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가스파르 데지레 드 하차니아는 좋은 인간이었다.
전생을 자각한 내가 ‘아버지’라는 종족에 대해 갖게 된 편견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리니.”
‘나를 보면 울화가 치밀 텐데도 아프다고 걱정까지 해 주는 건가.’
떼잉, 쯧.
이 인간도 참 마음이 약해서 큰일이었다.
‘그러니까 엑스트라 악당밖에 못 하는 거라고.’
내가 공작가의 주인이었다면 절대 죄책감 따위에 휘둘려 가문을 말아먹을 일은 없게 했을 텐데.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를 거면서, 가스파르의 검붉은 눈이 걱정스러운 빛을 띤 채 내 얼굴을 살핀다.
그는 덥수룩하게 내려온 내 앞머리를 위로 쓸며 짧게 혀를 찼다.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 오늘은 침실 온도에 각별히 주의하도록. 룰루, 너는 당분간 별채에 머물며 레오노라를 돌보도록 해라.”
“네, 가주님.”
가스파르의 명령에 룰루가 주의하겠다는 뜻으로 공손히 허리를 숙인다.
“에찌!”
“…….”
“에찌! 에치이!”
아주 잠깐 추위를 느꼈을 뿐이지만,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그의 걱정을 배가시켰다.
열린 문틈 사이로 실베스테르의 그림자가 보였으니까.
“거기 서 있는 거 다 보인다.”
실비를 발견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삐죽 튀어나온 내 콧물을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러 닦은 가스파르가 등 뒤로 시선을 돌린다.
“실비.”
그의 부름에 방문 근처를 서성이던 그림자가 흠칫 놀라 모습을 드러낸다.
“레오노라에게 할 말이 없는 건가.”
“…….”
미적미적 우리에게 다가오긴 했지만, 실베스테르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실베스테르.”
대답이 없는 실베스테르를 바라보는 가스파르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그는 자식들 중 누군가를 눈에 띄게 편애하진 않았지만, 실베스테르에게는 유독 엄하게 굴곤 했다.
“미안.”
가스파르의 재촉에 그제야 얼굴을 든 실비가 내 손을 꼭 붙잡는다. 맞닿은 온기에 괜히 마음이 쓰라리다.
나는 내게 대강 사과하는 실비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 흥, 고개를 돌려 버렸다.
“리니.”
“녜.”
가스파르는 돌아간 내 얼굴의 양쪽 볼을 두 손으로 꾹 눌러 정면을 바라보게 시켰다.
“형제가 사과를 하는데 무시하는 행동은 옳지 않다.”
형제라고 생각해주지 않을 거면서.
윈터나이츠인 실베스테르의 오러에 행여나 내가 다쳤을까 달려오긴 했지만, 그의 동정심은 딱 거기까지일 것이다.
‘평소와는 분위기부터 달라.’
나는 늘 다정했던 가스파르의 얼굴이 유독 바짝 굳어 있다는 생각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실베스테르가 네게 오러를 사용한 건 분명 잘못이지만, 일부러 오러를 드러낸 건 아닐 거다.”
지금도 그는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는 실베스테르를 용서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실비는 제 자식이고, 난 아니니까.’
“에치! 에찌!”
아픈 척 마른기침을 하는 것으로 가스파르의 질책을 피해 보려고 했지만, 가스파르는 더는 내 얕은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레오노라.”
나는 내 뒤통수에 내려앉는 가스파르의 따가운 눈초리에 꾸물꾸물 입술을 움직였다.
“아라쩌.”(알았어.)
“…….”
“뇬서해 주께.”(용서해 줄게.)
“고맙다, 리니.”
빈말에 불과한 내 용서에 딱딱하게 굳었던 실베스테르가 안심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는다.
‘그래, 뭐. 어차피 떠날 공작가인데 나쁜 감정을 남기지는 말자.’
아기 앞에서 오러를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실비도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가 오러를 사용해서 나를 공격한 것도 아니었고, 감정이 격해져 제어를 하지 못했을 뿐이다.
‘오러를 다루는 일은 무척 까다로워서 숙련된 기사들도 실수가 잦았으니 따지고 보면 억울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실베스테르는 깨끗한 비누 냄새가 나는 담요를 내 몸에 둘러 주기까지 했다.
“내가 더 열심히 수련을 했어야 했는데, 배움이 모자랐다.”
그는 자꾸만 기침을 하는 나를 걱정하느라, 자신이 왜 내게 화가 났었는지는 죄 까먹은 얼굴이었다.
‘짜식이… 마음만 약해서는.’
너희들이 그러니까 엑스트라 악당밖에 못 되는 거라고.
나는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실베스테르에게 눈을 흘겼다.
* * *
평범한 기사들은 오러를 다루지 못한다.
이 세계에서 오러를 다룰 수 있는 특별한 기사들은 소울나이츠라고 불렸다.
‘물론 원래의 소울나이츠는 모든 종류의 오러를 다룰 수 있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전설 속 동물같은 거지만.’
플라워(봄), 써머(여름), 쉐도우(가을), 그리고 윈터(겨울).
오러에는 사계절을 의미하는 속성이 존재했고 한 계절의 오러를 다루는 것조차도 대단한 재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중 실베스테르는 겨울 속성을 타고난 윈터나이츠였다.
‘몸이 무거워….’
실베스테르의 냉기 서린 오러를 맞은 나는 결국 감기에 걸려 버리고 말았다.
‘가스파르 앞에서 아픈 척을 하고 싶었던 거지, 정말로 아프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차가운 검신에 냉기를 두르는 게 그들의 특징이었는데, 땅도 사람도 가리지 않고 얼린다는 그들 오러의 냉기가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었다.
‘고작 한 번 노출되었을 뿐인데 감기에 걸려 버리다니….’
억울하다, 억울해.
“끄으으.”
비루먹은 아기 몸!
나는 잔뜩 앓는 소리를 내며 요람 위를 굴렀다.
“리니, 괜찮아?”
내가 일어나길 기다린 모양인지 에녹이 호다닥 달려와 요람 앞에 선다.
막내 공자인 에녹은 내 침실이 별채로 옮겨진 이유를 아직 모르는지 평소와 다름없이 다감한 얼굴이었다.
“에노끄. 나 추오.”
아직 잠이 덜 깬 데다 아프기까지 해서 사고력이 떨어진 나는 잔뜩 어리광을 부리며 에녹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에녹이 나를 얼른 안아 들고 꼬옥 안아 주기까지 한다.
“하여간 형은 잘난 척은 혼자 다하더니. 오러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서.”
“에노끄, 훈뇬?” (에녹, 훈련은?)
아기 몸으로 감기를 앓으려니 자꾸만 졸음이 밀려들었다. 밤에 잠든 것 같은데 해가 벌써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에녹과 실베스테르의 훈련은 이른 아침에 시작해 여명이 저물 때까지 이어졌으니 지금은 한참 훈련 중일 시간일 텐데?’
내 물음에 나를 공중에서 둥기둥기 흔들던 에녹이 입술을 삐죽 내민다.
“뺐어. 너 아프다고 해서.”
‘거짓말.’
모범생인 실비와 달리 에녹은 기회만 생겼다하면 훈련을 빼먹는 양아치였다.
‘내 감기를 핑계로 썼나 보네.’
걱정이 되어서 집중을 할 수 없다든지, 그런 말로 검술 선생을 속였을 게 뻔했다.
“너 왜 눈을 그렇게 떠?”
에녹은 가느스름히 좁아진 내 미간을 꾹 누르며 투덜거렸다.
“내 말 안 믿는 거야?”
“웅.”
내 단호한 대답이 충격적이라는 듯, 에녹이 입을 동그랗게 벌린다.
“진짜야. 너 걱정한 건.”
‘걱정은 했지만 훈련 빼먹을 정도는 아니라는 거잖아.’
“진짜라니까, 이 쪼끄만 게 오라버니 말을 안 믿네.”
에녹의 말에 흥, 콧방귀를 뀌는 나를 바라보던 그가 내 작은 콧망울을 아프지 않게 꼬집는다.
“아포!”
나는 갖은 엄살을 떨며 에녹의 손을 후려쳤다. 애기치곤 매운 손에 에녹의 손등에 빨간 손자국이 남는다.
“…이젠 조금 컸다고 날 막 패네.”
“흥!”
“리니 너 말도 못하는 애기였을 때는 나 없으면 잠도 안 잤어. 알아?”
“안 구래써! 거짓말장이!”
“진짠데….”
“훙!”
나는 에녹의 씁쓸한 미소를 팔짱을 끼며 외면했다.
“리니.”
“애.”(왜.)
“그런데 네가 무슨 말을 했길래 형이 오러를 제어하지 못한 거야?”
오러를 다루는 일은 마음을 다루는 일이었고, 실베스테르는 쉽게 평정심을 잃는 소년이 아니었다.
나는 에녹의 물음에 느릿느릿 턱을 긁었다.
“…시삐 이졔 니니 오빠 아니라구 했써.”(…실비 이제 리니 오빠 아니라고 했어.)
에녹의 물음에 나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데?”
내 말이 의문스러운 듯 에녹이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린다.
지금부터라도 그들과 정을 떼 놓아야 하는 내 사정을 에녹이 알아줄 리 없었다.
나는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아기인 것처럼-실제로 아기였지만- 고개를 마구 저었다.
“구냥. 구냥 아니야.”
“왜 아니야? 그럼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에녹이 내게 얼굴을 들이민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희번덕 빛나는 새빨간 눈에 나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에노끄는….”
“응. 나는?”
내 대답을 재촉하며 에녹이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이렇게 다정하게 나를 대하는 걸 보면, 아직 어린 에녹은 신탁에 대해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어서 대답해, 리니.”
‘얘가 원작에서 어떤 애더라….’
나는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광기가 드러나는 에녹의 눈빛에 흠칫 몸을 떨었다.
“에노끄는 니니 오빠 마찌.” (에녹은 리니 오빠 맞지.)
곧 에녹이 먼저 나와 가족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게 되겠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 말에 에녹이 심각하게 굳어졌던 얼굴을 손바닥 뒤집듯 빠르게 풀며 해맑게 웃는다.
“헤, 그래?”
“우웅. 에노끄는 니니 오빠.”
“뭐, 네가 실베스테르를 오빠라고 생각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 나도 가끔 그 자식 짜증 나거든.”
에녹이 씨익 웃으며 내 머리칼을 흐트러뜨린다.
나는 곱슬곱슬한 내 앞머리를 주욱 잡아당기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에녹은 실베스테르보다도 비중 없는 엑스트라였지….’
에녹 그웬달 드 하차니아는 ‘레오노라’가 죽었다는 말에 황제를 배신하는 가스파르와 합심해 반역을 준비하고, 결과적으로는 함께 목을 댕강당하고 마는 조연에 불과했다.
‘뭔가 더 역할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나는 벌써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한 원작에 대한 기억을 헤집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하늘에서 책이라도 뚝 떨어지면 좋을 텐데.’
책 빙의 소설에는 그런 거 많이 나오던데!
‘막 혼자서만 들어갈 수 있는 도서관이라든지… 원작 내용을 전부 다 기억할 수 있는 미친 기억력이라든지….’
전생에서 읽었던 책 빙의 소설들을 떠올리니 시무룩해진다.
‘나는 엑스트라라서 그런 버프도 없는 건가.’
가뜩이나 감기에 걸려 몸이 축 늘어지는데, 내가 하찮은 엑스트라라는 자각에 기운이 빠진 나는 다시 요람에 퍽 엎어졌다.
“나 이제 가야겠다.”
시무룩하게 베개에 코를 박은 내 머리를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두어 번 쓰다듬은 에녹은 이제 훈련 받을 기운이 난다며 방을 나가 버렸다.
쿵!
‘x발, 뭐야!’
아프잖아!
에녹이 나가자마자, 내 조막만 한 머리를 세게 때리며 무언가가 요람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