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13화 (13/486)

제13화

* * *

‘공작이 레오노라를 황궁으로 보내지 않겠다고 나온다, 이 말이지?’

행정관들이 수군거리는 대화를 엿들은 아이네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놀랍지도 않네. 공작의 반항이야 과거에도 몇 번 겪었던 일이니까.’

숨만 쉬어도 마나가 닳는 특이한 체질인지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긴 했지만, 아이네스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공작이 그렇게 나올 때는 이런 수를 쓰면 돼.’

몇 번의 회귀를 반복한 아이네스는 당황할 일이 많지 않았으니까.

* * *

“무순 슈!” (무슨 수!)

그래서 도대체 무슨 수를 쓸 건데!

뚝 끊긴 문장을 노려보며 책을 팡팡 내려쳤지만, 내 마나를 흡수해 반짝반짝 오팔처럼 빛이 나는 원작 책은 얄밉게도 다음 문장을 내놓지 않았다.

“아이녜쯔가 회기를 반복해따니….” (아이네스가 회귀를 반복했다니….)

단순한 회귀자가 아니었던 걸까.

‘원래 책은 이런 내용이 아니었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변한 거지?’

나는 새로 알게 된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다 지끈지끈거리는 작은 머리통을 한 손으로 꾸욱 누르며 펜을 들었다.

1. 내가 죽지 않기 - 어떻게?

2. 황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 이건 또 어떻게?!

제목은 거창했지만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둘 다 너무 어려웠다.

루에르병은 확실한 원인이 있는 병이 아니었으니 내가 막을 방도가 없었고, 하차니아 공작가는 엄연히 윌레닌 제국에 속한 귀족 가문이었으니 그레고르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었다.

‘역시 그냥 확 공국을 세워 버려…?’

나는 여백이 가득한 종이를 한참 동안 노려보다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공녀님, 뭐 하세요?”

‘헉!’

내 방을 정리하러 들어온 랄라가 슬쩍 내 곁에 다가와 내 공책을 훔쳐본다.

깜짝 놀라 내 짜리몽땅한 몸을 날쌔게 날렸지만, 이미 공책은 룰루의 손안에 들어간 뒤였다.

“음. 낙서하고 계셨네요. 전 공부하시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동글동글하게 생긴 한글의 모양 때문인지, 그녀는 내가 단순히 졸라맨이라도 잔뜩 그려 대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흐응. 오늘은 공부가 안 당기시나 봐요?”

내 인생에 공부가 당기는 날 따위는 없었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내 머리를 쓰다듬던 랄라가 그림 연습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며 동화책 한 권을 가져다주며 말을 잇는다.

“뭐, 오늘은 놀기만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애?”(왜?)

나는 의아한 랄라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룰루와 랄라는 아빠인 가스파르보다도 내 조기 교육에 열을 올리는 편이었으니까.

‘룰루랄라라는 이름값도 못 하고 말이야….’

인생 날로 먹고 싶은 내 가치관과 동떨어진 유모들이었지만, 그래도 어른의 사고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나로서는 따라잡기 힘든 수준은 아니었다.

“오늘은 도련님들도 훈련을 쉬시니까요. 두 분 다 솔로아 소공작님과 외출하셨거든요.”

“쏘로아?”(솔로아?)

“네. 트리스탄 소공작님이 도련님들과 함께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실 예정이래요.”

“뜨리쯔탄….”(트리스탄….)

내 동그란 눈이 귀엽다는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룰루의 설명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트리스탄 드 솔로아-굴렘.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의 남주이자 우리 하차니아 가문의 몰락을 주도하는 주역이었다.

‘오빠들하고는 제법 잘 지냈던 것도 같은데….’

트리스탄은 실베스테르와는 라이벌-비록 실비가 완전히 발리는 쪽이지만-이었고 에녹과는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생각해 보니 이놈도 쓰레기네.’

아무리 우리 아빠가 아이네스를 납치했다지만, 결국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황제와 합심해 친구의 가문인 하차니아를 재고의 여지도 없이 멸문시켜 버리지 않는가.

나는 혀를 끌끌 차며 트리스탄에 대한 정보를 공책에 함께 정리했다.

트리스탄 드 솔로아-굴렘

불 속성의 써머나이츠

매우 강함. 아마 그레고르 다음의 최강자였던 듯 (남주 버프)

자카리와는 오랜 라이벌 구도

원작에서 트리스탄이 에녹과 친했던 이유에는 둘 다 불을 다루는 써머나이츠들인 영향도 있었으리라.

에녹은 어둠을 다루는 쉐도우나이츠나 얼음을 다루는 윈터나이츠들이 주로 태어나는 하차니아 가문의 유일한 써머나이츠였다.

나는 문득 드는 기시감에 눈을 가느스름히 뜨며 내가 정리한 공책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1. 내가 죽지 않기.

하차니아 가문의 몰락을 막을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에 밑줄을 죽죽 그은 나는 랄라의 눈치를 살피며 데구르르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내가 엘릭서를 먹으면 그만이잖아?’

원작에서 전설의 엘릭서 ‘파나샤’를 구해 오는 사람은 공작가의 장남, 자카리였다.

황제가 자카리에게 엘릭서를 찾아오는 임무를 맡긴 이유는 그가 제국에서 가장 강한 소울나이츠이자 흑랑(黑狼)의 기사단장이었기 때문이다.

흑랑은 남자 주인공 트리스탄의 기사단인 적랑(赤狼)과 비견할 만큼 강대한 무력 집단이었고, 아이네스가 갑자기 병을 앓기 시작하던 시기에 트리스탄의 적랑은 솔로아 공작가 내에서 일어난 내란을 다스리느라 엘릭서를 구하러 떠날 수 없었다.

‘그럼 자카리 대신 엘릭서를 찾아올 수 있을 만큼 강한 소울나이츠를 찾으면 되겠네.’

나는 다루기 쉬운 편인 공작가의 삼남, 에녹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이 적랑의 기사단장을 맡게 되면, 괜히 트리스탄에게 굽신거릴 필요도 없어질 테고….’

움후후.

뭔가 대략적인 큰 그림이 잡혀가는 느낌에 들뜬 나는 손가락과 손가락을 맞부딪히며 음흉하게 웃었다.

“공녀님, 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방에 막 들어서며 내가 방구석에서 음산하게 웃는 것을 발견한 룰루가 한숨처럼 웃는다.

그녀는 내가 뭘 해도 괜찮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리면서도 나를 타박하는 말을 했다.

“다 좋은데, 저번처럼 벽에 낙서하고 그러진 마세요.”

“곤채기 업서쩌!”(공책이 없었어!)

당장 머릿속에 음모가 떠오르는데 받아 적을 공책이 없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벽에 내 아이디어를 기록했었다.

기겁한 룰루와 랄라가 외우기도 전에 내 낙서를 전부 지워 버렸지만….

‘하지만 바로바로 적어 놓지 않으면 잊어버린다고!’

나는 투덜대며 내 음모를 잊지 않기 위해 침대에 숨겨 뒀던 공책에 다시금 손을 뻗었다.

1. 내가 죽지 않기.

방법: 엘릭서를 여주한테 눈 돌아갈 자카리가 아닌 에녹이 찾아오게 한다. 적랑의 단주를 트리스탄이 아닌 에녹으로 만들기!

나는 적랑 근처에 별표까지 그려 가며 중요성을 강조했다.

‘요는 에녹을 남주들보다 센 놈으로 만들면 되는 거잖아?’

신입들의 나약한 정신과 육체 개조는 내 주특기 중 하나였다.

‘빌어먹을 양부가 내게 가르친 것들 중 하나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눈누.”

“네, 공녀님.”

“압빠한테 갈럐.”(아빠한테 갈래.)

큼큼,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나는 룰루의 손을 꼭 잡은 채 가스파르의 집무실 앞에 섰다.

‘뭐라고 말해야 수업 참관을 시켜 줄까.’

비록 위력은 조금 후달릴지언정, 에녹도 오러를 다루는 기사 소울나이츠 중 하나인 써머나이츠였다.

소울나이츠들이 다루는 오러는 마법사들의 마나보다 훨씬 강력해서 연약한 아기들은 노출만 되어도 크게 다치거나 아플 수 있었다.

‘실제로 나도 실비의 오러에 아주 잠깐 닿았을 뿐인데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았으니까….’

가스파르는 실비나 에녹보다 허약한 체질인 내 건강에 가뜩이나 예민한 편이었다.

무턱대고 에녹의 검술 수업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면 그가 허락해 줄 리 없었다.

‘울까?’

아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양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스파르는 자상한 아빠였지만 자식에게 휘둘리는 물렁한 아버지는 아니었으니까.

“압빠.”

룰루가 조심조심 열어 준 집무실의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민 나는 최선을 다해서 깜찍하게 눈을 깜빡였다.

“니니 와쩌요.”(리니 왔어요.)

랄라가 인형 같다며 극찬을 하는 풍성한 속눈썹을 나비처럼 팔랑거린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가스파르의 앞에 섰다.

“이 시간에 집무실에는 무슨 일이냐.”

내가 본관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 여파가 남은 건지, 그는 평소답지 않게 내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나를 찾는 것을 보니, 오빠들이 외출을 하는 바람에 심심한 모양이지.”

‘어른들은 왜 하나같이 이렇게 잘 삐지는 걸까.’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아효, 한숨을 내쉰 다음 준비한 멘트를 입에 담았다.

“아냐. 니니 압빠 보구시퍼서 와쩌요.”(아니야, 리니 아빠 보고 싶어서 왔어요.)

내 가증스러운 대답에 가스파르가 허리를 숙여 나를 들어 올린다. 나는 곧 그의 무릎에 안전하게 안착했다.

“녀석,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가지고.”

가스파르는 슬슬 풀려 가는 입가를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 일만 마저 다하고 놀아 줄 테니 얌전히 있거라.”

“녜!”

나는 도로 서류를 정리하는 아빠를 물끄러미 구경하다 고개를 요리조리 꺾었다.

‘집무실은 오랜만이네.’

고풍스러운 가스파르의 집무실은 하차니아 공작 저에서 가장 고아한 멋이 풍기는 방이었다.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구름이 그대로 보이는 스카이라이트 근처에는 크리스털로 제작된 썬캐쳐가 매달려 있었는데, 하차니아의 상징인 검은 늑대 모양이었다.

늑대의 투명한 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색찬란한 햇볕을 구경하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던 나는 집무실 책상 구석에 흐트러진 그림들을 발견하고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초상화였다.

노엘의 초상화.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던 입가가 바짝 마른다.

‘…분명 아직도 슬프겠지.’

엄마의 함선이 반파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불과 몇 주 전의 일이었다.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었던 이네스 황후와 달리 노엘은 죽어서도 공작저로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가스파르는 내게서 철저히 슬픈 기색을 감추고 있었다.

‘아빠가 슬퍼하면 나도 슬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내가 가족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주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나는 얼마나 많이 매만졌는지 이미 모서리가 잔뜩 닳은 노엘의 초상화를 집어 들었다.

예쁜 사람이다.

실버 블론드나 제비꽃 같은 자안은 분명 나와 닮았지만, 그녀는 한눈에 봐도 참 다정하고 순해 보였다.

‘나처럼 눈꼬리가 올라가지도 않았네.’

“네 엄마의 초상화란다. 널 낳자마자 그린 것이지.”

“…녜.”

나는 노엘의 품에 안긴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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