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85화 (85/88)

85.

“너무하십니다.”

수리는 뾰로통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분한 마음으로 밤새워 뒤척인 자신과는 달리 아주 푹 잔 것처럼 뽀송뽀송해 보이는 비오스트를 보자 한마디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손가락질 하나에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마법의 손가락을 가지신 황제 폐하께서는 어젯밤 사랑하는 여자의 곁에서 아주 푹 주무신 게 분명했다.

“뭐가.”

자신을 쳐다도 보지 않고 대답하는 비오스트의 모습에 수리는 더욱 배알이 뒤틀렸다. 국무를 본답시고 서류를 들여다보고는 있지만, 그가 오전에 이미 다 읽고 결정마저 내렸으리라는 것을 수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야 황제가 정무를 너무 대충 본다고 대신들이 반발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시간이 되면 재빠르게 사인을 해치우고 제 여자의 품으로 가 버릴 수 있을 테니까.

“어젯밤에 말입니다. 유모님을 갑자기 불러내셨지 않습니까?”

그제야 비오스트가 수리를 쳐다보았다. 힐끗 보는 그 시선에는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는 궁금함도 없었다. ‘근데? 뭐?’ 정도의, 그야말로 힐끗이었다.

“유모에게 유모 일을 시키려고 불렀지.”

이미 비오스트의 시선은 다시 서류를 향해 있었다. 수리의 항의는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 유모에게도 사생활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 사생활은 자신이 포함되어 있었고 말이다.

“수리. 네가 요즘 할 일이 많이 없는 모양이야.”

수리의 작은 항의를 듣고 있던 비오스트는 무심하고 심드렁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서류 더미를 뒤적거리더니, 그중 한 묶음을 끄집어냈다.

“마침 잘 되었어. 오늘 이걸 너에게 주려고 했었는데, 할 일이 없는 걸 보니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겠군.”

“이게 뭡니까?”

입으로는 질문을 했지만, 손은 정직하게도 이미 비오스트가 내민 서류를 받아 들고 있었다.

“네가 할 일.”

비오스트는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툭 말을 던지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지금 자신이 공식적인 업무를 종료하면 어떨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말이다.

아직 너무 일렀다. 적당히 평균적인 시간에 맞춰 주는 것이 뒷말이 없다는 것을 비오스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라일라와 차를 한잔 마시고 오면 어떨까?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비오스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잠시만요, 폐하.”

그가 준 서류를 살펴보고 있던 수리는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이걸 다 저더러 처리하라는 말씀입니까?”

“원래는 적당히 일을 나눌까 했는데 네가 한가해 보이니 네가 다 해도 될 것 같아서. 내 결정이 필요한 것은 이미 다 적어 두었어. 세부적인 사항만 네가 해결하면 될 거야.”

“하지만 이걸 저더러, 전부, 동시에요?”

“설마. 그걸 어떻게 동시에 처리하겠어.”

비오스트의 말에 수리는 잠시 안도감을 느꼈다.

“4주의 여유를 주지.”

“네?”

비오스트의 말에 수리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농담을 하는 건가 싶었다.

그가 수리에게 맡긴 것은 아주 중요한 것들이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지병으로 인하여 급사한 선황을 대신하여 급히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은 비오스트의 정식 대관식, 사적인 사유로 황태자비에 미처 책봉되지 못했던 라일라의 황후 책봉식, 황제와 황후의 결혼식,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플로랜스의 황태자 책봉식까지.

하나에 4주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모자를 커다란 국가 경조사를 고작 4주 만에 전부 처리하라고 비오스트는 말하고 있었다.

“세부 사항만 확인하고 준비하면 돼. 중요한 것은 내가 결정해 두었으니 말이야.”

그 세부 사항이라는 것이 산더미같이 많은 복잡하고 귀찮은 것들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비오스트는 힘든 것은 제가 다 해 두었으니 간단한 것만 처리하면 된다는 것처럼 뻔뻔스럽게 말했다.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침착하게 수리는 항의했다.

“그래?”

“네. 이것은 매우 큰 제국의 행사입니다. 4주 만에 완벽하게 준비를 끝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가 성격이 매우 지랄 같아서 4주 만에 안 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를 텐데? 듣기론 그는 일부 귀족들이 그의 아내와 아들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것에 매우 불만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빠르게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더란 말이야?”

참으로 골치 아픈 문제라는 듯이 비오스트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폐하!”

“수리.”

비오스트는 뭔가 더 말을 하려는 수리의 입을 조용히 다물게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억울해 죽겠는데, 말도 못 하는 불쌍한 제 시종을.

“미래의 재무대신께서 이 정도 능력은 보여 주셔야지.”

“……네?”

뜻밖에 말에 수리는 멍청하게 되물었고, 비오스트는 그저 빙긋이 웃었다.

“황실의 서열이 정리되고 나면, 정식 임명장을 받게 될 거야.”

“네?”

“황실 가까운 곳에 재무대신의 관저가 있었지?”

“…….”

“플로랜스가 젖을 뗄 때쯤 되면 유모는 출퇴근하는 것도 괜찮겠군. 집이 가깝다면 말이야.”

“폐하.”

진행되는 대화를 끊은 것은 수리였다.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지어니!

“3주 이내에 처리하겠습니다.”

두툼한 서류를 옆구리에 낀 수리의 두 눈이 번쩍였다.

* * *

“어떤 것이 좋으십니까?”

“어…….”

라일라는 아침부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른 시간부터 비오스트의 옆에 착 붙어 있어야 할 수리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가 혼자가 아니라 디자이너들과 그들의 예술 작품들을 대동한 것이 두 번째 이유였으며, 그들이 라일라에게 계속해서 선택지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 세 번째 이유였다.

“그게…….”

라일라는 말끝을 흐리며 눈앞의 것을 들여다보는 척을 했다. 화려하고 어여쁜 드레스가 여러 벌 그곳에 있었지만, 라일라를 고를 수 없었다.

오두막에 살 때는 누군가 입다 버린 것 같은 낡은 옷들을 아무거나 입었고, 황궁에 들어와서 누군가가 입혀 주는 대로 드레스를 입었을 뿐인 라일라가 갑자기 웨딩드레스를 고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것을 입고 결혼식과 황후 책봉식까지 한다고 하니 부담스러워서 더 고를 수가 없었다.

“음…….”

그리고 라일라가 망설이자 속이 바싹바싹 타는 것은 수리였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었다. 오전 중으로 결정해서 그 드레스를 디자인한 디자이너를 불러들이고, 라일라의 몸에 꼭 맞게 새로 드레스를 맞춰야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참석할 인원을 결정해야 했고, 장소가 될 신전의 상태도 점검해야 했다. 더불어 식을 진행할 고위 신관과 의논해야 할 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그는 시간이 없었다!

“이건 어떠십니까?”

결국 참다못한 수리가 드레스를 하나 골라서 라일라에게 권했다. 물론 아무거나 고른 것은 아니었다. 여기 있는 드레스들은 이미 그가 가장 뛰어난 디자이너들에게 의뢰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나온 것으로 딱 다섯 벌을 간추려서 온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좋아.”

수리의 선택에 라일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보석입니다.”

“어……”

라일라의 눈이 다시 바빠졌다. 그리고 수리는 속으로 작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속으로만.

“아!”

뭔가 발견한 것 같은 라일라의 외마디에 수리는 눈을 반짝였다. 예물은 비교적 빠르고 쉽게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에서였다.

“플로랜스가 칭얼거리네. 배가 고픈가?”

라일라는 몸을 휙 돌렸다.

“아, 아니! 잠시만요, 라일라 님. 지금 급합니다.”

“아니. 플로랜스보다 급한 건 없어.”

수리의 다급함을 무시하며 라일라는 그대로 플로랜스가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제야 수리는 생각해 냈다.

라일라가 그저 순한 시골 아가씨나, 고분고분한 귀족 영애가 아니었다는 것을.

“하아……”

이 황제 부부는 자신을 말려 죽이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수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시간은 아주 쏜살같이 흘러갔다.

잔머리의 대가이자, 뛰어난 절약 정신을 가진 미래의 재무대신께서 내놓은 방안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치운다’였다.

그의 계획은 이러했다.

우선 비오스트의 대관식이 먼저였다.

어차피 여기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라이언 제국의 제1 황위 계승 서열이었으며, 황태자였던 그는 정식 대관식만 없었다 뿐이지 이미 황제였으니 말이다.

그다음에는 결혼식이었다.

여기에는 조금 토를 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발렌시아 가문이라는 것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고, 시골 남작의 딸보다 자신의 딸이 뭐가 부족하냐며 불평을 해 댈 귀족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차피 온라이언은 외척의 힘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 편이었고, 상대적으로 황실의 힘이 훨씬 강했으므로 정식 대관식을 치른 황제의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는 황후 책봉식이었다. 황제와 결혼을 한 반려자이니 황후로 당연히 책봉되어야 한다는 논리적 흐름에 따른 순서였다.

왜 이것이 마지막이었냐면, 플로랜스의 황태자 책봉식은 조금 미루는 것이 좋겠다는 수리의 설득을 비오스트가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에 그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말한 것은 분명 4개였고,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해야만 재무대신 자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수리를 협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수리가 꺼내 든 카드에 결국 비오스트는 응낙하고 말았다.

어이없게도 그 카드는 라일라가 피곤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몸이 약한 라일라이고, 3주 안에 준비를 마쳐서 한 달 뒤로 모든 식을 잡더라도 그녀가 다 회복이 되었다고 확신할 수 없는데, 무리하게 진행하면 라일라의 몸에 부담이 될 것이라는 사유에 비오스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눈치 빠른 수리는 이제 남의 말이라곤 듣지 않는 절대권력의 황제를 설득할 수 있는 열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바로 ‘라일라’였다.

세상 누구보다도 강한 사내는, 제 부인에게는 너무나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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