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뭐야?’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안착한 새까만 물체에 놀라 고개를 위로 꺾었다.
천장에 구멍이라도 났나 싶었지만, 하차니아 가문의 상징인 늑대가 섬세하게 인각된 감람색 천장에는 책이 떨어질 만한 구멍은커녕 누군가 기어 들어올 만한 굴뚝조차 없었다.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나는 꼬물꼬물 침대 끝으로 기어가 물체의 정체를 확인했다.
“…짹인데.”(책인데.)
새까만 가죽 표지의 책은 무척 두꺼워서 언뜻 보면 백과사전처럼 보였다. 비싸 보이는 금박 장식은 화려한 장미 무늬였다.
“짱미….”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금색으로 반짝이는 장미 그림을 매만졌다.
예상했던 대로 장미의 가시 덩굴이 휘감은 책의 제목은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이었다.
전생에서는 꽃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나는 이제 장미라면 치를 떨 만큼 싫어한다.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이라니, 이건 주인공인 아이네스의 인생만 장밋빛이라는 뜻이었다.
나 같은 엑스트라의 인생은 어두컴컴한 진흙색이었으니까.
나는 두꺼워서 잘 열리지 않는 책의 표지를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낑낑거리며 붙잡다 흠칫 동작을 멈추었다.
‘잠깐.’
나는 스카이라이트(천장에 낸 작은 창문)를 눈으로 흘깃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신이 위에서 던져 주는 건가…?’
완전 개꿀이잖아.
이게 바로 책 빙의 버프!
커다란 눈을 끔벅끔벅하며 천장을 살피던 나는 두 팔을 번쩍 벌린 다음 하늘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끄믄보아!”(금은보화!)
“…….”
“부로쟝섕!”(불로장생!)
“…….”
“나 혼쟈만 레베럽!”(나 혼자만 레벨업!)
하지만 내 간절한 기도에 신은 침묵할 뿐이다.
“쪳.”(쳇.)
줄 거면 돈도 주고 힘도 주고 권력도 줄 것이지, 고작 원작이 적힌 책 한 권뿐이라니.
필요하다고 바랄 때는 언제고, 쪼잔하게 책 한 권 던져 주는 신의 은총에 실망한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마저 책을 펼쳤다.
* * *
◈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
“응애응애.”
우렁찬 울음소리가 황궁 구석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생트로페 해적이 이네스 황후의 머리와 함께 보낸 아기였다.
아기의 이름은 바로 아이네스.
아이네스의 이름을 지어 줄 때까지만 해도 황제는 자신의 딸을 더없이 사랑했었다.
“황녀를 별궁으로 보내라. 다시는 이 얼굴을 보고 싶지 않구나.”
하지만 그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이네스가 죽고 말았다.
죽은 아내를 빼닮은 아기를 볼 때마다 채 아물지 못한 상처를 들쑤시는 고통이 황제를 괴롭혔고, 그는 딸을 향한 애정을 잃고 말았다.
“폐하! 황녀님께 너무 잔인한 처사이십니다!”
놀란 충신들이 반대하고 나섰지만, 그는 얼어 버린 눈으로 서글프게 우는 아기를 노려볼 뿐이었다.
“황녀를 별궁에 유폐시켜. 내 뜻에 반대하는 자는 목을 치겠다.”
◈
* * *
‘뭐야, 미친놈.’
완전 제멋대로다.
‘신하들이 무슨 잘못이야?’
하여간, 황제는 황제 자격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새끼였다.
‘하긴 그러니까 폭군 육아물이었겠지….’
아내를 잃기 전에는 그럭저럭 황제 노릇을 했던 그레고르는 이네스를 잃고 완전히 돌아 버린다.
‘맞아. 그레고르는 이런 놈이었어.’
황제 그레고르는 소설이 진행되면 될수록 아이네스 없이는 못 산다며 제 목숨도 내놓는 딸바보 아빠로 진화하지만, 초반에는 정말 쓰레기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인성이 파탄 난 인간이었다.
나는 이제 겨우 젖을 뗐을 뿐인 아기를 별궁에 유폐시키겠다는 자신의 미친 발상에 반대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신하들의 목을 베겠다며 설치는 황제의 횡포에 혀를 끌끌 차며 다음 장을 넘겼다.
“웅…?”
그런데, 다음 장이 없었다.
“모야!”
나는 눈을 끔뻑이며 내가 책을 잘못 넘겼나 싶어 소시지 손가락에 침까지 묻혀 종이를 다시 넘겨보았지만, 말끔한 백지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설마 내가 아까 자신한테 불만을 좀 품었기로서니, 이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소심한 신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지운 걸까.
“…어쩔 슈 업꾼.”(어쩔 수 없군.)
나는 큼, 헛기침을 한 다음 하얀 속살을 내보이는 책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데둉함미다!”(죄송합니다!)
“….”
“데둉해요! 자모해떠요!”(죄송해요! 잘못했어요!)
“….”
“다씨는 씬님 요카지 안케씀미다!”(다시는 신님을 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까와 같은 묵묵부답이 돌아올 뿐이다.
‘아 새끼, 겁나 쪼잔하네….’
나는 혹시라도 신-혹은 악마-이 들을까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며 책을 휘적휘적 넘기다 표지에 그려진 오망성의 꼭짓점에 손을 올렸다.
“헙!”
그러자 신체 내의 마나가 훅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사위가 아찔하게 어두워진다.
“앙대!”
나는 레오노라의 타고난 마나로 전생의 기억과 사고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침실에 들어올까 황급히 문을 돌아보았다.
‘정신 에너지에 가까운 마나가 떨어지면 미친개의 체면도 잊고 마냥 아기처럼 굴게 된다고!’
다행히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는다.
“오잉.”
나는 아까는 분명 백지였던 다음 장이 혼자 조금씩 글을 써 내려 가는 신묘한 모습에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 * *
◈
아이네스는 그렇게 아빠인 그레고르의 얼굴도 모르는 채, 아무도 찾지 않는 낡은 별궁으로 옮겨졌다.
◈
* * *
‘이거 혹시 소설이 진행되는 만큼만 채워지는 건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몰랐던 이네스 황후는 황제의 반대를 무릅쓰고 엄마와 항해를 떠났다.
그녀가 자신이 아이네스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엄마의 함선은 이미 대양을 건넌 이후였고, 제국 인근 바다가 거칠어지는 시기였던지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함선에서 출산을 강행했었다.
그 직후 엄마의 함선은 제국에 앙심을 품고 있는 생트로페 해적 놈들에 의해 전복되었고, 그들은 포로로 잡히고 만다.
‘그러니까 아마 아이네스는 나보다 한 살 정도 어렸을 거야….’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갓난아기 상태로 별궁에 유폐되었으리라.
‘미친놈이 아기를 유폐시켜… 아이네스가 뭔 잘못을 했다고.’
이네스 황후가 죽은 게 아이네스 잘못인 것도 아닌데, 나는 그레고르를 생각하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아닌가. 미칠 만도 한가.’
해적 놈들도 단단히 또라이들인 게, 그들은 이네스 황후의 시신을 붙들고 우는 황제에게 아이네스의 몸을 그녀의 초상화로 감싸 보내 버렸다.
황제는 그 트라우마로 아이네스만 보면 그녀의 새파랗게 질린 시체를 떠올리게 된다.
그레고르의 사정을 떠올리며 딱 한 줄 추가되었을 뿐인 책장을 가만히 노려보는데, 새까만 글씨가 넘실거리더니 갑자기 문장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 * *
◈
아이네스가 자신의 회귀 사실을 깨달은 건 본격적으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 어언 두 살 무렵의 일이었다.
‘어서 레오노라가 별궁으로 와야 할 텐데.’
시한부의 병약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자신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유년 시절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은 체내 마나량이 방대한 레오노라의 기운을 흡수하는 것밖에는 없었으니까.
‘이제 곧 신탁이 알려져 레오노라가 공작가에서 버림받을 시기지.’
후후후.
아이네스는 꼼질꼼질 작은 손을 맞부딪히며 작게 웃었다.
‘역시 하녀들을 이용해 소문을 퍼뜨리길 잘했어.’
예전처럼 아프게 되는 것은 사양이었으니까.
◈
* * *
‘…이게 뭐야.’
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은 손을 서둘러 책에서 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기억하는 책 내용과는 언뜻 다른 느낌의 문장들이었다.
아이네스가 회귀자였다니.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에는 그런 설정이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게다가 두 살짜리 아이의 생각이라고 넘기기에는 ‘레오노라’의 육체에 담긴 마나를 이용해 제 몸 상태를 회복시키겠다는 계획이 무척 구체적이었다.
“미찐?” (미친?)
나는 기가 막혀 아이네스의 사고를 따라 죽죽 적히는 책을 노려보았다.
* * *
◈
‘어서 와라, 내 마나통.’
◈
* * *
“마나토오?!” (마나통?!)
물론 ‘레오노라’의 몸이 조금 특별하긴 했다.
‘내가 마나를 운용해 성인 수준의 사고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도 이 특별한 몸 덕분이었으니까.’
이 작은 몸에 담긴 마나의 양은 벌써 성인 마법사의 열 배에 달하는 양에 이르렀다.
“우쒸이. 이게 날 멀로 보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네스가 내 마나 서클에 빨대를 꽂아도 되는 건 아니었다.
전생에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훈련을 반복해서인지, 레오노라로 태어난 나는 전생이 떠오른 순간부터 내 몸 안에 빙글빙글 돌고 있는 마나 서클을 느낄 수 있었다.
몸 안의 기운에 집중하는 건 내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던지라, 난 ‘레오노라’가 무척 뛰어난 자질을 지닌 마법사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렸다.
기댈 곳 없는 황궁에 버려지게 될 예정이라는 처참한 현실을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인 것도 내 마나의 수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판 세계관의 세상이니까, 이능을 발휘할 줄 아는 내게 유리할 게 자명하잖아.’
하지만 내 마나를 노리는 사람, 그것도 ‘원작 여주’가 존재한다는 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내 마나를 어떻게 하면 쪽쪽 빨아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아이네스의 머릿속을 훔쳐보다 침을 꼴깍 삼켰다.
“…띠바.”
황궁 가면, x된다.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공작가에 남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