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역시 안 오는구나.’
매일 밤 딸의 침실에 들러 굿나잇키스를 해 주던 가스파르는 노엘의 함선이 가라앉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그래, 노엘을 쏙 빼닮은 내 얼굴을 보는 것조차 괴로울 텐데 올 리가 없지.’
굳게 닫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실망하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쪄나바.”
몸이 아기가 되었다고 정신까지 어려져 버린 걸까. 아내가 자신을 배신한 증거나 마찬가지인 나를 찾아 주길 바란다니.
꼼질꼼질 움직여 이불 속에 몸을 푹 파묻은 나는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이상하다.
아기의 뇌로 사고할 수 있는 데엔 한계가 있었기에, 내가 전생을 기억해낸 건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전에는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으니 내가 가스파르에게서 어색한 안온함 따위를 느낀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품이 그립다니.’
역시 인간은 나약해 빠졌다.
‘인간 병기’라고 불릴 정도로 혹독한 삶을 보냈던 내가 금세 경계심을 풀고 타인에게 기대고 싶어지질 않는가.
‘이젠 와 주지 않을 거야. 기대를 버려.’
나는 자꾸만 문가로 가는 시선을 애써 다잡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콰캉, 쾅!
그 순간 창문을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거친 바람이 휘몰아쳤다. 나는 눈앞에 번쩍이는 빛줄기에 놀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천둥 번개 따위를 무서워하다니.’
전생을 자각하기 전에는 작은 소리에도 곧잘 놀라 자지러지는 평범한 아기였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 미친개로 불렸던 특수요원이었다.
천둥 번개 따위를 무서워하다간 작전은커녕 훈련 과정에서 도태되어 죽었을 것이다.
찰싹!
“정신 똑바루 차림미다.”
나는 소시지처럼 포동포동한 손으로 작은 뺨을 내리치며 스스로를 훈계했다.
그렇게 토실토실한 하얀 뺨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내려쳤지만, 한 번 콩닥거리기 시작한 작은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원래는 이런 날이면 아빠랑 같이 잤었는데.’
가스파르는 확실히 좋은 아빠였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천둥 번개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나-내가 평범한 아기였던 시절-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업무를 보기도 했었으니까.
‘룰루나 랄라라도 불러올까.’
식은땀에 젖은 등이 축축해 찝찝해서 갈아입고 싶었다.
절대로 무서워서 하녀들을 찾는 게 아니다.
“읏챠.”
열심히 요람에서 내려온 나는 공작저의 침실답게 널따란 문에 아장아장 다가섰다.
높아서 잘 닿지 않는 손잡이를 간신히 잡아 돌렸을 무렵, 사람 서넛이 속삭이듯 주고받는 대화가 귓등을 때린다.
“룰루, 랄라. 너네도 얼른 줄을 바꿔 잡는 게 좋을걸. 나는 첫째 도련님의 시중을 들겠다고 집사님에게 말해 놨어.”
놀란 목소리의 주인공은 룰루와 랄라, 그리고 내 전속 하녀인 마가렛이었다. 나는 친숙한 그녀들의 목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뜻이야, 마가렛?”
“레오노라 아가씨 말이야. 공작님의 진짜 따님이 아니래.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모셔 봤자 콩고물 같은 게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뭐라고?”
“신탁에 대한 소문 못 들었어? 레오노라 아가씨, 마님이 사라진 황자 전하와 내통하여 낳은 사생아라잖아!”
마가렛의 숨죽인 말에 룰루와 랄라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시무룩하게 축 늘어진 몸을 움직여 다시 요람으로 기어 들어갔다.
‘지금 내가 나가면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질 거야.’
아기인 내가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찌 됐든 레오노라는 소문의 당사자니까.
‘아기 몸인지라 천둥 번개 따위가 아주 쬐끔, 엄청 쬐에금 무서운 것 같기도 하지만… 그냥 참자.’
오들오들 떨려오는 어깨를 애써 무시한 채, 나는 베갯잇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튿날, 내 방을 별채로 옮기라는 가스파르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공녀님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시다뇨!”
나름 대비를 하고 있었던 나와 달리 룰루와 랄라는 당황한 얼굴로 내 물건을 막무가내로 옮겨드는 병사의 팔을 붙들었다.
“가주님의 명입니다.”
“각하께서 왜 갑자기 아가씨 침실을 옮기시려는 건데요? 이 방이 저택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셔서, 그래서 아가씨께서 이 방을 쓰고 계셨던 거잖아요!”
“가주님이 아가씨의 방을 별채로 옮기라 하셨습니다.”
억울함을 토로하느라 새하얗게 질린 룰루의 말에도 병사는 무감한 얼굴로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래, 가스파르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지.’
아내가 바람피워서 낳아 온 자식을 딸로 키우고 있었으니, 모멸감에 손발 끝이 부들부들 떨릴 것이다. 나를 가능한 한 멀리 치워 버리고 싶은 게 당연했다.
나는 어떻게든 방에서 버텨 보려는 듯 내 요람을 붙들고 선 룰루와 랄라를 향해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니니 갠차나.”
“…하지만 아가씨, 지금 별채로 가시면 당장은 저희가 보살펴 드릴 수가 없어요.”
“우웅, 그래도 갠차나.”
본관 소속 하녀인 룰루와 랄라가 나를 따라 별채로 오는 건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하녀들에게 본관에 머물 것을 지시하자 룰루가 그럴 수 없다며 빠르게 고개를 젓는다.
“니니 말 드러, 눈누.”
어차피 별채에서 지내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공자들이 사생아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황제가 곧 나를 황궁으로 소환할 테니까.
아무렇지 않게 미리 싸 두었던 작은 배낭을 맨 나는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본관에서 지내던 내가 외진 별채로 내쫓기듯 보내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 하녀들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돈다.
“이거뚜 가저가야지.”
언젠가 가스파르에게 받았던 연분홍색 토끼 인형을 질질 끌며, 나는 병사들을 졸래졸래 따라나섰다.
그런 나를 평소처럼 안아들겠다 나서는 고용인은 없었다.
‘다리가 쪼꼼 아프지만, 뭐 괜찮아.’
전생을 자각한 나는 일반적인 아기가 아니었으니까.
별채는 본관과 멀리 떨어진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나는 낮게 날아다니는 풀벌레 따위를 구경하며 군말 없이 걸었다.
“누가 아가씨를 안아야 하는 거 아냐? 거리가 좀 되는데.”
열심히 병사들을 따라 걷고 있긴 했지만, 자꾸만 뒤처지는 내가 거슬리는지 병사 한 명이 나를 돌아보며 작게 속삭인다.
“그러다 각하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어쩌게? 마님이 바람을 피워 낳은 자식이라잖아.”
팔랑팔랑 날아가는 나비만 바라보고 있는 내게 자신들의 말이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그의 말에 다른 병사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순간적으로 몸이 움찔거렸지만, 나는 벌레를 쫓는 척 손을 뻗었다.
“각하도 참 매정하시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끼고 돌던 딸이었잖아.”
“네 일이라고 생각해 봐, 로널드. 너라면 눈 안 돌아갈 것 같냐.”
점잖은 척 내뱉는 그 말에 내 뒤에 서 있던 병사가 핀잔을 준다.
나는 그의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도, 내가 들을 수 있는 자리에서 주고받을 대화는 아니라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벌써부터 나를 무시하기 시작한 거구나.’
내가 아무리 아이였어도 가주인 가스파르의 사랑을 받는 친자식이었다면 절대 이런 무례를 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차니아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가주인 가스파르에 대한 충성도가 꽤나 높은 편이었으니, 사생아인 나를 좋게 봐줄 수는 없겠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폭 내쉰 나는 다리가 퉁퉁 부을 때가 되어서야 낡은 별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여기가 앞으로 아가씨가 지낼 곳입니다.”
나를 별채로 안내한 병사들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내 허락도 없이 돌아가 버렸다.
“오셨어요.”
나는 나를 마중 나온 여자의 뚱한 목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오랜만이네요, 아가씨. 아직도 아가씨라고 불러 드려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쌀쌀맞은 얼굴로 내게서 뺏듯이 배낭을 가져간 여자는 노엘이 항해를 떠난 이후로 공자들의 예법 교육을 담당하게 된 가정교사 노라였다.
‘참, 이 여자는 가스파르를 연모하고 있었지.’
전생을 자각한 이후에야 눈치챈 거지만, 그녀는 유부남인 가스파르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노엘의 함선이 전복되었다는 소식에 ‘어머, 어머’거리면서도 씨익 올라가던 그녀의 입꼬리를 기억했다.
‘정작 가스파르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공자들의 담당이기에 나와는 접점이 없었지만, 가끔 마주치는 내게 분명 친절했던 노라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차가운 얼굴로 나를 아직 정리도 안 된 방에 밀어 넣었다.
“이 방을 쓰시면 돼요.”
본관에서 내가 쓰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낡은 침실이었다.
부연 먼지가 앉은 침대를 향해 아장아장 걸어가는 나를 지켜보던 노라가 즐거운 듯 흥흥, 콧노래를 부른다.
“감히 가주님을 배신하다니! 배가 참 타이밍 좋게도 뒤집어졌네.”
노엘이 암만 불륜을 저질렀대도, 그녀는 레오노라의 엄마였다.
‘물론 내 엄마라는 생각은 별로 안 들지만….’
그럼에도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그녀의 죽음이 모욕당했다는 생각에 나는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인상을 찡그리는 것을 발견한 노라가 흥분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파드득 몸을 떨며 다가온다.
“왜요, 아가씨. 제가 뭐 못할 말 했나요?”
“…….”
“돌아가신 마님은 귀부인다운 정숙함을 갖추지 못한 천박한 여자였던 거예요. 그 더러운 불륜의 결과물이 바로 아가씨고요.”
그런 못된 말을 입에 담으며 그녀는 왠지 모르게 통쾌한 얼굴이었다.
‘세 살짜리 아기에게 열등감이라도 느끼고 있었던 걸까.’
어쩐지 가스파르의 품에 안겨 있는 나를 늘 묘한 얼굴로 노려보더라니.
“무슨 마린지 잘 못 드러써. 다시 말해 바.”
나는 침대에 앉은 채 비열하게 비죽 웃고 있는 노라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가 단순히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다시 한 번 속삭인다.
“제대로 못 들으셨어요? 아가씨는 더러운,”
콱!
“꺄악!!!”
나는 가까이 다가온 노라의 머리채를 재빠르게 잡아 그녀의 이마를 날카로운 침대 기둥에 박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