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78화 (78/88)

78.

성한 팔로 팔베개를 해서 라일라를 눕히고, 배 때문에 모로 돌아누운 그녀의 향기를 맡다가 비오스트는 설핏 잠이 들어 버렸었다.

새벽 달빛이 어스름하게 오두막을 비출 때, 그가 깨어난 것은 무슨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흐아……. 읏…….”

입술을 깨물고 참고 있는 것같이 숨죽인 앓는 소리에 비오스트는 바로 제 옆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창백한 금발이 들썩이고 있었다.

“라일라?”

혹여 자는 그녀를 깨우는 것이 아닐까 해서 비오스트는 조심스럽게 라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비오스트의 숨에 라일라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 비오스트의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라일라의 귀밑머리가 창문 너머의 달빛을 반사해서 반짝이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만지자 손끝으로 축축한 땀이 만져졌다.

비오스트가 들은 것은 라일라의 신음이 맞았다.

“라일라!”

“흐읏!”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흔들자, 숨죽였던 신음이 더욱 커졌다. 비오스트는 팔베개를 해 주고 있던 팔을 빼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친 머리가 울리고, 순간 현기증마저 돌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라일라를 살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 살짝 돌리자, 라일라의 몸은 힘없이 돌아갔다.

“이런…….”

그러자 비오스트의 눈에 보인 것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꼭 깨물고서 고통을 참아 내고 있는 라일라의 모습이었다.

분명 몇 시간 전에 자신과 입을 맞추고,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던 얼굴이 지금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라일라, 어디가 아픈…….”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오스트는 답을 찾았다.

어디가 아프냐고 굳이 물을 것도 없었다. 라일라가 아픈 곳은 배였고, 배 속의 아이가 라일라를 아프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그저 아는 것이 아니었다. 비오스트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비오스트가 지나간 날들을 후회한다고 해서 그가 라일라에게 저질렀던 일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죽어 가고 있었다.

“당장 의사를 불러오지.”

비오스트가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일으키자 다시 깨질 듯한 두통이 밀려왔고, 메스꺼움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비오스트는 제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했다. 라일라가 먼저였다.

“괜찮아.”

미약한 힘이 비오스트를 붙들었다. 달빛에 비친 라일라의 가는 팔은 금세라도 부러질 듯이 연약해 보였다.

“저기, 약이 있어.”

라일라의 손가락이 구석에 있는 선반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가쁜 숨을 참아 가며 겨우겨우 대답하는 주제에 라일라는 그렇게 말했다.

“고작 약으로 해결될 것 같지 않아. 당장 의원을 부르는 게 좋겠어.”

“그런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

라일라의 말에 말문이 막힌 것은 비오스트였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그를 불러온다고 한들,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근본적인 치료는 하지 못하고 그저 지금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진통제를 줄 것이다.

“…….”

비오스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머리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자신의 뒤에서 라일라의 신음이 들릴 때마다 느껴지는 가슴의 통증이었다.

라일라가 알려 준 선반에 있는 약과 물을 가지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을 때, 라일라는 끙끙거리며 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물을 마시게 하고, 약을 넘기게 하자마자 라일라는 제가 가진 힘을 다 썼다는 듯이 풀썩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리 와.”

자리에 누운 라일라가 제 옆자리를 눈으로 가리켰다. 비오스트는 순종적으로 그녀의 옆에 누웠다.

라일라의 미간은 아직 찌푸려진 채였지만, 그녀의 입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비오스트가 걱정할 것은 없다는 듯이.

“읏!”

하지만 그 허세는 금세 깨질 것이었다. 또다시 찾아온 통증에 라일라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라일라!”

비오스트는 허겁지겁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붕대를 감은 비오스트의 손안에서 작고 여윈 손이 잘게 떨렸다.

“하아…… 하아…….”

라일라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통을 감내하는 동안, 비오스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녀의 손을 잡아 주고 얼굴의 땀을 닦아 주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괜찮아질 거야.”

조용히 속삭이며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차라리 자신이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강한 육체 따위 필요 없었다. 재규어로 변하는 능력도 필요치 않았다.

지금 비오스트가 원하는 능력은 아픈 자를 치유하거나, 자신이 대신 아플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리하여 이 고운 얼굴이 더는 찌푸려지지 않기를 원했다. 끙끙거리는 신음이 더는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라일라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소를 지었으면 했다.

“내가 책임지겠어.”

비오스트는 라일라를 바투 안았다. 그리고 제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 * *

수리가 마을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한밤중이었다. 그의 말로는 어제 밤새 말을 달려 새벽녘에 겨우 황궁에 도착했고, 쉬지도 못하고 그대로 마차를 타고 온 것이라며 아주 생색을 내며 말했다.

그 마차 안에서 아주 푹 잤는지 수리의 뒤통수가 납작하게 눌려 있었지만, 비오스트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의 말대로 마차치고는 아주 일찍 도착한 편이었다.

“지금 바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폐하의 상태가 장거리의 여행을 하기에는…….”

거기까지 말한 황실 의원은 이내 입을 닫았다. 안 된다는 끝마무리를 하기에는 자신을 노려보는 비오스트의 눈빛이 너무 살벌한 까닭이었다.

“난 괜찮아.”

의원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 놓고 나서 비오스트는 수리를 향해서 말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옷을 갈아입고 출발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한밤중인데요?”

“상관없어. 라일라를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입궁하는 것이 나아.”

“하지만…….”

“수리, 준비하도록 해.”

비오스트는 더없이 단호했다. 어젯밤 라일라가 아픈 것을 봐서 더욱 그러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고 해도 황궁까지는 마차로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였다. 그는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 라일라 님이 주무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

수리의 말에 비오스트는 처음으로 멈칫했다.

그랬다.

이 추운 겨울날의 한밤중에 제국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황제 폐하와 그의 측근인 시종, 그리고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춘 황실 의원이 서 있는 곳은 오두막 앞의 야외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라일라가 자고 있으니 그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 나가서 이야기하겠다는 비오스트의 명령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추운 겨울날 한밤중에 따뜻한 오두막에서 쫓겨난 모양새로 오돌오돌 떨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라일라 님을 깨울까요?”

“……아니.”

비오스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라일라를 깨우지 않기로 했다.

어젯밤의 라일라는 조금도 자지 못하고 아픔에 시달렸다. 그 여파로 낮에도 시름시름 앓으며 보냈다. 그러다 겨우 초저녁에 잠이 든 라일라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통증의 주기는 3~4일 간격이었다. 갑작스럽게 그 주기가 당겨지지 않는다면 아직 시간은 있었다.

“그럼 역시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새벽으로 하지.”

지금 라일라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유 부릴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으니, 조금 일찍 깨우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출발할 때 선발대를 보내 황궁에 신관과 마법사를 대기시켜 놓도록.”

“아! 이전의 그분들을 말입니까?”

이전에 라일라가 쓰러졌을 때 불러들였던 자들을 말하는 것인가 싶어 수리가 묻자, 비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오스트가 생각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필요했다.

* * *

“네?”

신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마법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황실의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각기 다른 직업군이었지만, 황제의 어이없는 명령 앞에서 세 사람은 똑같은 반응을 내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 외에는 다른 반응이 나올 수 없었다.

차마 황제에게 그게 대체 무슨 미친 소리냐며 욕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폐하,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신관이었다. 신을 모시며 수련을 한 시간이 긴 그가 평정심을 가장 먼저 되찾았다.

“어째서? 평소에 그대가 하는 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일 텐데? 똑같은 치료이지 않나?”

“기본적으로는 그러하나, 지금 폐하께서 하시려는 일은 생전 처음 시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는 법이지.”

비오스트는 신관의 말을 가벼이 넘겼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볍게 무시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 역시 말씀하신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불가능을 말한 것은 마법사였다.

“지난번에 한 일과 똑같은 일인데 왜 안 된다는 거지?”

“물론 제가 지난번에 폐하께서 명하신 일을 훌륭히 수행해 드렸지요. 기본적으로는 그 일과 같기는 합니다만, 대상의 상태가 다르지 않습니까?”

“기본적으로 같으면, 똑같이 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게…….”

마법사가 뭐라고 토를 달기 전에 비오스트는 이미 고개를 돌린 후였다.

“아…….”

너도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시선으로 비오스트가 황실 의원을 쳐다보자 그는 되레 할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할 것이라는 뜻이 시선에서 강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어는……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신전의 신관과 마탑의 마법사와는 달리 그는 황궁의 황실 의원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 그는 처음부터 황궁의 주인에게 백기를 들었다.

그러자 비오스트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거두어 주었다.

“잘해 보도록 합시다.”

바로 조금 전,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를 늘어놓았던 황제는 제법 정상적인 척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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