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19화 (19/486)

제19화

“쟈루 구러!” (좌로 굴러!)

“끼잉-!”

“우로 구러!” (우로 굴러!)

“끼잉-!”

“뭉구나무!” (물구나무!)

“낑!”

나는 내 명령에 박자를 맞춰 시킨 일을 착착 수행하는 아기 곰의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한가득 안면에 띠었다.

“움후후.”

새초롬한 내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그리즐리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가온다.

“꾸.”

나는 내 무릎에 도톰한 머리를 툭툭 박으며 아양을 떠는 아기 곰을 내려다보다 뒤에 숨겨 두었던 양동이를 꺼내 들었다.

“잘해쩌, 잘해쩌!”

양동이에서 생선 꿀 절임을 꺼내 들자 그리즐리는 제 본분-환수-도 잊고 짧은 꼬리를 강아지처럼 흔들기 시작했다.

‘이게 그렇게 맛있나.’

나는 꿀에 절여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끈적끈적한 생선 토막을 던져 주며 어깨를 으쓱했다.

‘주방장을 미리 포섭해 놔서 다행이었지.’

모든 훈련에는 채찍과 당근이 필요한 법이었다.

나는 모든 그리즐리가 환장하는 생선 꿀 절임 레시피를 떠올리며 턱을 긁었다.

‘테이머인 아이네스가 나중에 개발할 레시피지만, 내가 먼저 써먹어 버렸네.’

나는 아직 아장아장 기어 다니는 아기에 불과한 원작 여주를 떠올리며 오동통한 두 손으로 뺨을 눌렀다.

‘원작의 정보를 활용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환수를 길들이게 될 줄이야…….’

역시 난 훈련의 천재가 아닌지?

나는 테이머가 아니었으니 잃어버린 엄마 그리즐리를 찾기 전까지 임시로 따를 뿐이겠지만, 어찌 됐든 테이머의 스킬도 없이 환수를 길들인 건 스스로를 칭찬해 줄 만한 업적이었다.

‘잘했어, 나!’

자화자찬은 아끼지 말자는 게 내 지론인지라 나는 뿌듯함을 만끽하며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꾸우?”

식사를 끝낸 아기 곰이 나를 따라하며 제 양팔로 보송보송한 어깨를 꾹 누른다.

“웅, 웅. 그로케 하눈 고야!”

나는 스스로의 노고를 치하하는 그리즐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즐리의 훈련은 성공적으로 끝마쳤으니까, 이제 슬슬 에녹의 개조를 시작해야겠지.’

타고나길 게으른 한량 체질인 에녹에게는 채찍질이 먼저였다.

* * *

“내가 신호를 주면, 수풀에서 튀어나오는 거야. 알겠지?”

“꾸.”

나는 내 명령에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는 아기 곰을 한 번 쓰다듬어 준 후, 부러 에녹의 방에서 잘 보이는 위치에서 티타임을 시작했다.

‘오늘 메뉴는 생크림 스콘과 라즈베리 잼이네.’

단당류는 허접한 아기 육체를 움직이는 데 귀중한 자원이 된다.

나는 롬베르디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 스콘에 손을 뻗으며 에녹의 창가를 흘깃했다.

‘공부 중인 모양이지.’

투명한 유리 창문 너머로 책에 코를 박고 있는 에녹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하차니아 공작가는 엑스트라 주제에 아이들 스케줄이 의외로 빡빡했다.

나는 이제 세 살이 되었을 뿐인지라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진 않았지만, 에녹은 벌써부터 트리스탄과 함께 검술 훈련을 받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한창 뛰어놀 나이의 에녹이 서재에 틀어박힌 모습이 딱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전생의 나는 지금 나이 때부터 총을 만졌는데, 뭐.’

나는 일반 아이들이 어떻게 크는지 잘 알지 못했으니까.

“흐응.”

슬슬 집중력이 떨어지는 모양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에녹의 모습을 발견한 나는 계획한 대로 짤똥한 다리를 움직여 티 테이블을 걷어찼다.

쿵!

예전의 나라면 발길질 한 번에 이깟 나무 테이블 산산조각 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약간의 반동만 줄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찻잔만 떨어뜨리면 되니까.’

나는 하찮아진 육체의 비루함에 입술을 삐죽이며 서둘러 달려오는 랄라에게 손을 뻗었다.

“난나. 리니가 차짠 떨어뜨려또.” (랄라, 리니가 찻잔 떨어뜨렸어.)

“네, 아가씨. 다친 곳은 없으세요?”

테두리에 반지르르한 금칠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꽤나 비싼 찻잔인 것 같았지만, 랄라는 나를 탓하긴커녕 허둥지둥 내 몸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금수저의 삶인가.’

금칠한 찻잔을 깨부수긴커녕 만져 본 적도 없는 전생을 떠올린 나는 조금 씁쓸해졌다.

“우웅. 안 다쳐또.”

랄라의 물음에 내가 붕붕 고개를 젓자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폭 내쉰 그녀가 찻잔을 치울 빗자루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떠난다.

‘옳지.’

랄라가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의자에서 내려와 에녹의 방 창가로 내달렸다.

콰당.

‘……여기서 넘어지려던 건 아니었는데.’

애초에 에녹이 날 볼 수 있는 곳에서 엎어질 계획이긴 했지만, 나는 예상치 못한 곳에 위치한 돌부리에 걸려 생각보다 빨리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에녹이 내가 넘어지는 걸 본 것 같아.’

아까부터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창가를 흘긋거리던 에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을 보아, 셋째는 넘어진 나를 일으켜 주기 위해 정원으로 나올 요량인 듯싶었다.

혼자 발딱 일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녹이 정원에 들어서는 것을 기다리며 팔다리를 팔딱이던 나는 셋째의 찬란한 금발이 시야 끝에 걸리자마자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크르르-”

내 신호를 알아듣고 수풀에서 폴짝 뛰어나온 그리즐리가 사납게 울부짖으며 내게 뛰어든다.

“레오노라!”

동시에, 그리즐리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에녹이 허겁지겁 달려오기 시작했다.

“왕!”

아무리 기사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지만, 어린아이가 환수인 그리즐리보다 빠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녹보다 내 근처에 먼저 당도한 아기 곰은 내가 열심히 훈련시킨 연기를 시작했다.

“와앙, 왕!”

앞발을 번쩍 든 그리즐리가 나를 공격할 것처럼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다. 아직 새끼 곰 크기에 불과했지만, 마물에 속하는 그리즐리는 여덟 살 에녹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일 것이다.

‘잘한다, 우리 그리즐리!’

나는 에녹이 볼 수 없는 쪽에서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아기 곰의 연기를 칭찬해 주었다.

“이 자식이! 감히 누구 동생을 덮치려고 하는 거야!”

내 예상대로, 에녹은 손을 떨면서도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나를 지키려고 들었다.

“저리 가! 젠장, 어떻게 정원에 마물이 나타난 거지?!”

‘짜식, 조금 기특하네.’

써머나이츠의 오러를 휘감은 에녹의 나뭇가지가 타닥탁 소리를 내며 붉게 물든다.

‘사실 에녹 정도면 새끼 그리즐리 정도는 해치울 수 있겠지만…….’

나는 그리즐리를 향해 돌진하는 에녹의 깔끔한 동선을 눈여겨보며 조용히 마나를 움직였다.

‘애써 길들인 그리즐리가 다치면 큰일이니까.’

“쿠아앙!”

써머나이츠의 오러는 불 속성이라, 물 속성의 마나에는 쥐약이었다. 내가 몰래 그리즐리의 몸을 물 속성의 보호막으로 감싼 덕에 에녹의 오러는 순식간에 사위어 들고 말았다.

“어라?!”

오러가 갑작스레 사위어 드는 경험은 전무할 에녹이 크게 당황해 그리즐리와 나뭇가지를 번갈아 바라본다.

“어, 어떡하지.”

‘이 정도면 자기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정도는 깨달았겠지.’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에녹의 얼굴에 어깨를 으쓱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동생이 위험에 처했는데 도와주지 못하는 경험은 에녹처럼 다정한 아이에겐 큰 자극이 될 거야.’

에녹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트리스탄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수준이긴 했지만- 되레 훈련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여기서 더 자극하면 마음 약한 셋째가 정말 울 것 같아서, 나는 눈짓으로 아직까지 두 발을 번쩍 들고 있는 아기 그리즐리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쿠릉.”

‘아니, 나한테 오지 말고 물러가라니까?’

분명 물러나는 것까지 훈련시켰거늘, 연습 때처럼 연기가 끝나면 내가 자신을 칭찬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지 아기 곰이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내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레오노라, 얼른 일어나!”

그리즐리의 행동을 오해한 에녹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목소리를 높인다.

“일어나라니까아-!”

내가 저처럼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셋째는 오러가 사라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잔가지로 전락한 무기를 던진 다음 이를 악물고 내 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에노끄……?”

아까와 달리 그리즐리보다 먼저 내게 당도한 에녹이 내 작은 몸을 재빨리 감싸 안는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셋째의 행동에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자신의 몸을 보호할 오러가 사라졌는데도 날 지키겠다고 달려온 건가?’

“리니, 걱정하지 마. 넌 내가 지켜 줄 테니까.”

나를 위로하듯 속삭이는 에녹의 말은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겁먹은 목소리가 잔뜩 떨리고 있었으니까.

‘저도 무서우면서, 바보 같긴.’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나를 꼭 껴안은 에녹을 밀쳐 내지 못했다. 그 순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기 곰 위로 그림자가 길게 진다.

“이런 작은 마물조차 처리하지 못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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