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누군가에게 예쁨을 받아 본 기억이 있어야 아양을 떨 텐데, 사실 나는 레오노라로 살면서도 실비는 물론 아빠에게도 일부러 애교를 부려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기인 건 맞지만, 그래도 낯간지럽단 말이지.’
나는 무뚝뚝함을 넘어서 냉기가 뚝뚝 흐르는 실베스테르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옆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안 도아주꼬야?”
둘째가 에녹의 훈련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빨리 다른 해결책을 찾아봐야 했다.
‘포기는 신속하게.’
암, 암.
혼자서 에녹을 도와줄 만한 다른 윈터나이츠를 떠올린 나는 대답이 없는 실베스테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라또. 그럼 니니 에노끄랑 쪼기 갈게~?”
“어. 형 없이도 하려고……?”
“당욘하지!”
‘이 자식이 진짜 빠져 가지고!’
실베스테르가 훈련을 도와주지 않으면 연습을 그만해도 된다고 생각한 건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에녹의 뒷덜미를 잡기 위해 내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는 찰나,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된다는 건데.”
기척도 없이 에녹과 나를 뒤따라온 실베스테르가 넌지시 입을 연다.
“……웅?”
“말이나 해 보든지.”
나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입을 여는 실베스테르의 옆모습에 헛웃음을 삼켰다.
‘……역시 둘째도 아직 애는 애구나.’
에녹에 비해 어른스러울 뿐이지, 실베스테르도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다.
‘하긴, 하차니아의 아이들은 나와 달리 인간 병기처럼 취급당하며 자라진 않았으니까.’
나는 나와 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숨긴 채-눈에 훤히 다보였지만- 발등으로 땅바닥을 툭툭 두드리는 실비를 향해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어 보였다.
“고마오, 시삐.”
* * *
놀이를 가장한 실베스테르와 에녹의 오러 강화 훈련이 시작된 지 어언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가씨, 아가씨!”
“우움.”
나는 호들갑스러운 룰루와 랄라의 목소리에 깃털이 잔뜩 들어가 포근한 이불 속에서 반쯤 눈을 떴다.
“니니 일어나야대?”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조금 이른 감이 있어서 내가 잠긴 목소리로 묻자, 룰루는 대답을 하는 대신 촘촘한 속눈썹에 묻은 내 눈곱을 떼 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고, 우리 아가씨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울까, 룰루.”
“내 생각엔 우리를 아주 조금 닮으신 것 같기도 해. 사랑하면 닮는다잖아, 랄라.”
아주 둘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는구먼.
룰루가 내 통통한 팔사이로 손을 넣어 나를 일으키자, 랄라가 바로 따끈한 물수건을 가져와 얼굴을 닦아 준다.
“아직 졸리시죠? 하지만 오늘은 대원로 회의가 하차니아에서 열려서 일찍부터 준비를 하셔야 해요.”
‘대원로 회의는 황성에서 진행하는 게 아니었나.’
내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대원로 회의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룰루가 서둘러 말을 덧붙인다.
“솔로아 공작가와 하차니아 공작가를 포함한 5대 귀족 가문의 가주와 원로들이 모여서 하는 정례 회의예요, 아가씨.”
“니니두 가?”
‘설마 내 출생에 관련된 회의인 건가?’
“네.”
내 물음에 랄라가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가씨가 가서, 재수 없는 원로들의 콧대를 콱 눌러 주셔야 해요.”
아기한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거 아닌가.
“우움…….”
나는 랄라의 말에 떨떠름히 작은 턱을 긁적였다.
윌레닌의 개국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5대 귀족은 서로 팽팽하게 권력을 유지하고 있어 사이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사용인들끼리도 이렇게 경쟁할 정도였던 걸까.
“아르델 백작가의 막내 아가씨가 작년 정례 회의부터 참석하셨는데, 그쪽 사용인들이 지네 아가씨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며 주접을 떨어서 얼마나 재수가 없었는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룰루. 난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속 좋은 랄라가 밤잠을 설칠 정도로 열이 받은 걸까.
나는 원작 내에서 하차니아와 아르델이 어떤 관계였는지 떠올리며 랄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 아가씨는 가주님을 닮았으면 예쁘면 예뻤지 귀엽진 않을 거랬나?”
“미친 소리지!”
‘별말도 아니었네, 뭘…….’
싶었지만, 룰루와 랄라는 자기네들이 큰 모욕이라도 받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며 내가 입을 옷을 세심하게 골라 주었다.
“아가씨는 무슨 색을 입혀도 다 잘 어울리시지만, 오늘은 날씨가 맑으니 하늘색 원피스가 좋겠어요.”
내 머리를 양 갈래로 묶어 준 랄라가 기분 좋게 내 이마를 쓰다듬는다.
“우웅.”
나는 기본적으로 치장에 관심이 없어서 룰루와 랄라가 내게 뭘 입히든 상관없었지만, 뽀짝한 레이스 양말까지 갖춰 신으니 내가 봐도 내 모습이 조금 귀엽기는 했다.
‘원로들이 좋아하겠네.’
가스파르가 나를 황궁으로 보내는 걸 완강히 거부한 덕에 내가 사생아라는 설도 조금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거울 속에서 새초롬한 연보라색 눈을 깜빡이는 아이를 마주한 채 어깨를 으쓱했다.
하차니아는 얼음 속성의 윈터나이츠를 주로 배출하는, 대대로 여아가 귀한 가문이라 레오노라, 즉 나는 몇 대만에 태어난 귀한 공녀님이었으니까.
‘그래 봤자 자기들 이득을 위해서는 언제든 직계인 우리를 배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하차니아의 몰락은 황제의 탄압이나 다른 가문들의 견제도 견제였지만, 내부 분열의 문제도 있었다.
나는 가스파르의 반역이 실패하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직계와 연을 끊은 방계의 가문들을 생각하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손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가문이란 말이지.’
살겠다고 결심했고, 하차니아의 몰락을 막아 보겠다고 각오를 다졌으니 앞으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가쟈, 눈누.”
나는 크림빵 같은 손으로 비장하게 주먹을 쥔 다음 흥, 콧김을 뿜었다.
“니니, 준비 다 해써.”
“네, 아가씨!”
그런 내가 대견하다는 듯 흐뭇하게 웃은 룰루가 내 손을 붙든다.
* * *
“오셨군요.”
의기양양한 태도로 나와 룰루랄라가 회의장에 당도하자, 가장 먼저 나를 알은체한 것은 하차니아의 수석 행정관인 헨리였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레오노라 아가씨.”
가족들에게는 항상 리니라고 불려서 내 진짜 이름을 귀로 듣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다른 가문의 사람들을 신경 쓰는 모양이네.’
나는 잘 차려입다 못해 반질반질 윤이 나는 헨리의 구두코를 흘깃하며 그가 안내해 주는 의자에 폴짝 올라탔다.
“리니, 오늘 엄청 귀엽네!”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에녹이 양 갈래로 묶은 내 머리의 리본을 잡아당기며 씨익 웃는다.
“에노끄도 예뽀.”
에녹은 실베스테르와 달리 헐렁한 셔츠나 걸치고 다녀서 평민 아이들과 구분이 안 가는 차림이었는데, 오늘은 새까만 보타이까지 하고 있었다.
“훗. 당연하지. 왜 내가 다른 가문 놈들 보라고 때 빼고 광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에녹의 볼멘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아빠랑 실비는 도착하지 않은 것 같네.’
이제 막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인지 회의장은 내 생각보다 더 어수선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의 얼굴을 눈으로 느긋하게 훑으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어디, 나보다 더 귀여운 아기가 누가 있나 봐야지.’
룰루와 랄라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긴 했지만, 내심 아르델 백작가의 사람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아기가 보고 싶긴 했다.
‘음? 없는데?’
나보다 귀여운 아기는 물론이고, 에녹 또래의 아이들만 몇 명 눈에 띌 뿐 내 또래 아기는 보이지도 않았다.
“아르델 백작 영애는 오늘 참석하지 않으신다고요?”
“네. 안타깝게도 오늘 컨디션이 조금 좋지 못하셔서.”
나는 내 맞은편의 원로 둘이 속삭이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저 금발은 하차니아의 원로이고, 상대는 가슴팍에 새겨진 꽃문양을 보아 하니 아르델의 원로인 것 같은데.’
“저런. 어디가 안 좋으신 건가요?”
아르델 측 원로의 말에 하차니아의 원로가 염려스럽다는 듯 미간을 모은다.
“아무래도 아가씨가 물 속성의 마법사 자질을 타고난 분이시다 보니,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허약하시긴 합니다.”
“큰일이군요. 안 그래도 5대 가문에 부족한 귀한 재능을 지닌 분인데, 부디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하차니아 원로의 점잖은 위로에 갑작스레 턱을 치켜든 아르델 원로가 오만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셔야죠. 그래도 몸만 튼튼하고 재능은 없는 것보다는 다행이지 않겠습니까.”
‘……?’
설마 날 보고 하는 소리인가?
기가 막혀 눈을 동그랗게 뜨니, 나와 눈이 마주친 아르델의 원로가 의기양양하게 콧대를 높인다.
‘설마 했는데 날 보고 하는 말이 맞았구나.’
“지금 감히 누굴 겨냥해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하차니아의 원로도 그의 말에 크게 기분이 상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항의했지만, 그의 반응보다 내 주먹이 더 빨랐다.
“크억!!!”
아빠에게 보여 줬던 대로 불 속성의 오러를 응축한 나는 감히 공작가의 공녀인 나를 무시하며 으스 댄 원로 놈의 콧대를 향해 오러로 만든 구(球)를 던져 버렸다.
“아, 아가씨!”
놀란 룰루의 비명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 뿐이었다.
‘하차니아는 참지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