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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9화 (9/486)

제9화

동료들에게 냉철하고 돈만 밝혀 칼로 푹 찌르면 피 대신 금화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평가를 듣는 헨리 마사드는, 주변의 선입견-순전히 봉급이 높아 하차니아 가문에서 일하고 있으리라는-과 달리 제 상사인 가스파르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스파르는 헨리 마사드의 동경을 사기에 충분한 인물이었으니까.

‘하차니아 자체는 오대 귀족 가문에 속한 다른 가문에 비하면 영 떨어진다는 평을 듣긴 하지만.’

가스파르는 능력보다는 출신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보편적인 귀족과 달리 평민인 그를 제 부관으로 등용할 정도로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문이 조금 하찮아도 가주님 하나만 믿고 일하고 있었는데 지금 내가 무슨 꼴을 보고 있는 거지?’

돈을 조금 밝히긴 하지만 능력이 워낙 출중해 황실에서도 러브콜을 받는 헨리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얼이 빠질 지경의 광경이었다.

“각하!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헨리는 스스로를 찌르기 위해 칼을 든 가스파르와 그를 말리려는 듯 대롱대롱 매달린 레오노라의 모습에 기겁하며 앞으로 나섰다.

“칼 놓으십시오! 공녀님께서 다치시겠습니다!”

경악한 헨리의 목소리에도 가스파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녀님! 각하에게서 떨어지십시오!”

“앙대! 아빠 다처!!”

날카롭게 벼려진 칼끝이 제 코앞에 바투 붙었으니 겁을 집어먹을 만도 한데 어린 공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스파르의 팔뚝을 앙 물었다.

“읏.”

쨍그랑.

가스파르는 작지만 날카로운 이빨이 제 살갗을 푹 파고들고 나서야 칼을 놓치며 뒤로 물러났다.

허둥지둥 그가 놓친 칼을 멀리 차 버린 헨리는 아빠의 팔뚝에 이를 왕 박아 넣은 레오노라를 안아 들었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긴장이 풀렸는지 헨리의 품에 안겨 축 늘어진 레오노라는 앓는 소리를 내며 제 허리를 통통 두드리기 시작했다.

“설마 어디 다치신 겁니까?”

가스파르의 자해 난동에 휘말린 레오노라가 혹시나 다쳤을까 창백해진 헨리와 쓱 눈을 마주한 아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아니, 니니 갠차나.”

“하아. 정말 다행입니다.”

헨리의 품 안에서 폴짝 뛰어내린 레오노라는 정신을 잃은 가스파르의 뺨을 꾸욱 찔렀다.

방금 전까지 검을 들고 설치던 그를 조금도 겁내지 않고 외려 걱정하는 듯한 아이의 얼굴에 헨리는 묘하게 입안이 타들어 갔다.

‘사생아라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자신을 버린 듯 방치했는데도….’

* * *

“아효…. 냬가 늘는다 늘거.”

내가 마나를 느낄 줄 몰랐다면 가스파르가 노엘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은 것이라 판단했겠지만, 방금 전까지 그에게서 느껴진 기운은 분명 어둠을 다루는 쉐도우나이츠의 것이 아니었다.

웬 미친놈의 영혼이 가스파르 몸 안에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이 몸도 레오노라의 영혼 대신 내가 차지했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나는 촘촘한 속눈썹을 자랑하며 눈을 감고 있는 가스파르의 몸을 구석구석 살피다 그의 손에서 피가 나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의사 선새미 불러야대. 아바 다쳣서.” (의사 선생님 불러야 돼. 아빠 다쳤어.)

내 말에 모호하게 얼굴이 굳은 헨리는 대답이 없었다.

‘가스파르의 자진 시도에 너무 놀라 얼이 빠진 건가.’

가스파르는 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찌르려고 한 것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헨리가 볼 때에는 어린아이 앞에서 자살 시도를 한 것이나 다름없이 보였으리라.

“헨니? 아바 다쳐따니까.”

나는 헨리를 재촉하며 피가 퐁퐁 솟아나는 가스파르의 커다란 손바닥을 작은 두 손으로 꾸욱 눌렀다.

나름대로 지혈을 시도하는 내 뒤통수를 맹렬하게 노려보던 헨리가 뒤늦게 입을 연다.

“…지금 이 상황에 가주님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말문을 연 헨리의 목소리는 어찌된 영문인지 푹 잠겨있었다.

“각하께서는 여태 공녀님을 외면하셨는데도요.”

아.

나는 쇳소리에 가까운 헨리의 말에 그제야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불쌍해 보이는 모양이지.’

공작가에 사생아가 숨어 있다는 신탁에 대한 소문이 퍼졌을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사생아로 의심하기 시작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헨리는 내가 가스파르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가스파르가 나를 별채로 보내 버리는 결정을 내린데다 내가 아무리 집무실에 찾아가도 나를 만나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가스파르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찌르려고까지 했는걸.’

그가 정말로 내가 미워서 별채로 보내 버렸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공녀님도 전부 느끼고 계셨잖아요. 영특하시니까. 그래서 각하께 잘 보이기 위해 저에게까지 사탕을 주셨던 거고.”

“아냐.”

“네?”

“사탕은 헨니 힘드까 바 준 고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직도 제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는 헨리를 올려다보았다.

“아빠는 니니 사랑해. 나 알 수 잇서.”

오해를 풀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헨리의 얼굴이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한쪽 무릎까지 꿇고 나와 눈을 맞춘 그가 목이 메인 듯한 표정으로 머뭇머뭇 입술을 움직인다.

“살면서 이렇게 마음이 뭉클해진 적은 처음입니다.”

“……엥.”

그런 거 아니래두.

사족을 붙여 설명하려던 나는 이어지는 헨리의 다음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공녀님, 돈밖에 모르고 살던 놈이지만, 공작가 내에서 공녀님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가스파르의 부관을 내 편으로 만들어 두는 건 역시 나쁘지 않은 일이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 * *

“공녀님이 가주님을 지키셨다고요. 아주 장하십니다.”

“아직 어린 아기에 불과한데도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화둥둥, 둥가둥가.

바닥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가신들은 나를 안아 들고 다녔다.

“이렇게 착한 공녀님을 어찌 별채로 보내셨는지요.”

“가주님이 정신을 차리시면 제가 말을 올려 볼 생각입니다, 공녀님.”

“앗. 론도 자작께서도 각하께 말을 올리실 작정이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의사에게 아빠를 실어 보낸 헨리가 가신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다닌 건지, 달에 한 번 있는 정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원로들은 나만 보면 눈물을 글썽이기 바빴다.

사생아라는 염문에 휘말려 버림받을 위기에 처한 내가 가스파르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했다는 게 그들에게 퍽 감동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헨리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다면 이런 반응이 나올 법도 하지.’

가스파르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기에 헨리는 멋대로 자신의 목격담을 떠들고 다녔고, 나는 어느새 ‘너 같은 걸 자식으로 인정하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자진하려는 가스파르를 눈물로 호소하며 막아 낸 효심 깊은 딸이 되어 있었다.

‘분명 내가 사생아라 가문에 누를 끼칠까 염려하는 원로들이 태반이었을 텐데.’

하차니아에 몸을 담기 전에는 상회에서 닳고 닳도록 굴렀다는 헨리는 상인 출신에 걸맞은 혓바닥을 자랑하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녔기에 가신들이 이러는 거야?’

나는 효녀 심청이의 재림이라도 보는 듯한 원로들의 반응에 머쓱해진 턱을 긁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니니 이졔 어지러.”

“아이고, 네. 내려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론도 자작이 나를 서둘러 바닥에 내려 주었다.

나는 아빠 없이 진행될 정례 회의가 조금 걱정되어 원로들이 하나둘씩 앉기 시작하는 원탁을 향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곧 황궁에서도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할 텐데.’

공작가에 입적되어 있는 나를 가주의 허락도 없이 덥썩 잡아가진 못하겠지만, 원작 여주인 아이네스가 내 마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니 나는 언제 황궁에 끌려갈지 모르는 몸이었다.

나는 공작가의 정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황궁에서 나온 행정 귀족을 슬쩍 노려보며 반보 물러났다.

‘책에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르니까, 확인해 보고 오자.’

책은 아이네스의 시점으로 움직였으니 황실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언급될지도 몰랐다.

등을 돌린 나는 짤똥한 다리를 움직여 황급히 별채로 달려 나갔다.

* * *

“가주님이 아가씨 때문에 쓰러지셨다면서요.”

“아효.”

나는 나를 맞이하는 노라의 사나운 얼굴에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또 애.” (또 왜.)

‘얘 아직도 본관으로 안 돌아갔네.’

상대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노라가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내 어깨를 붙잡는다.

“가주님의 핏줄도 아닌 주제에, 가주님을 다치게 한 건가요?!”

“아포.”

나는 제 손바닥의 반도 되지 않는 내 어깨를 우악스레 꼬집는 노라를 노려보며 몸을 뒤틀었다.

“가주님도 아프셨을 거예요! 가주님을 진심으로 위하는 저만은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요!”

네가 무슨 가스파르의 영혼의 쌍둥이도 아니고, 느끼긴 뭘 느껴?

핀잔이라도 주려고 입을 벌렸던 나는 곧 한손에 얼굴을 묻은 채 한숨만 폭 내쉬었다.

‘너무 피곤하네. 그냥 빨리 기절시키자.’

마나를 단단히 뭉친 주먹으로 내리치면 훈련하지 않은 일반인을 기절시키는 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가스파르가 정신만 차리면 이 미친 가정교사를 당장 해고하라고 해야지.’

“나쁜 아이는 벌을 받아야 해요!”

“아.”

나는 눈이 뒤집혀 내 몸을 붙드는 노라를 향해 팔을 움직이다 멍하니 입을 벌렸다.

“큰일난네.”

아까 미친놈이 내 마나를 흡수했기 때문인지, 평소처럼 마나가 모여들질 않는다.

나는 내게 두터운 손바닥을 치켜드는 노라를 확인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삐끄덕.

순간, 낡은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가 귓등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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