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17화 (17/486)

제17화

허억, 허억.

가쁜 숨이 이어졌지만 나는 듣지 못한 체 귀를 막았다.

“…리니, 나 힘들어. 더 못 가겠어.”

그러나 에녹은 결국 바닥에 철푸덕 엎어지고 말았다.

나는 모자란 숨을 헉헉 들이마시는 에녹을 내려다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아 쨰끼, 빠져가꾸.” (아 새끼, 빠져가지고.)

아직 훈련의 ㅎ도 시작 안 했구먼.

작게 중얼거리는 내 말에 침을 뚝뚝 흘리던 에녹이 번쩍 고개를 튼다.

“뭐라고?”

“아냐.”

나는 세게 도리질을 치며 허덕이는 그에게 물병을 건네주었다.

가볍게 뒷산을 등반했을 뿐인데 사막이라도 횡단한 것처럼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에녹을 바라보며 나는 짧게 혀를 찼다.

‘이래서 네가 엑스트라 악당밖에 못 하는 거 아니냐고….’

선역이든 악역이든, 소설의 주연들에게는 공통적으로 근성이 있었다. 소위 말해 악바리 기질이라는 게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엑스트라 악당밖에 되지 못하는 에녹은 나와의 ‘놀이’를 지겨워했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어, 이 자식아!’

오늘은 그저 간단히 에녹의 체력을 테스트할 요량으로 날 업고-난 아기라서 힘드니까- 등산을 시켰을 뿐이다.

하지만 에녹은 벌써 힘들다며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하긴, 에녹도 이제 겨우 여덟 살이지.’

일반적인 여덟 살에게는 동생을 업고 야트막한 동산 수준이긴 했지만 등산을 한다는 게 퍽 어려운 일이기는 할 터였다.

하지만 싸이코 양부 아래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자란 내게는 어린 에녹을 헤아려 줄 공감 능력이 조금 부족했다.

‘라떼는 말이야… 이 정도 코스는 훈련으로 치지도 않았다고.’

나는 눈을 가느스름히 뜬 채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에녹의 예쁜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아직 뺨이 발그레한 게 남은 체력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체력이 한계치에 다다른 인간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사람이 모든 기운을 소진하면 저렇게 힘들어하는 티도 내지 못한다.

‘고로 에녹은 아직 덜 힘들다는 말이지.’

오러를 다루는 사람들은 체질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체력이 매우 뛰어났으니까.

갖은 엄살을 다 피운 에녹이 내게 허둥지둥 손을 내민다.

“리니, 우리 이제 집에 가자.”

“벌쩌?” (벌써?)

“응. 나 더는 못 올라갈 것 같아.”

에녹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에 나는 애써 챙겨 온 군모와 선글라스를 품에 안고 입을 삐죽였다.

제랄드가 애써 만들어 준 군모는 내 작은 머리에 비해 너무 커서 눈을 가렸고, 덕분에 코제트의 안경을 잉크로 칠해 만든 선글라스와는 같이 쓸 수도 없었다.

‘그래도 얘네만 쓰면 내 말 잘 들을 줄 알았는데….’

인생이 인상을 만든다고, 전생의 나는 굉장히 험상궂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눈빛이나 목소리에 힘만 줘도 내 부대원들은 무서워서 고개도 못 들곤 했다.

하지만 아직 육체가 하찮기 때문인지, 애써 구한 내 아이템들을 보고도 에녹은 날 무서워하긴커녕 웃기다며 배를 잡고 구르기나 했다.

‘아까 그냥 배때기를 확 걷어차 줄걸.’

그럼 내 말을 좀 잘 들을 텐데.

나는 터덜터덜 먼저 산을 내려가는 에녹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에노끄.”(에녹.)

“응?”

“에노끄는 강해지구 싶지 아나?” (에녹은 강해지고 싶지 않아?)

나름 진지한 내 물음에 에녹이 제 턱을 긁는다.

그의 산만한 금발이 뉘엿뉘엿 지는 햇볕을 받아 오색찬란하게 반짝였다.

“응. 별로?”

“애?” (왜?)

“어차피 내가 노력해도 트리스탄이나 형만큼 강해질 수도 없는걸?”

“…….”

나는 에녹이 냉큼 내뱉는 대답에 입을 헤 벌렸다.

“어차피 난 셋째라서 기사단장 같은 거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놀고먹을래.”

글렀다.

이 자식, 완전히 글러 먹었어.

나는 에녹의 기막힌 포부를 듣다 헛웃음을 지었다.

“…지짜 빠져가꾸, 어린노므 짜시기!!!” (진짜 빠져가지곤, 어린놈의 자식이!!!)

“엉? 뭐라고 했어?”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에녹이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에게 두 팔을 뻗었다.

“니니 업어 조. 힘드로.” (업어 줘. 힘들어.)

“알았어.”

산에 오르는 것도 벅차다고 땀을 뻘뻘 흘렸으면서, 에녹은 내 칭얼거림에 순순히 제 등을 내주었다.

나는 에녹의 작지만 아이치곤 탄탄한 등에 덥석 올라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얜 날 참 좋아한단 말이지….’

에녹은 동생 아끼는 마음만은 대단한 오빠였다.

오빠니까 놀아 주고, 오빠니까 지켜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를 이용해 볼까.’

에녹은 천생 부잣집 막내 도련님처럼 큰 욕심이 없는 느긋한 성정이었다.

그런 에녹이 내 훈련을 따라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위기감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따끔따끔 아파 오는 양심을 애써 외면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 같이 살자고 하는 건데, 뭐.’

“음? 형이네. 뒷산에는 무슨 일이지.”

내가 속으로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에녹이 천진한 두 눈을 둥그렇게 뜨며 앞을 바라본다.

덩달아 그를 따라 고개를 든 나는 언덕 아래 커다란 바위에 앉아 있는 실비를 발견했다.

“에노끄, 쉿.”

머리 위로 먹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는 게 뒷모습만 봐도 기분이 상당히 저조해 보인다.

“니니가 가 보께. 에노끄는 이졔 가.” (리니가 가볼게. 에녹은 이제 가.)

에녹의 등에서 호다닥 내린 나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내가 다가가는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는 실비의 등을 쿡 찔렀다.

“왁!”

“…레오노라.”

쳇, 안 놀라네.

부러 놀래라고 소리를 내지른 건데 실베스테르는 별 반응 없이 무감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나는 애답지 않게 차분한 실비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바위에 폴짝 올라앉아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시삐랑 놀려구.”

“내게 화가 난 게 아니었나.”

“뇬서해 주기로 해짜나.” (용서해 주기로 했잖아.)

내가 헤헤 웃으며 하는 말에 실비가 입술을 달싹이다 말문을 연다.

“……그래, 레오노라 너는 아버님을 닮아 어릴 때부터 인내심이 깊었으니까.”

나는 실베스테르의 투명한 적안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모습에 깜짝 놀라 그의 손등을 붙들었다.

“시삐, 우러?”

“아니.”

“거진말~ 우는 거 다 보이는데~?”

“…….”

음, 이런 톤이 아닐 텐데.

나는 왠지 모르게 놀리는 말만 내보내는 못된 입을 틀어막았다.

‘우는 애 달래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시삐, 무순 슬픈 일 이써?”

나는 내 말에 대꾸 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실베스테르를 올려다보다 그의 팔뚝에 얼굴을 묻었다.

온기를 나누는 행동이 효과가 있었는지 꾹 다물어졌던 실비의 입이 느릿느릿 움직인다.

“넌 겨우 말문을 텄을 때부터 나와 에녹을 챙기려고 들었지.”

그거야 난 전생을 기억하는 어른 애기니까.

“그만큼 아버님의 다정함을 닮은 거다. 그런 네가 아버님의 자식이 아닐 리 없어.”

나는 실비의 이어지는 말에 그제야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눈치챘다.

‘신탁이 말하는 사생아가 내가 아니라 자기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나는 실비가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가스파르가 유독 실베스테르에게만 엄하기 때문이겠지.’

아빠는 나는 막내라고, 에녹은 천방지축이라고 봐주는 구석이 있었는데 실비에게만 유독 엄하게 굴곤 했다.

‘왜 그러는지 대충 알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가스파르가 실비를 대할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시삐, 그론 말 하디 마.”

그건 자식 중 그 누구보다 실베스테르가 가스파르를 닮았기 때문이리라.

‘실비에게 자신을 닮은 유약한 면모가 있다는 것을 알아서, 일찌감치 단련을 시켜 두고 싶었을 테지.’

가스파르의 서투른 교육 방식에 혀를 내두르는 동안, 실비는 여전히 눈가를 촉촉히 적신 채 내 기분만을 살피고 있었다.

“어머님의 사생아는 분명 나일 거다. 그런데도 난 비겁하기 그지없어 네가 오해받는 상황에 나서질 못했어.”

“…….”

“미안하다.”

미안하긴 또 뭐가 미안한가.

원로들을 포함, 가스파르마저 내가 사생아라고 짐작했던 상황인데 실베스테르가 나설 이유는 없었다.

“시삐, 우리 다 압빠 자식 마자. 압빠가 그래써.”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시니 날 내쫓지는 않으시겠지.”

나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려는 듯한 실비의 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가스파르가 그렇게까지 훌륭한 양육자는 아닐 텐데.’

그는 분명 좋은 아버지였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완벽하진 못했다.

그러니까 제 둘째 아들놈이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시삐 바부야? 시삐, 압빠랑 또가치 생겨써.” (실비 바보야? 실비,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하지만 아버님은 늘 냉정을 유지하는 분이시지. 나는 쉽게 흥분해 사리를 구별하지 못하곤 한다.”

그거야 너는 아직 애니까!

게다가 가스파르가 늘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냐, 시삐. 압빠두 화 잘 내. 따라아 바.”

“……?”

실비의 손을 잡아끌고 가스파르의 집무실에 쳐들어간 나는,

“잘 바.”

영문 모르는 아빠가 가장 아끼는 청자를 냅다 바닥에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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