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하여간 대단한 능력자긴 하네.’
나는 가스파르의 검은 오러를 마치 제 것인 양 사용하는 루카스의 모습에 입을 헤 벌렸다.
속성을 자각한 오러는 고유의 특성이 있어서 다뤄 보지 않은 사람이 사용하기 쉽지 않을 텐데, 루카스는 쉐도우나이츠의 그림자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저런 사람을 두고 전설의 소울마스터라고 하는 건가.’
저런 힘을 갖춘 사람이 어떻게 그레고르와의 황위 다툼에서 패했던 걸까.
“커억-!”
그의 검붉은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록, 가르덴 수장을 조이는 그림자의 색이 짙어졌다.
‘가스파르’의 거친 모습을 처음 마주하는 원로들은 새하얗게 질린 채 저마다 경악한 탄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가, 각하!”
여태 원로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던 헨리마저도 깜짝 놀라 앞으로 튀어나온다.
“각하, 이만 진정하세요!”
“닥쳐.”
부관의 만류에도 루카스는 숨이 거의 넘어갈 지경에 이른 가르덴 백작을 놓아주지 않았다.
‘저러다 진짜 사람 죽이겠어.’
“아효.”
나는 별 수 없이 하녀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린 다음 루카스의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반니.”
포동포동한 두 팔이 제 다리를 감싸 안는 감각정도는 느낄 정신머리가 남아있었는지, 루카스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백잔미, 뇬서해조.” (백작님, 용서해 줘.)
“…….”
“공자까 생각하느라 그런 고에요.” (공작가 생각하느라 그런 거예요.)
물론 나는 루카스가 가르덴을 공격하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제 말에 반박하는 아랫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겠지.’
황자로 태어나 황태자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었으니, 자신을 가스파르라고 생각하는 가르덴 백작의 불복종에 눈이 돌아 버린 것이다.
하긴, 하극상이 열 받긴 한다.
‘까라면 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입을 열었다.
“아반니, 진정해.”
지금 여기서 사고를 쳐 버리면 너랑 나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런 의미를 진득하게 담은 눈빛을 쏘아붙이자 루카스는 천천히 가르덴 수장을 놓아주었다.
“흐악!”
아니, 바닥에 내팽개쳤다.
“오늘 회의는 파하겠다. 다들 꺼지도록.”
루카스가 제 손목에 툭 튀어나온 뼈를 문지르며 차갑게 내뱉자, 사람들이 허둥지둥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내게 고갯짓으로 감사를 표시하며 퇴장하는 가르덴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가르덴 가문은 빚이든 은혜든 꼭 갚는다는 주의였지.’
게다가 가르덴 백작은 공작가를 섬기는 봉신 가문의 모임인 원로회의 수장이었다.
‘원로들 중에서 가장 입김이 센 대원로라는 말이지.’
당장 써먹을 곳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내 사람으로 만들어 두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움후후.
‘어쩔 수 없이 도와준 거긴 하지만 구해 주길 잘했어.’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카스는 나를 대롱대롱 다리에 매단 채 느긋하게 몸을 움직였다.
“각하,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평정을 잃으셨습니다.”
‘가스파르’의 평소답지 않은 과격한 행동에 당황한 헨리만이 회의실에 남아 어물어물 입을 열었지만, 루카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뿐이었다.
“가르덴이 선을 넘긴 했지만, 그가 원로회의 수장인 걸 잊으셨습니까.”
“뭐 어쩌라는 말이지.”
“봉신 가문들이 힘을 모아 각하께 압력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버러지 새끼들이 움직여 봤자, 악!”
나는 헨리의 말에 자꾸 ‘가스파르’답지 않게 반박하는 루카스의 다리를 콱 깨물었다.
이를 악문 루카스가 재빨리 나를 안아 올린다.
“무슨 짓이야.”
“헨니. 나 아반니랑 얘기 나눌 시간 피료해.”
나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루카스의 시선을 피하며 헨리에게 짧게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내게 생각이 있으리라 믿는다는 듯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헨리가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미찐 고야?!” (미친 거야?)
그제야 나는 루카스의 무릎 위에 발딱 올라서며 목청을 높였다.
“저녀 압빠 같지 안아짜나!!!” (전혀 아빠 같지 않았잖아!!!)
“공작이 그 정도로 머저리인 줄은 몰랐군.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가신을 내버려 둘 정도였나.”
“가쯔파르는 다정하구 조은 사라미니까.” (가스파르는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니까.)
나는 가스파르를 비하하는 루카스의 발언에 와락 인상을 찡그리며 눈꼬리를 세웠다.
“함부로 사람 안 때료. 너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구!” (함부로 사람 안 때려. 너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구!)
내 세찬 시선에 얻어맞은 루카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제 턱을 긁는다.
“튀지, 뭐.”
“…….”
“그레고르야 황성에 쳐들어가 직접 목을 따면 된다. 어차피 공작이 제 몸에서 나가라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고.”
‘아빠가 루카스를 몸에서 내보내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했구나.’
“네게서 내 마나나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루카스의 격식 없는 계획에 내 작은 어깨를 바싹 끌어안았다.
“마나 안 빌려주꼬야.” (마나 안 빌려줄 거야.)
“너 같은 솜뭉치에게 마나를 빼앗는 일이 내게 어려울 것 같나.”
“이익.”
왜 하필이면 상대가 대마법사여서는!
아이네스가 어서 기연을 만나 갖가지 마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그럼 나도 이 자식에게서 내 마나를 보호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을 텐데.’
“그레고르 주기면, 누가 어떠케 너를 압빠 몸에 너언는지 발킬 수 업서.” (그레고르 죽이면, 누가 어떻게 너를 아빠 몸에 넣었는지 밝힐 수 없어.)
“흐음.”
“내가 도와준다구 했자나. 쫌 참아 바!”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 쫌 참아 봐!)
루카스의 무심한 호응에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손에 쥔다.
“이렇게 보니 좀 닮았나.”
“웅?”
“됐다. 그나저나 왜 둘이 있을 때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거지?”
그야 내 아빠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으니까.
“불러조?”
나는 루카스의 뜬금없는 물음에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고개를 기울였다.
‘설마 내가 아빠, 아빠거리는 게 좋았나?’
세상 애라는 애는 다 싫어하게 생겨 놓고-물론 얼굴은 가스파르의 것이었지만- 사실 애를 좋아하는 걸까.
“됐다. 공작만 네 아빠라고 생각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뭣 하러.”
나는 루카스가 설마 내게 섭섭함을 느낄까 싶었지만, 실험하는 의미에서 조심스레 입을 움직였다.
“아반니.”
“…….”
“아반니?”
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아버지란 말을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루카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바위로 만든 조각에 가까워져 갔다.
‘역시 싫으니까 부르지 말라고 물어본 거구나.’
나는 그의 냉랭한 반응에 어깨를 으쓱하고 말아버렸다.
“그로케 안 부르께, 니니 넘 시러하지 마.”
야무지게 말한 다음 루카스의 무릎에서 내려와 총총 걷는 내 등 뒤로 모호한 시선이 꽂힌다.
* * *
루카스 윌레닌.
현 황제 그레고르의 배다른 형이자 마탑의 주인,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형 마법사.
방에 돌아와 원작책을 펼쳐 든 나는 루카스 윌레닌이 가볍게 언급되는 부분을 찾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내가 가스파르의 몸 안에 존재하는 그의 영혼을 자각하자마자 책에 부록처럼 생긴 등장인물 목록이었다.
‘그래, 내 기억이 맞는다면 원작에는 제대로 등장조차 하지 않는 인물인 거야.’
레오노라는 분명 엑스트라에 불과할 텐데, 꽤나 복잡한 사연이 있는 조연인 모양이었다.
“빙의를 해두 하필이면 이 몸에 해소…….”
트리스탄의 붉은 기운을 흡수한 오망성의 꼭짓점을 꾹꾹 눌러 보던 나는 방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허둥지둥 책을 끌어안고 이불로 몸을 휘감았다.
“아가씨-! 에고, 주무시네.”
“오늘은 그만 주무시게 두는 게 낫지 않을까. 많이 피곤하셨을 거야.”
나를 씻기기 위해 방에 들어온 듯한 룰루와 랄라가 가까이 다가와 내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는다.
나는 그녀들의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촘촘한 속눈썹을 움찔했다.
“가여운 아가씨. 오늘 회의 때 원로들의 말에 상처라도 받으셨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각하께서 나서서 아가씨를 괴롭히려던 가르덴 백작님을 혼쭐을 내 주셨다며?”
“그건 조금 의외였지. 늘 가신과 사용인들에게 과할 정도로 자비로우신 분이신데. 그나저나 걱정이야.”
“뭐가?”
나는 룰루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아가씨를 황궁으로 보내지 않았다고 폐하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이야. 공작가에 하사했던 땅과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대.”
“뭐? 전쟁에서의 공을 인정해서 하사하셨던 거잖아!”
“그때 서류상의 오류가 있어서 재분배를 한다나 뭐라나, 그런 핑계를 대나 봐.”
쪼잔한 놈.
그런 간장종지만 한 그릇으로 어떻게 제국을 통치하겠다는 건지!
나는 분기탱천해 이불 속에 숨긴 작은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룰루의 말에 화가 난 건 나뿐만이 아닌지, 랄라가 버럭 목소리를 높인다.
“그게 말이 돼? 가뜩이나 공작가 사정 안 좋은 거 뻔히 알면서!”
“그러니까 일부러 더 압박을 넣으시는 거지. 지금 공작가가 재정난인 걸 알고.”
“세상에. 걱정이네…. 우리 아가씨 어떡하지?”
나는 울먹이는 랄라의 목소리에 덩달아 울고 싶어졌다.
나, 금수저 아니었구나.
내가 아무리 비싼 접시를 깨먹어도 룰루와 랄라가 아무렇지 않게 굴기에 나는 우리집이 부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래도 노엘의 함선이 난파당한 여파가 큰 모양이지.’
그녀의 함선을 따라 출항한 배들의 대부분은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상단의 것이었으니까. 가득 실은 물자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손해액이 어마어마했으리라.
그나마 상단주가 노엘이어서 다행이었다.
‘배가 가라앉을 경우에는 손해액을 거래처와 반반 지겠다는 계약을 하고 떠났다지.’
계획한 출항도 아니었는데, 세상에 어떤 바보 상단주가 그 손해를 전부 떠안겠는가.
가볍게 안도했던 나는 이어지는 룰루의 말에 입안을 콱 깨물었다.
“각하께서 이아론 후작가가 빚을 지게 하지 않으려고 손해를 전부 떠안지만 않으셨어도…….”
이 호구 아빠가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