오러를 뽑아내면 기운이 맑아져 더 효율적으로 오러소드를 다루게 되는 법이다.”
멍멍.
바리스탄의 변명은 누가 들어도 개소리다.
‘그렇게 좋은 방법이면 왜 최면까지 건 상태로 오러를 추출하는데?’
그의 말이 미덥지 않은 건 트리스탄도 마찬가지였는지, 소년은 와락 인상을 찡그리며 오러 추출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제 오러석을 확인했다.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순도 높은 오러석입니다.”
“지금 내 말을 의심하는 거냐? 네 스승인 나의 말을?!”
“…….”
“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싶으면 믿음을 가지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주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건 네 고질적인 문제다, 트리스탄!”
아니, 뭐 믿을 만한 인간이어야 믿지 않겠는가.
나는 바리스탄이 짖는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트리스탄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새하얗게 굳어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네가 그렇게 사람을 믿지 못하니 네 어미도 널 버리고 떠난 거다. 잊었느냐?”
나는 바리스탄의 지독한 말에 그제야 원작 남주인 트리스탄의 배경을 떠올릴 수 있었다.
‘트리스탄의 어머니가 외도를 저질렀다 매도를 받아 공작가에서 내쫓겼었지.’
물론 그녀가 질려 다른 여자를 공작 부인 자리에 앉히고 싶었던 공작의 모함이었다.
트리스탄은 공작과 가신들의 모함에 맞서 그녀를 지키지 못한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
‘일말의 의심 때문이었을 거야.’
혹시나 자신의 어머니가 정말로 자신을 버리는 선택을 했을까 봐.
그는 너무 어렸고, 아버지인 공작은 강압적인데다 그의 어머니는 몹시 유약해 강력히 제 결백을 주장하지도 못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나중에 아이네스가 트리스탄의 어머니를 뒤늦게 찾아서 화해까지 시켜 줬던 것 같은데….’
그녀가 찾아주지 못한다면 나라도 나서서 찾아줘야 하나 순간적으로 고민한 나는 아차 싶어 동그란 이마를 내려쳤다.
‘아직 우리 엄마도 못 찾았는데….’
아니, 헤어진 가족 찾는 프로그램이야 뭐야.
찾아 줄 어머니가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왜 로판 남주들은 하나같이 다 엄마를 잃어버리고 난리람.’
“또다시 누군가가 네 어미처럼 널 버리지 않길 바란다면, 주변 사람을 조금 더 믿도록 해라.”
“……네. 스승님.”
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바리스탄의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는 트리스탄의 모습에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최면이 아직 덜 깬 건지, 아니면 바리스탄이 평소 트리스탄을 너무 잘 세뇌해 놓은 건지 모르겠네.’
“자. 다시 추출을 시작하게.”
“그래도 될까요, 공자님?”
“된대도. 어서!”
바리스탄의 명령에 지배인이 우물쭈물 몸을 움직인다.
나는 괴상한 황동 빨대가 다시금 트리스탄의 몸에 닿기 전에 서둘러 마도구를 재생시켰다.
“내가 괜히 이 녀석을 데려온 게 아니라고. 오러석 네 개는 이 자리에서 추출할 기회를 주겠네. 신선한 오러를 뽑아낼 기회니 값은 열 배는 더 쳐주겠지.”
“신선한 오러를 뽑아낼 기회니 값은 열 배는 더 쳐주겠지.”
“열 배는 더.”
트리스탄의 오러를 팔아 돈을 벌겠다는 심보가 그득한 부분이 특히 중요했기에 반복 재생까지.
‘움후후. 완벽해.’
“뭐야.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야?!”
당황한 바리스탄이 경악을 내지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소파 밖으로 마도구를 데구르르 굴린 나는 혹시나 사람들이 소파 밑을 들춰 볼까 재빨리 몸을 움직여 벽에 달라붙었다.
“통신용 마도구에서 나오는 소리군요.”
제 앞으로 또르르 굴러온 마도구를 집어든 트리스탄이 잘생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소년이 움직일 때마다 와인처럼 감미로운 적발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는 마치 투명 망토로 몸을 감춘 내가 보이는 것처럼 빛을 받아 샛노랗게 빛나는 금안으로 내 쪽을 힐끗했다.
“트리스탄, 네가 나를 의심해 감히 이 따위 허접한 아티팩트를 들고 다니다니!”
최면 마법의 기운이 이제야 다 가신 건지, 차분한 태도로 상황을 살피기 시작한 트리스탄의 어깨를 잔뜩 흥분한 바리스탄이 우악스레 움켜잡는다.
“제 오러를 추출해 돈을 받고 파신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솔로아 직계인 저의 오러를 말입니다.”
마도구가 조작되었던 거라고 박박 우기면 될 걸, 너무 흥분한 바리스탄은 제 잘못을 실토하고 말았다.
“다, 다 너 잘되라고 한 일이다.”
바리스탄의 긍정에 트리스탄은 짧은 한숨을 내쉰 다음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각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 과연 스승님께서 목을 보전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트리스탄, 일단 진정하고-”
나가려는 소년의 팔목을 붙잡은 바리스탄이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내 설명을 좀 들어 봐 주렴.”
“재판에서 듣겠습니다.”
하지만 냉정을 찾은 트리스탄은 그를 뿌리칠 뿐이었다.
“젠장!”
복도 너머로 트리스탄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바리스탄은 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파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아직까지 소파 아래에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나는 두 동강 난 소파의 처참한 모습에 잔뜩 숨을 죽였다.
‘이제 어떻게 빠져나가지?’
고민하는데, 지배인이 내 코앞까지 다가와 오러석 상자를 집어 들었다.
“아이고, 바리스탄 경.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게 왜 소공작님 오러까지 손을 대셔서는.”
이 상황에 챙길 건 챙기겠다는 건가.
과연 노예까지 부려 가며 범법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범죄의 온상다운 여유였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지배인은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어가며 바리스탄을 비난했다.
“쯔쯔. 저는 솔로아 방계들의 오러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욕심이 과하셨습니다.”
“입 닥쳐!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벌인 도박판 때문이라고!”
“경이 도박에 빠져 빚을 지신 게 왜 저 때문입니까?”
지배인의 날카로운 질문에 할 말을 잃은 바리스탄이 입을 꾹 다문다.
“자, 이건 오늘 즐기실 게임 참가비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제가 특별히 쏘겠습니다.”
그에게 자비라도 베풀 듯 금괴를 탁자 위에 하나 얹은 지배인은 나와 제법 가까운 거리에 서 있던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셀리아, 가자.”
“네.”
지배인의 손짓에 얌전히 서 있던 여자가 움직이다 곧 멈춰 서서 내가 서 있는 방향을 돌아본다.
“……음? 저게 뭐지?”
‘왜 저래?’
여자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닌지, 지배인은 우뚝 멈춰선 무희의 팔을 붙들었다.
“왜? 뭘 보는 거야?”
“발이요.”
“발? 무슨 발?”
“저기 아기 발이 있어서요. 너무 귀엽다. 발…….”
나는 셀리아의 폭탄 발언에 화들짝 놀라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 바람이 분 거지?’
셀리아라는 노예가 가리킨 방향에는 망토 밖으로 삐죽 튀어나간 내 앙증맞게 작은 두발이 있었다.
‘심지어 마담이 특별 제작한 신발이라 반짝거리기까지 하잖아!’
아기가 신기 좋게 제작된 은색 구두는 진주알이 박혀 노란 도박장의 불빛에도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바리스탄과 지배인의 시선이 쏠리기 전에 쏙 집어넣어 보았지만, 이미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바리스탄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아, 안넝하세오.”
바리스탄의 손에 달랑 들린 나는 이제 소용없어진 투명 망토를 애써 여미며 말을 이었다.
“니니라구 해. 니니 해치지마세요. 니니 암것두 몰라.”
그런다고 안 해치겠냐.
바리스탄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손가락을 옴질거리며 최대한 귀여운 포즈를 취한 나는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바리스탄의 얼굴에 아효효, 한숨을 내쉬었다.
“죠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