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88화 (88/88)

88.

비오스트는 조용히 허리를 굽혀, 라일라의 흉터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매끈한 살결에 입술이 닿자, 혀를 내밀었다.

비오스트의 혀가 라일라의 배에 난 흉터를 살짝 훑자, 라일라의 배가 단단하게 힘을 주는 것이 입술로 느껴졌다.

그녀가 긴장을 풀 수 있도록 비오스트는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상처를 핥아 나갔다. 마치 고양잇과의 동물이 제 새끼의 털을 핥아 주는 것처럼.

단단해졌던 라일라의 배가 다시 말랑해지고, 대신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이자 드디어 비오스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오스트는 오늘이 첫날밤이라고 말한 것을 지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었다. 마치 라일라와 함께하는 밤이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맛보았다.

어디를 만지면 라일라가 좋아하는지, 어디를 핥아 주면 그녀가 달뜬 숨을 내쉬는지, 또 어디를 깨물어 주면 라일라가 달콤한 신음을 흘려 주는지를 탐색하고 있었다.

“아!”

축축한 것이 자신의 온몸에서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라일라는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헤아리는 사람처럼 라일라의 눈이 방황했다.

온몸이 간질간질한 기분이었고, 동시에 몸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눈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처음은 아니었는데, 꼭 처음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앗!”

그리고 비오스트가 뭉텅 하고 라일라의 가슴을 베어 물었을 때, 라일라의 천장은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녀의 달콤한 신음이 기꺼워 비오스트는 한 번 더 라일라의 가슴을 깨물었다. 그러자 라일라는 다시 달콤한 신음을 내뱉으며 허리를 뒤틀었다.

이제 라일라의 눈에 천장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보이는 것은 하나의 섬광이었다.

희고, 검은 그 무언가가 지나가고 나서 라일라가 고개를 꺾어 제 몸을 내려다보자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라일라가 손을 내밀어 그 검은 머리카락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자 그것이 천천히 들렸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지만 반듯한 이마와 곧은 검은 눈썹이 보였다. 그 아래로는 조금은 굶주린 것 같으면서도 사랑을 가득 담은 황금색의 눈동자가 라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듯한 콧날은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혹은 약간 흥분한 것처럼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의 입술은 투명한 침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라일라가 사랑하는 얼굴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네 심장 소리가 들려.”

비오스트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라일라의 뽀얀 가슴에 제 뺨을 가져다 대었다. 귀를 바싹 붙이지 않아도 들릴 만큼 라일라의 심장이 쿵쿵 울리고 있었다.

“네가 살아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내가 얼마나 신께 감사하고 있는지 넌 모를 거야.”

제 뺨을 라일라의 가슴에 비비며 비오스트는 말했다.

그 목소리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에게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가련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무언가 라일라를 건드렸다.

그게 뭔지 몰라도 라일라의 안을 꽉 채우더니, 울컥 뭔가를 내뱉게 했다.

“사랑해.”

라일라는 그 말이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없으면 못살 것처럼 구는 이 남자에게 그 말을 너무나 하고 싶었다.

“…….”

라일라의 고백을 들은 비오스트는 고개를 들고,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말간 황금색의 눈동자가 설핏,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해 봐.”

비오스트는 몸을 재빨리 끌어 올렸다. 그리고 라일라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정면에 가져다 놓았다. 라일라의 눈이 바로 눈앞에 보일 정도로 바싹.

“사랑해, 비오스트.”

밀고 당기기를 모르는 라일라는 고백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었다.

“나도, 라일라.”

비오스트의 이마가 라일라의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 비오스트의 코끝이 부드럽게 라일라의 코를 스쳤다.

비오스트가 코로 숨을 조금 들이마시자, 라일라의 향기가 가득히 비오스트를 채워 나갔다.

화사한 꽃향기였다. 따스한 체향이었다. 달콤한 숨의 향기였다.

아니다.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저 라일라의 향이었다.

라일라의 향기가 비오스트의 안으로 들어와 빈틈없이 꽉 채웠다.

“널 사랑해.”

그리고 그 말을 끝내고 나서는 비오스트의 입술이 라일라의 입술에 닿았다. 닿은 입술은 그저 입술이 아니었고, 나눠 가지는 체온은 그저 체온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이었으며, 기꺼이 나누어 주고 싶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상대에게 알리고 싶은 자신의 진심이기도 했다.

비오스트의 말이 옳았다. 오늘이 첫날밤이었다.

밝아오는 아침은 두 사람이 함께하는, 새로운 날의 시작이었다.

* * *

라일라가 아침에 눈을 뜨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제 옆에 있는 사람을 확인한 것이었다. 짙은 속눈썹을 드리우고 잠이 든 비오스트를 향해서 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만져졌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도, 매끈하고 흰 뺨도, 평온한 숨을 내뱉고 있는 입술도, 모두 만져졌다.

그제야 라일라는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라일라?”

감겨 있던 눈꺼풀이 열리고, 황금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새끼가 어미를 찾듯, 그것은 곧바로 라일라를 찾았다.

“일어났어?”

그리고 라일라가 제 옆에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자, 안심이 되는 것처럼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있어?”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라일라의 손을 붙잡아 손바닥에 가벼운 키스를 하며 비오스트는 물었다.

“이상해서.”

“내 얼굴이?”

비오스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첫날밤을 보낸 아침에 자신의 부인에게 듣는 첫 마디가 얼굴이 이상하다는 말이라면 당연히 그럴 법도 했다.

더욱이 자신은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보인 얼굴이 라일라의 얼굴이라서 매우 행복감을 느꼈다면 말이다.

“아니.”

어쩐지 토라진 것 같은 비오스트의 얼굴과 말투에 라일라는 살짝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버림받은 아이인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라일라가 말한 ‘이렇게’라는 단어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너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또 행복하게,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꿈이 아니야.”

현실의 감촉을 느껴보라는 듯이, 비오스트는 다시 한번 라일라의 손바닥에 제 입을 맞췄다.

느껴졌다.

촉촉한 입술이, 다정한 애정이, 손바닥을 통해서 전해져 왔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래.”

“당신이?”

“그래. 나 역시 버림받은 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과는 달리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이 황궁에서 모든 것이 풍족한 삶을 누렸다.

남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칭송받는 삶을 살았을 황태자인 비오스트가 스스로 버림받은 아이를 자처한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가 외딴 오두막에 버려진 아이였다면, 나는 이 황궁에 버려진 아이였어. 어머니는 날 위해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날 사랑하지 않았지. 난 여기서 혼자였어. 아무도 없었지.”

비오스트는 감정적으로 버려진 아이였다. 외롭고, 고독한, 사랑받지 못한 아이.

애정에 굶주린 아이는 복수를 꿈꿨고, 버려진 아이는 세상을 버리기로 했었다.

아이는 그렇게 짐승으로 자라났다.

“네가 날 구해 준 거야.”

짐승이 되어 버린 남자를 구원한 것은 엄한 채찍도, 무서운 조련사도 아니었다. 그저 한 송이의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는 꽃이었다.

오직 그 꽃의 향기만이 짐승을 온순하게 만들 수 있었다.

“라일라, 넌 항상 내게 네 구원자라고 했었지?”

어느새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손을 놓고 있었다. 대신 아까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라일라의 머릿결을 쓰다듬고, 뺨을 매만지고, 입술을 덧그리고 있었다.

“사실은 아니야. 네가 바로 나의 구원자야.”

자신 앞에 라일라가 있는 것이 꿈만 같은 것처럼.

그녀의 실체를 눈으로 보고, 느껴야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처럼.

“아니야. 너야말로 나를 그 오두막에서 구해 줬잖아.”

왜인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비오스트의 고백을 듣자 라일라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청아한 파란 눈에서 눈물이 똑 하고 흘러내리자, 비오스트는 다정하게 그 눈가를 쓰다듬었다.

“네가 나의 구원자야. 네가 날 구해 줬어. 그 시궁창에서, 그 절망에서, 네가 날 구해 준 거야. 비오스트. 네가 날 구했어.”

라일라는 몇 번이나 그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닦아 내도 다시 샘솟은 투명한 눈물에 비오스트는 조용히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눈물은 짜고, 달았다.

“나의 구원자, 나의 평생을 함께할 나의 구원자.”

방 안에 울려 퍼진 속삭이는 목소리는 라일라의 것 같기도 했고, 비오스트의 것 같기도 했다. 사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너를 사랑해.”

버림받은 아이는 자신만의 구원자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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