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손바닥만 한 거울로 요목조목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나는 곧 절망했다.
아기 주제에 오똑한 콧대나 도톰한 입술이 매력적인, 미래가 무척 기대되는 얼굴이긴 했지만….
“눈누.”
“네, 아가씨.”
“…나, 눈 올라가또?”
눈꼬리가 새초롬하게 올라가 있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왼쪽 눈가에 선명하게 찍힌 애교점도 너무 수상해.’
“눈누, 솔찌카게 말해됴.” (룰루, 솔직하게 말해 줘.)
내 서글픈 재촉을 받은 룰루가 조금 곤란한 듯 뺨을 긁는다.
“올라가긴 올라가셨는데요…. 하, 하지만 정말 예쁜 눈이세요!”
룰루는 애써 눈꼬리를 내리기 위해 눈가를 연신 잡아당기는 내 손을 붙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전 아가씨처럼 예쁜 아기님은 살면서 본 적이 없는 걸요!”
‘…하지만 예쁜 건 중요하지 않단 말이야!’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룰루가 가져다준 거울을 너구리 꼬리처럼 오동통한 손으로 바닥에 던져 버렸다.
바닥에 엎어진 거울이 언뜻 내 얼굴을 비춘다. 쒸익쒸익 콧김을 뿜는 얼굴은 아기 주제에 악독해 보였다.
‘실버블론드에 보라색 눈 조합이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외형이다.
전생에 로판 좀 읽어 봤던 내 경험상, 적색 계열 눈은 보통 성깔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게다가 눈꼬리가 올라갔잖아!’
눈 색은 그렇다치더라도 눈꼬리까지 올라갔으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악역의 눈이다.
내가 하필 악녀로 태어난 것까지는 괜찮았다.
착한 척만 해야 하는 여자 주인공 노릇을 하는 것보다야 성질나면 성질나는 대로 싸다구를 날릴 수 있는 악녀 역할이 더 마음에 들었으니까.
문제는 내 성이 하차니아라는 것.
‘x발… 누가 들어도 하찮은 엑스트라 성이라고!’
악녀인데 엑스트라.
심지어 이 소설은 뒤늦게 딸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폭군 아빠가 키우라는 애는 안 키우고 정의의 철퇴를 미친 듯이 휘둘러 악당들을 전부 박살 내는 육아물이었다.
난 X됐다.
제1화
내가 소설 속 세상에서 환생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어언 세 살 무렵의 일이었다.
“각하, 아리나 해협에서 마님의 함선이 전복되었답니다!”
헐레벌떡 내 놀이방에 들어온 집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말을 잇는다.
“이네스 황후를 노린 생트로페 해적 놈들의 짓인 것 같습니다.”
“노엘은, 그녀는 괜찮은가?”
황후의 안위 따위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내 앞에서 잼잼 놀이를 하던 아빠가 벌떡 일어나 집사의 어깨를 붙든다.
“…황후 폐하와 함께 포로로 잡히셨습니다.”
나이 든 집사는 아빠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리나 해협, 해적에 의한 함선 전복, 황후.
나는 묘한 기시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대사인데.’
“제길.”
작게 욕설을 중얼거린 아빠가 나를 꼭 끌어안는다.
“걱정하지 마, 리니. 네 엄마는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올 테니까.”
내 엄마인 노엘은 내가 전생을 자각하기도 전에 황후와 함께 항해를 떠났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했고, 나는 엄마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크게 슬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앞에서 좀처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빠가 슬퍼하는 모습에는 마음이 아팠다.
“하, 아직 아기인 네가 나를 위로하는 건가.”
아빠의 커다란 손등을 내 작은 손으로 꾹 누르자 그가 너털웃음을 흘린다. 얇은 입술이 덧없이 올라갔다.
우리 아빠이긴 했지만, 그는 아이가 넷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미남이었다. 직업도 무려 공작 각하였으니, 새 출발하기는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빠 이름이 뭐더라?’
사용인들은 전부 아빠를 가주님 아니면 각하라고 불렀고, 오빠들은 그를 아빠라고 불렀으니 내가 아빠의 이름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아빠 이름만 알아내면 이 기시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네스 때문이다. 노엘과 여행을 가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피우더니.”
황후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모양인지, 그는 황후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이네스란 이름도 어디서 들어 봤던 것 같단 말이야.’
어디서 들어 봤는지 떠올리기 위해 잔뜩 미간을 모으는데, 아빠가 아기는 인상 찌푸리면 못 쓴다며 내 이마를 커다란 손가락으로 벅벅 문지른다.
나는 흑요석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검붉은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께서 궁금한 게 있으신가 봅니다.”
“이녜쯔?”
내 옹알이를 용케 알아들은 아빠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의 검은 고수머리가 허공에서 흔들리는 것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벌렸다.
‘고갯짓도 멋있게 하네….’
꼭, 무슨 소설에 나오는 인물처럼.
“이네스. 네 엄마의 친구이자 이 제국 황후의 이름이다.”
“이녜쯔.”
“폐하께서 그녀가 낳은 딸에게 비슷한 이름을 주었다더군. 아이네스였던가.”
‘…아이네스?’
쿵.
아빠의 중얼거림에 덜컹 놀란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한다.
나는 뒷목이 싸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나를 꼭 끌어안고 있는 아빠의 멱살을 붙잡았다.
“가쯔빠르…?”
“흠? 네 녀석이 언제 내 이름을 외운 거지?”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기인 내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한 듯, 아빠가 엄마의 실종도 잊고 환히 웃는다.
“가쯔빠르….”
“그래. 가스파르가 내 이름이다.”
“으, 으아앙-! 으앙!”
나는 바로 튀어나오는 아빠의 확답에 기겁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왜 우는 거냐, 리니.”
당황한 아빠가 나를 안고 둥기둥기를 시작했지만, 나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 버리고 말았으니까.
가스파르 하차니아,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 프롤로그에서 남주에게 처맞고 강제 하차 당하는 하찮은 엑스트라 악당의 이름이잖아!
이 내가 겨우 엑스트라라니!
아니, 본편에는 제대로 등장도 하지 않는 엑스트라의 딸이라니!
* * *
내가 인간이긴 했던 걸까.
전생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피범벅이 된 내 몸뚱이일 만큼 내 삶은 형편없었다.
고아였던 나는 정보사 출신 연구원이었던 남자에게 입양되었고,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았던 나의 양부는 나를 일종의 병기로 길러 냈으니까.
성인 남성도 울며 도망간다는 극악 난이도의 혹독한 훈련을 어린 여자아이의 몸으로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훈련만 이겨 내면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다.”
양부는 저런 개소리로 어린 나를 현혹했다.
‘나도 가족이 갖고 싶어.’
진짜 가족은커녕, 제대로 된 양육자도 아니었던 그 싸이코 새끼에게 내가 왜 목을 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아버지라고 불러 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속칭 검은 늑대라고 불리는 그림자 특수 부대 소속의 훌륭한 군인이 되었다.
주무기는 HK416. 돌격 소총을 들고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나대던 나를 미친개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날 무렵….
탕!
내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양부가 나를 제거했다.
호흡, 조준, 격발. 사격의 기본 요소 중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게 단 한 가지도 없는 주제에 그는 구부러진 손으로도 방아쇠를 거침없이 잡아당겼다.
탕! 탕!
혹시나 내가 죽지 않고 자신에게 반격할까 두려운 모양인지 확인 사살까지.
같이 산 세월이 짧지 않았는데도 그는 미안함은커녕 유감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는 나를 자신이 개발한 성능 좋은 무기로만 생각했으니까.
“아깝게 됐군. 프로젝트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
“A-168호는 폐기 처리한다.”
죽어가는 내 앞에서 혀를 끌끌 차는 그의 차가운 옆얼굴을 노려보면서, 나는 가슴 깊이 다짐했다.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절대로, 그 누구의 사랑도 갈구하지 않을 거야.’
철저히 나만을 위한 삶을 살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긴 했는데.’
내가 레오노라 하차니아로 다시 태어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한 다짐이 아닌가.
내 기억이 맞는다면, 가스파르 하차니아의 막내딸은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철저히 나만을 위한 삶을 살자고 결심하면 뭐 해? 어차피 어른도 되지 못하고 뒈질 텐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귀족 영애로 태어나서 호강 좀 해 보나 싶었는데…!’
이 소설에서 내 역할은 하찮다 못해 비참하기까지 했으니까.
딸의 죽음으로 미쳐 버린 가스파르는 주인공인 황녀를 납치하고, 그 사건을 계기로 황제는 딸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내 죽음은 황제의 부성애를 각성시키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다.
‘그 대가로 하차니아 가문은 삼족이 멸해졌지.’
나는 아기답지 못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납치 좀 했다고 멸문을 시켜?’
심지어 아이네스는 다치지도 않았다. 여자 주인공은 수많은 위기와 갈등 속에서도 절대 다치는 법이 없었으니까.
가스파르는 아이네스를 납치해 놓고 어리석은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된 협박조차 해 보지 못하지만, 황제는 충신이었던 가스파르의 배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 상황을 떠올리니 절로 이가 갈린다.
‘기껏 다시 태어났는데 어린 나이에 불치병에 걸릴 운명이라니….’
나는 무거워서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머리를 짧은 팔로 싸맨 채 끙끙 앓기 시작했다.
“리니! 왜 그래? 어디 아파?”
내가 소설 속 인물로 환생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자 내 오빠들인 실베스테르와 에녹은 아예 내 침실에 살림을 차렸다.
“아프면 룰루를 불러올까?”
나를 걱정하는 다정한 목소리의 주인은 하차니아 가문의 셋째 공자인 에녹 하차니아였다.
꿀을 녹인 것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금발의 에녹은 미소년이라는 단어가 사람으로 환생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예쁜 남자아이였다.
어느 정도 의식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된 내가 에녹을 보고 이 세계가 평범하지 않음을 감지했을 정도로.
‘저런 미모는 흔하지 않아…. 여긴 분명 책 속 세상일 거야.’
로판 애독자는 죽으면 책 속에서 환생하는 게 기정사실이었다.
특기는 비록 잠수, 폭파 및 특전 전술이었을지언정 내 취미는 안락한 전기장판 위에서 로판 읽기였으니까, 책 속 세상에 환생했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배탈이라도 난 건가.”
에녹처럼 전전긍긍하는 느낌은 없었지만, 나는 내 이마를 손으로 짚어 보는 실베스테르가 에녹만큼이나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인 탓에 깨끗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실비의 은발이 내 뺨을 건드린다.
삼남인 에녹처럼 예쁜 느낌은 아니지만, 하차니아 가문의 차남 실베스테르도 만만치 않은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막연히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리라 짐작하면서도, 내가 죽기 직전 읽었던 로판 속 세상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이런 외형과 이름을 가진 남자 형제가 주연인 로판은 읽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얘들이 엑스트라였을 줄이야.’
엑스트라니까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엑스트라 악당 형제 따위가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건가요. 엑스트라는 원래 갈발, 갈안, 흐린 인상이 정석이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