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아주 조심스럽게 라일라의 손끝이 비오스트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아직 덜 마른 머리의 촉촉함이 라일라의 손끝에 느껴졌고, 그가 제 옆에 있다는 확신을 주는 감각에 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오스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져 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의 눈은 당연하다는 듯이 라일라의 모습을 좇았고, 파란 눈과 마주치자 찾았다는 듯이 기쁘게 미소 지었다.
“아파?”
라일라의 물음은 원초적이었고, 비오스트는 슬쩍 고개를 흔들어 그 말을 부정했다.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은 라일라도 비오스트도 알고 있었다.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의 머리에 난 상처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피부가 찢어진 것이 아니라 두개골이 움푹 팰 만한 상처였다. 황실 의원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살아 있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웅얼거릴만했다.
거기다가 손에 난 상처도 하나하나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너무 많다는 것도 문제였다. 너무 오랜 시간 체온이 떨어져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말을 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당장 수도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쩔 수 없이 수리가 먼저 수도로 귀환해야 했다. 비오스트와 라일라는 그가 마차를 가지고 돌아오면 상태를 봐서 돌아가기로 했다.
그동안 비오스트는 라일라가 살고 있던 오두막에서 지내기로 했다. 시골 마을인지라 그가 머물 만한 귀족의 저택이 없기도 했지만, 라일라가 편안함을 느끼는 곳에서 머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비오스트의 배려였다.
“아파 보여.”
비오스트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며 라일라는 말했다. 말라붙은 피와 상처를 감싼 붕대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넌 좋아 보여.”
처음 라일라를 보았을 때 느꼈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자, 라일라는 피식 웃었다. 제가 생각해도 황태자궁에서의 마지막 몰골은 처참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 이름을 지었어.”
라일라의 말에 비오스트는 시선을 내려 라일라의 부른 배를 쳐다보았다.
“너한테 지어 달라고 했었는데, 내 마음대로 해서 미안해.”
솔직히 말해서 라일라는 비오스트에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아이의 이름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더욱 솔직히 말하자면, 라일라가 방금 그 이야기를 할 때까지도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름이 뭔데?”
지금이 처음이었다. 자신과 라일라의 아이 이름이 무엇일지 궁금해하는 것은.
“플로랜스.”
“플로랜스?”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오스트는 새삼스럽게 라일라의 배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이 안에 아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 비오스트가 느끼고 있었던 것은 그저 자신을 황위에 올려 줄 도구였고, 그다음에는 라일라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는 악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라일라가 배 속의 아이에게 왜 사랑을 느끼는지, 왜 소중히 여기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기도 했다.
“당신 어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지?”
“……플로라.”
조심스럽게 비오스트는 그 이름을 제 입에 올렸다.
우습게도 비오스트는 플로라의 이름을 아버지에게서 듣지 못했다. 그에게 플로라는 항상 ‘네 어머니’였다. 혹은 ‘그녀’였다.
황제는 한 번도 플로라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그 이름을 이미 잊었다는 것처럼.
비오스트에게 플로라의 이름을 알려 준 것은 르미에르였다. 그는 항상 사랑스럽고, 그립다는 듯이 플로라의 이름을 불렀었다.
플로라는 아주 아름다웠고, 아주 상냥했어.
플로라는 용감하고, 강인했어.
플로라는 비오스트 널 사랑했단다.
그래서 비오스트가 더욱 자책했다는 것을 르미에르는 미처 몰랐었다.
아름답고, 상냥한, 용감하고, 강인한, 그리고 자신을 사랑했던 어머니를 죽인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생각에 제 핏줄을 증오하게 되었다는 것도.
“여기가 그분이 살았던 곳이래.”
“…….”
라일라의 말에 비오스트는 새삼스럽게 눈을 굴려 오두막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여길 처음 보았을 때 라일라의 오두막과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은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마을에서 떨어져 있었고, 주변에 다른 집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숲 어귀에 있는 것도 비슷했다.
“아, 그분은 나처럼 쫓겨난 게 아니었어. 산지기의 딸이었고, 원래 집이 여기였대.”
라일라는 비오스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이 얼른 르미에르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렇군.”
그러고 보니 겉으로는 비슷할지 몰라도 안의 분위기는 라일라가 살았던 곳과 매우 달랐다. 낡긴 했지만, 가구들은 확실하게 수리와 관리가 되어 있는 것 같았고, 다른 가재도구들도 쓰다 버린 것들이 아니라 깨끗하고 깔끔했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아늑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럼 플로랜스는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온 건가?”
“응.”
대답한 후에 라일라는 조금 주저하는 듯했다. 더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는 모습에 비오스트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었다. 네가 어떤 말을 하든지 다 들어 주겠다는 눈빛으로 라일라를 바라보면서.
“난 네 어머니가 나랑 똑같은 생각이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이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꼭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말이야.”
라일라는 비오스트의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배에 얹었다. 둥그런 배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오스트의 손에 착 달라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라일라.”
조용한 부름에 라일라는 대답 대신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다치고, 아픈, 상처투성이의 그를.
자신이라고 다를까? 아프고 아팠던 과거를 지닌 라일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더 애틋한 것은 바로 그래서였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만은 사랑했다.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았지만, 그녀만은 사랑해 주었다.
오직 서로가, 서로만을 사랑할 뿐이었다.
“널 사랑해.”
배 속의 아이가 살짝 꿈틀거리는 것이 비오스트의 손에 느껴졌다.
처음으로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라일라를 사랑해서, 그녀를 사랑해서 한 행위로 만들어진 아이였다. 어떠한 일을 위한 도구나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부산물이 아니라, 오롯이 둘이 사랑을 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비로소 비오스트의 머리에 꽂혔다.
그러자 비로소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 아이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나도. 널 사랑하고 있어.”
되돌아온 고백에 비오스트는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빠듯한 충만감이 비오스트의 안에서 차올랐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안을 꽉 채웠을 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다.
이게 행복이라는 것이었다.
이게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키스하고 싶어.”
비오스트의 솔직한 말에 라일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 라일라 역시 그것을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오스트는 지금 환자였고, 일어날 수 없었다. 자신이 움직여야 했다.
라일라는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비오스트의 배게 옆에 손을 짚고 몸을 기울이자 비오스트의 눈이 기대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오래도록, 정말 오래도록 기다린 순간이었다.
살짝 라일라의 입술이 닿자, 아직도 비오스트의 입술에선 차가움이 느껴졌다. 기본적인 처치 후에 오두막에 온 지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체온이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아 라일라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그를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다.
라일라는 그대로 비오스트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제 체온이 비오스트에게 옮아 가기를 바라면서.
그러자 호응이라도 하듯, 비오스트 역시 라일라의 윗입술을 빨아 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라일라.”
아직 부족했다.
비오스트는 떨어지려는 입술을 붙잡고 싶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좀 더 라일라를 원했다.
그리고 사실, 라일라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자리를 다시 잡으려 한 것뿐이었다. 아기에게는 참으로 미안했지만, 볼록 튀어나온 배가 방해가 되었다. 라일라의 가느다란 팔은 계속 제 몸을 지탱하는 것도 힘들어서 비오스트의 옆에 누우려고 잠시 입을 뗀 것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만두려는 마음도 없었지만, 비오스트가 애타는 듯이 제 이름을 부르자 라일라는 더욱 그를 원하게 되었다.
그의 옆에 몸을 뉜 체, 라일라는 다시 그의 뺨을 쓸었다. 그리고 비오스트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두 번째가 오히려 더 급했다. 비오스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일라의 입술을 제 혀로 벌렸고, 그 사이를 급하게 파고들었다.
그 안은 조금 전 느꼈던 라일라의 입술만큼이나 따뜻했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차가웠던 혀가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오스트는 이내 그 따뜻한 안을 탐하기 시작했다. 단단한 치아의 너머로 혀를 밀어 넣고, 미끈한 라일라의 안이 그동안 잘 있었는지를 검사하듯이 모두 훑었다.
얌전히 있던 라일라의 혀를 깨워 힘껏 제 혀를 문지르고, 휘감았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느새 차가웠던 비오스트의 입술은 뜨거운 숨을 내뱉고 있었다.
“하아……. 라일라…….”
더운 숨이 라일라의 이름이 되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삼켜 버렸다. 그 숨도, 그 이름도, 그 이름의 주인도.
말캉한 라일라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짓이기고, 다정하게 그녀의 혀를 희롱하고, 그러다 마음이 흘러넘쳐 아플 정도로 빨아 당겼다. 그 안에 있는 다디단 체액도 모두 소유하고 싶어서 싹싹 핥아먹었다.
행위가 반복되는 동안 점점 비오스트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갔다.
그동안 얼마나 라일라를 찾아 헤맸는지도, 얼마나 애타게 그녀를 기다려 왔는지도, 지난 아픈 기억마저도 모두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비워진 자리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라일라와 자신, 둘뿐이었다.
“비오스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작은 입술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아…….”
달뜬 소리도 아름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라일라.”
비오스트는 다시 한번 라일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이 키스로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비오스트는 알았다.
아무리 키스를 해도, 또 아무리 그녀를 가져도 자신은 결코 만족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깨달았다.
언제나, 항상, 처음처럼 라일라를 원할 테니까.
그녀를 향한 욕망에는 끝이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