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바리스탄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재빨리 방으로 들어온 나는 거대한 멀바우 침대 아래 숨겨 놓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내 고유의 마나를 흘려보내야 잠금장치가 풀리는 아티팩트였지.’
사람이 가지고 태어난 고유 마나의 파동은 지문과 같았으니까, 결국 이 상자는 나만이 열 수 있는 작은 금고인 셈이었다.
‘원작에 등장했던 ‘그 상자’라면 허점이 있긴 하지만.’
마나 외에도 푸는 방법이 존재하는 부실한 금고라고 해도, 세 살배기 아기에겐 너무 과분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하차니아는 하찮아도 공작 가문이란 말씀!’
작년 내 생일, 무려 그레고르 황제가 하사한 상자 속에 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원작 책을 고이 숨겨 놓았다.
‘트리스탄이 아이네스와 만나기 전이니, 원작을 살펴도 알 수 있는 건 없겠지만.’
나는 거의 백지에 가까운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을 내려다보며 작은 눈썹을 꼼틀 움직였다.
‘이렇게 쓸모없는 빙의 버프라니…….’
매일 밤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아이네스가 아기라서인지 페이지는 쉽사리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후웅. 아직두 공배기네.” (아직도 공백이네.)
나는 서럽게 울고 있는 아기 아이네스를 핏줄이 잔뜩 선 눈으로 노려보던 그레고르가 칼을 집어 드는 부분까지 묘사된 원작을 손끝으로 툭툭 치며 고개를 기울였다.
‘트리스탄 시점으로 진행되는 외전도 있긴 있었을 텐데.’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 일명 <아.황.장>은 상당히 잘 팔린 데다 작가가 본인 작품 덕질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혹시 모르니까 빌어는 볼까?’
나는 내가 죽기 얼마 전에 연재된 트리스탄 외전을 떠올리며 침대 위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주떼오.”
“…….”
“외젼 주떼오.”
도와줄 거면 제대로 도와줘!
두 눈을 꼭 감고 다시 한번 빙의 버프를 위해 신에게 기도를 올린 나는 슬금슬금 실눈을 뜨며 책을 살폈다.
“덴당!”
한 줄도 추가되지 않은 책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폭 내쉰 나는 말랑말랑한 가죽 커버를 손끝으로 훑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웅?”
커버를 유심히 살펴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표지의 정중앙을 차지한 별의 꼭짓점에 박힌 유리알이 톡 튀어나와 있었다.
‘투명해서 못 봤었나 봐.’
별의 가장 우측 꼭짓점 하나만 연분홍빛 보석이었고, 나머지 꼭짓점은 전부 속이 휑했다.
‘뭔가를 채워 넣어야 할 것처럼 생기긴 했는데…….’
의아한 눈으로 책을 샅샅이 살피는데, 내가 책을 창가 방향으로 움직일 때마다 왼쪽에 위치한 꼭짓점이 희미한 적색 빛을 내뿜었다.
“머지.”
책을 안고 호다닥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창가에 다가서자, 흐릿하게 새어 나오던 새빨간 불빛이 점점 더 강렬해진다.
나는 레이저처럼 길게 뻗어 나가는 불빛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한 다음 움후후,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힌트.
전직 특수부대 암살 요원이자 로판 독자로 살아온 나는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원작이 내게 힌트를 줄 전개였다.
* * *
책이 가리킨 힌트는 분명 ‘트리스탄’이었다.
“뭐지.”
나는 나를 전혀 반기지 않는 힌트의 반응에 떨떠름한 입을 열었다.
“구경하게 해 주세오.”
두 손을 맞잡은 채 나름 귀엽게 부탁했는데도 트리스탄의 냉담한 표정은 풀어지지 않는다.
“네 오빠인 에녹의 훈련은 이미 끝났을 텐데.”
“트리쯔딴 훈룐 구경할래오.”
‘이 자식 설득하는 것보단, 바리스탄이 쉽겠어.’
나는 트리스탄에게서 시선을 떼고 바리스탄에게 고개를 돌렸다.
초롱초롱 빛나는 내 눈길을 받은 바리스탄이 뺨을 긁적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훗, 아기 공녀님의 눈에도 에녹의 검기는 별 볼 일 없는 모양이로군요. 에녹이 아니라 트리스탄의 훈련을 구경하고 싶어 하시다니. 저쪽에 앉으십시오.”
에녹이 없는 자리에서도 우리 셋째 흉보는 것을 서슴지 않는 바리스탄이 몹시 얄미웠지만, 목적이 있기에 나는 얌전히 손톱을 숨긴 채 바리스탄이 가리킨 의자 위에 앉았다.
‘책에서 나오는 빛이 보이진 않는 것 같네.’
나는 땀을 뻘뻘 흘려 가며 훈련에 임하는 트리스탄을 흘깃한 후 책을 내려다보았다.
혹시라도 빛이 새어 나갈까 봐 꼭짓점을 손으로 잘 누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이 빛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트리스탄, 반 시진 정도 쉬는 시간을 갖도록.”
책을 꼭 껴안은 채 얌전히 훈련을 구경하던 나는 바리스탄의 목소리에 서둘러 의자에서 내려왔다.
“끝나또?”
손에 달랑 책을 든 채 수건을 집어든 트리스탄에게 다가가자, 써머나이츠 주제에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원작 남주가 확 인상을 찡그린다.
“꺼져. 난 아기와 놀아 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니니 아기 아닌데.”
냉큼 입을 열었지만, 트리스탄은 내 변명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휙 등을 돌릴 뿐이었다.
‘트리스탄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빛의 세기가 강해지는 것 같은데…….’
점점 멀어지는 트리스탄의 뒤통수를 빤히 올려다보던 나는 주춤주춤 그에게 다가가다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쿠!”
책의 빛을 신경 쓰느라 아래를 보지 못한 탓이다.
“아구구. 아포라.”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부러 큰 목소리로 엄살을 부려가며 트리스탄의 시선을 낚아챘다.
‘도와주진 않네, 망할 놈.’
뒤를 돌아보긴 했지만, 트리스탄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앞으로 휙 날아간 책을 집어 들었다.
의도한 바였기 때문에 나는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꾹 누른 채 이제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책과 트리스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책 내용이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미 룰루를 통해 검증했지.’
“매우 비싼 노트처럼 보이니 살살 다루세요, 아가씨.”
룰루의 경고를 떠올린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생전에 구매했던 원작의 종이책과 똑같이 생긴 책을 흘깃했다.
‘한정 소장본이라고 작가가 적자 출혈을 감행한 게 분명해.’
트리스탄의 눈에도 과할 정도로 화려한 책이 특이하긴 했는지, 그는 제자리에 우뚝 선 채 빠르게 책을 훑었다.
“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책을 들고 다니는 거지?”
“아무데나 낙서 하몬 앙대.”
트리스탄의 물음에 냉큼 준비된 답을 한 나는 내게 천천히 다가오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탁.
“그렇게 빤히 보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하지만 내 손을 잡아 주는 대신, 내 앞에 책을 내려놓은 트리스탄이 짙은 눈썹을 찌푸린다.
“단순히 네가 아기라고 해서 다 널 귀여워할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라.”
트리스탄이 내게 쓴 소리를 하든 말든, 책에 변화가 생겼나 허둥지둥 살핀 나는 이어지는 그의 다음 말에 얼굴 한가득 물음표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난 달라. 나는 아기든 어른이든 나약한 것들은 딱 질색이니까. 네 오빠들이나 너, 그리고 네 가문처럼.”
“……?”
“설마 하차니아와 솔로아가 같은 공작가라고 해서 비슷한 가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 의아한 얼굴을 보고 내가 놀랐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트리스탄이 오만하게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내가 놀란 포인트는 트리스탄이 하차니아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걸.’
“왜 나뿌게 마럐요?” (왜 나쁘게 말해요?)
“내가 너에게 상냥하게 말할 의무가 있나?”
내 물음에 트리스탄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인상을 찌푸린다.
‘아니…… 의무가 있다는 게 아니라.’
나는 미친 듯이 불어나고 있는 트리스탄의 외전 부분을 내려다보며 입만 벙긋거렸다.
* * *
◈
트리스탄 드 솔로아-굴렘은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레오노라를 발견하고 남몰래 가슴을 움켜잡았다.
‘엄청 귀여워.’
‘저 투실투실한 볼 살이 너무 귀여워.’
‘한 번만 만져 보고 싶다.’
◈
* * *
나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며 방금 원작에 추가된 트리스탄의 묘사와 속마음, 그리고 내게 쌍욕이라도 박을 기세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현실 속의 트리스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원작 남주가 전형적인 츤데레라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이건 그 수준을 넘어선 거 아닌가?
“오동통한 볼이나 소시지 같은 손가락을 보고 사람들이 무조건 널 귀여워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착각이다.”
“녜. 그런 차깍 안 하께오.”
쿵!
내가 조막만 한 손으로 주먹을 만들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를 묘사하며 원작의 페이지가 팔락이기 시작한다.
* * *
◈
하차니아의 막내딸은 몹시 귀여웠다. 트리스탄의 어린 심장에 크나큰 충격을 안길 만큼.
‘왜 나는 동생이 없는 거지?’
트리스탄은 한탄했다.
◈
* * *
“에녹은 이렇게 거치적거리는 존재가 매일 달라붙어서 무척 귀찮겠군.”
트리스탄이 피노키오였다면 거짓말로 자란 코가 하늘에 닿았으리라.
나는 부러 들으라는 듯 사납게 중얼거리면서도 바닥에 주저앉은 내 곁을 떠나지 않는 트리스탄을 흘깃하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