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작은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평생 한 번 뵈면 크나클 영광인, 귀하디귀하신 몸께서 이곳에 비밀리에 오셨다는 것에 한 번, 그 귀하신 몸이 마을의 산에서 실족하여 행방불명이라는 것에 또 한 번,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그분을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에 난리가 났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을의 인원들이 총동원되었다. 눈이 멀쩡하고, 걸을 수만 있다면 세 살 어린아이부터 여든 꼬부랑 노인까지 계곡을 뒤지고, 산을 뒤지고, 계곡 하류의 강변까지 샅샅이 뒤졌다.
해가 까무룩 산 너머로 넘어갈 시간이 되자 사람들의 얼굴에는 더욱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직 찾지 못한 것이냐?”
답답해 죽겠다는 목소리로 수리는 수행원을 닦달했다. 노을빛이 비치는 계곡은 아름다웠지만, 수리의 눈에는 그게 아름다움이 아니라 곧 어둠이 닥쳐와 수색을 어렵게 만들 끔찍한 저주처럼 보였다.
“빨리 찾아야 한다!”
지금은 겨울이었고, 물은 차가웠다. 제아무리 튼튼한 몸을 가진 비오스트라 할지라도 이대로는 위험했다. 동사하거나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아직 그가 죽지 않았다면 말이다.
* * *
“자, 이것 좀 들어요.”
라일라는 제 앞에 들이 밀어진 오렌지빛의 예쁜 차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따뜻한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별일 없을 거예요.”
소피는 걱정 말라는 듯이 라일라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러다 혹시 이게 무례한 행동일까 생각하며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라일라의 등을 쓸어 주었다.
황제의 부인, 혹은 황제의 아이를 가진 사람에게 자신이 이러는 것이 무례일지는 몰라도, 남편의 생사를 모르는 가여운 여자에게는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왜 그랬을까요?”
고개 숙인 라일라가 작게 웅얼거렸다.
“우리는 왜 항상 이렇게 어긋날까요?”
라일라에게 비오스트가 전부였을 때, 그는 라일라를 뿌리쳤다.
비오스트가 라일라를 간절하게 바랐을 때, 라일라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 비오스트가 없어지고 난 지금, 라일라는 그를 간절히 원했다.
그가 살아 있었으면 했다. 그의 곁에서 자신도 살아 있기를 원했다. 포기했던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이 라일라의 안에서 넘실거렸다.
‘비오스트…….’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도 자신에게는 허용되지 못한 일 같아서, 라일라는 속으로만 그 이름을 불렀다.
“아기가 아빠를 지켜 줄 거예요.”
소피의 말에 라일라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랜스가요?”
“그래요. 아기들은 태어나기 전에는 영혼이 자유롭답니다. 엄마 배에서 나와 세상 구경도 하고, 엄마 아빠도 미리 보고 그러죠. 그렇지 않으면 엄마 배 속에서 너무 갑갑하지 않겠어요?”
소피의 동화 같은 이야기에 라일라는 눈을 깜박였다.
“플로랜스가 찾아 줄 거예요.”
라일라는 고개를 숙여 제 배를 바라보았다. 예쁘게 둥그런 배를.
살며시 손을 가져다 대자 조금 마음이 평온해지는 기분이었다. 아기가 정말로 그를 지켜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무사하기를, 라일라는 간절히 바랐다.
* * *
비오스트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수면에 닿은 순간 느껴진 것은 차가움이 아니라 강렬한 통증이었고, 이어 어딘가에 머리가 세게 부딪치자 통증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한겨울의 물속이라 얼음장같이 차가워야 했지만, 비오스트는 그것마저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저 편안했다.
유영하듯 물속에서 흔들리며 비오스트는 안온함을 느꼈다. 마치 태어나기 전, 안전한 어머니의 배 속 양수에서 헤엄을 치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숨조차 쉬지 않고 있는 극상의 편안함 속에서 비오스트의 몸이 부드럽게 물속에서 흔들리다 툭 하고 그의 손가락이 돌이끼를 건드렸다. 하지만 비오스트의 육체는 반응하지 않았다.
제 몸 또한 물의 일부인 듯,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끝이다.’
점점 의식마저 몽롱하게 물속으로 잠식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비오스트는 죽음을 기다렸다.
자신의 마지막이 한 여자를 구하고 죽는 것이라니, 그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결말이었다.
제 아비에게 반항하다가 죽거나, 스스로 온라이언의 이름을 끝장내기 위해서 자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어딘지도 모르는 시골 의 계곡에서 죽을 줄이야.
‘라일라…….’
다행이었다.
그녀가 떨어지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라일라는 마지막 순간에 비오스트를 걱정했다.
그러니 용서받았다고, 제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오스트는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비오스트가 편안히 안식을 맞이할 수 있는 이유였다.
‘라일라.’
순간, 비오스트의 손가락이 꿈틀했다.
편안하게 아래로 가라앉고 있던 그의 의식도 어딘가에 걸린 것처럼 덜컥 멈춰 버렸다.
‘라일라.’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대로 끝을 낼 수 없었다.
아직 라일라는 위험했다. 비오스트가 보았던 부른 배가 그것을 증명했다.
‘라일라!’
번쩍 비오스트의 눈이 떠졌다.
갑작스럽게 모든 현실이 비오스트를 덮쳤다. 차가운 물과 통증, 무거운 몸과 부족한 공기까지.
“크흣!”
비오스트는 자신을 감싸고 있던 편안함을 던져 버리고 꼴사납게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싸우기 시작했다.
라일라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절대로.
* * *
기어코 해가 산 너머로 사라져 버린 순간이었다.
“찾았습니다!!”
드디어 찾던 소리가 들려왔다. 수리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초조하게 앞을 살피던 것을 멈추고 그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디냐!”
“여깁니다!!”
덤불에 가려져 소리를 치는 사람도 어디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수리는 계곡물을 철벅이며 어림짐작되는 곳으로 달려가자 그제야 잡목 덤불 너머에서 솟아오른 낯선 얼굴이 보였다.
“맙소사…….”
고개를 내려 그가 찾은 사람을 확인한 수리의 표정이 저절로 찌푸려지고 입에서는 신음과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앞에 있는 것은 비오스트가 맞긴 했다. 다만, 살아 있는 건지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젖은 몸은 아직도 반쯤 계곡물에 잠겨 있는 상태였고, 양손은 수많은 생채기가 나서 엉망이었다. 그리고 가장 최악은 그의 얼굴이었다.
창백하다 못해서 새파랗게 질린 안색은 물론이고, 퍼렇게 된 입술도 문제였지만, 가장 최악은 머리의 상처였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창백한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있었고, 그의 머리가 뉘어진 바위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물에 젖은 것인지, 피에 젖은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더욱 수리를 혼돈에 빠뜨렸다.
수리는 조심스럽게, 최악은 아니기를 빌며 비오스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더욱 조심스럽게 그의 코 앞에 제 손을 들이밀었다.
“!!”
용수철처럼 벌떡 몸을 일으킨 수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사! 의사를 불러라!”
비오스트는 살아 있었다.
다만 그 숨이 너무 미약해서 계속 살아 있을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폐하!”
일단 의사를 부른 다음에 수리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제 말이 들리십니까?”
반쯤 잠긴 그의 몸을 끌어 올려야 할지,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되는지 수리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의사가 당도할 때까지 비오스트가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그를 부르고 있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라일라의 상태가 어떨지 알 수 없어서 이번에 황실 의원을 데리고 온 것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수리였다.
“폐하! 비오스트 님!”
하지만 수리가 몇 번이나 그를 불렀지만, 비오스트의 감긴 눈은 들어 올려질 줄을 몰랐다. 수리는 방금 제 손가락으로 느꼈던 숨이 진짜였는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찾았어? 찾은 거야? 비오스트!”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는 라일라가 보였다.
그것을 보며 수리의 가슴이 또 덜컥 내려앉았다. 돌이끼가 미끄러웠다. 자칫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날 터였다.
게다가 지금 비오스트는 임산부가 볼 만한 몰골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넋이 나가 버린 것 같은 라일라의 모습을 이미 본 수리의 생각에는 더욱 그랬다.
“라일라 님! 이쪽으로 오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하지만 라일라는 수리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 비오스트만큼이나 창백한 얼굴을 하고 미끄러지듯이 아래로 내려왔다.
“비오스트…….”
그리고 역시나 비오스트의 모습을 보고는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당연했다. 자신도 제가 발견한 것이 사람인지 시체인지 헛갈릴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아, 안 돼! 너 살아 있는 거지? 비오스트? 비오스트?”
라일라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옷자락의 끝이 살포시 계곡물에 젖어 들어 갔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발 눈을 떠 봐. 응? 이제는 네 말을 믿어.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을게. 응?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눈 좀 떠 봐.”
떨리는 손끝이 살며시 그의 얼굴에 닿았다. 피부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이 느껴지자 라일라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 내고야 말았다.
“비오스트!”
그때였다.
라일라가 오열하듯 그의 이름을 외쳐 부른 순간, 비오스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라일라?”
영영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파란 입술이 제 눈앞에 있는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그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먼 길을 돌아온 것처럼.
“널 두고…… 가지 않아.”
상처투성이의 손이 살짝 들렸다. 그러자 라일라는 그것이 찾는 것이 뭔지 안다는 듯이 얼른 제 손으로 그 손을 감쌌다.
그러자 안도했다는 듯이 비오스트의 창백한 얼굴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것을 보고 라일라도 웃고 말았다.
살아 있었다.
그도, 그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