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75화 (75/88)

75.

라일라의 시선과 그녀가 말한 ‘차라리’의 뒤에 이어지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한 비오스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에게 오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단 말인가?

자신의 품보다 차라리 사신의 품이 더욱 아늑하단 말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아이와 함께 뛰어내릴 정도로 자신이 싫단 말인가?

지금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것은 비오스트였다.

까마득한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끝도 없이 추락하고, 차가운 바윗돌에 제 몸이 부딪히고, 머리가 깨진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상처받은 심장에서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은, 그였다.

참으로 지독한 고통이었다.

“라일라.”

라일라의 한 발이 주춤거리며 뒤로 또 물러서자, 비오스트는 고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이름이 불리자 라일라는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고, 자신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는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또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비오스트의 얼굴은 놀람과 다급함, 그리고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달려오는 그의 팔과 다리에서도 절박함이 묻어 나왔다.

그 순간 라일라는 깨달았다.

자신의 발 한쪽이 허공을 내디디고 있음을.

“위험해!”

천천히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이 귀 뒤로 스쳐 지나가는 것도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저도 모르게 뻗은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마치 공중에 제 몸을 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라일라!”

다시 비오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건 그냥 목소리가 아니었다. 절규였다.

목을 뚫고 나오는 것 같은 비오스트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아……!”

그저 외마디의 감탄사만이 라일라의 입에서 나온 순간, 덥석 커다란 손이 라일라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

“…….”

마주친 파란 눈은 놀랐다.

마주친 금색 눈은 안도했다.

파란 눈은 물었다. 왜냐고.

금색 눈은 대답했다. 다행이라고.

이어지지 않는 대화였고, 통하지 않는 소통이었다. 그들은 서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이었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은 찰나였고, 또한 기나긴 시간이었다.

“비오…….”

라일라의 입에서 비오스트의 이름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그는 라일라를 잡은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본능처럼 뻗은 팔은 아직 상처가 채 낫지 않은 팔이었다. 겨우 붙어 가고 있던 상처가 비명을 내지르며 벌어졌다. 흘러내리는 붉은 피는 덤이었다.

라일라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것을 보며 비오스트는 외려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표정의 의미를 그는 알았다. 라일라는 지금 비오스트를 걱정하고 있었다.

막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한 라일라를 붙잡은 비오스트를, 라일라의 몸을 안쪽으로 잡아당기고 그 반대급부로 반대쪽으로 몸이 틀어지며 자신의 몸이 낭떠러지로 기울어지고 만 비오스트를, 그리고 그 순간 라일라의 몸이 안쪽으로 온전히 들어간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비오스트를 보며 라일라는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구하고 대신 위험에 처한 그를 걱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트?”

라일라의 입술이 비오스트의 이름을 완성했을 때, 이미 비오스트의 몸은 허공에 내던져진 채였다.

비오스트의 강한 힘에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지듯 쓰러지면서도 라일라는 비오스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평온해 보였고, 입가에는 안도의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본 순간, 그 미소를 봐 버린 순간, 라일라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비오스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라일라가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녀를 사랑하는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녀의 눈앞에 남은 것은 파란 하늘과 아무도 없는 위험한 낭떠러지, 그리고 뒤이어 들린 무언가 커다란 것이 떨어진 것 같은 커다란 물의 파열음이었다.

“안 돼!!”

라일라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깨달은 순간이 끝이 나는 순간이었다.

찰나였고, 영원이었다.

“폐하!!”

라일라의 비명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허겁지겁 나타난 수리의 앞에 보인 것은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라일라였다.

그뿐이었다.

수리가 이곳에 올라오며 외쳐 불렀던 폐하는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이쪽으로 왔을 터였다. 그가 쫓았던 라일라가 여기 있으니, 비오스트도 여기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없었다.

“라일라 님?”

수리는 불안한 예감을 애써 떨쳐내려 애쓰며 라일라를 불렀다. 부름에도 라일라는 여전히 허공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멍한 눈빛과 살짝 벌어진 입술이 어딘지 모르게 백치나 정신 나간 여자를 연상케 했다.

“폐하께선 어디 계십니까?”

“…….”

수리의 질문에도 라일라는 대답을 하지도,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저 낭떠러지 끝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라일라의 반응에 수리의 입술이 더욱 바싹 말라 왔다.

“비오스트 님은 어디 계시죠?”

“……!”

비오스트의 이름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라일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제야 천천히 라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수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라일라의 눈에서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제야 현실이 자각되었다.

너무나 찰나의 순간이라서, 또 영원히 이어지는 순간이고, 마치 허상이고, 꿈인 것만 같은 그 순간의 여운에서 허우적대던 라일라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비오스트가 떨어졌다.

자신을 대신해서.

저 아래로.

“비, 비오스트.”

왈칵 터져 나온 이름에는 울음이 가득 배어 있었다.

“왜, 왜……. 왜 나 같은 것 때문에!”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어찌할 바가 없어 그저 울었다. 라일라는 엉금엉금 기어서 비오스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곳으로 가려 했다.

“위험합니다!”

수리는 얼른 라일라에게 다가가 몸을 숙여 그녀를 붙들었다.

“폐하께선, 그러니까……”

차마 여기서 떨어진 것이냐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수리는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안색과 눈물범벅의 라일라는 수리의 시선을 받자 다시 섧게 울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의 시선 때문이 아니었다.

수리가 묻는 것을 자신이 대답해야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고, 그 대답을 하기 싫어서였고, 대답하는 순간 그것이 다시 현실이 되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나 때문이야.”

하지만 해야 했다.

라일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답했다.

“비오스트가…… 떨어졌어. 나를 구하려다가, 저 아래로…….”

그녀의 대답을 들은 순간, 수리는 자신의 예감이 맞았음에 절망하며 고개를 돌려 낭떠러지 쪽을 쳐다보았다. 라일라가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던 그곳을.

“라일라 님을 모셔라.”

수리는 뒤쪽에 있던 수행원에게 이야기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낭떠러지 쪽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 보자 제법 높아서 아찔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뭐가 보이는지 살폈지만, 그저 보이는 것은 굽이쳐 흐르는 푸른 물과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흩어지는 물거품뿐이었다.

비오스트라면 충분히 살아 있을 수 있는 높이였다. 그의 인간 같지 않은 힘이나 스피드를 생각하면 이 정도에서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원래의 비오스트라면 말이다.

“제길.”

저도 모르게 수리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지금의 비오스트는 정상이 아니었다. 황제와 독대한 그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리는 물었지만, 비오스트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거의 반으로 쪼개진 시체 하나와 인간에게 입은 상처가 아닌 것 같은 깊은 상처를 입은 생존자가 있다는 것만이 수리가 알고 있는 진실의 단면이었다.

대체 무엇에 당한 건지 모를 비오스트의 상처는 매우 깊었고, 쉬이 낫지도 않았다. 황실 의원이 헐레벌떡 달려와 그 상처를 꿰매고, 신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신력을 불어넣어도 마찬가지였다.

몇 날 며칠을 피를 흘리고, 창백한 안색의 비오스트는 몇 번이나 까무러쳤고, 아물지 않는 상처 탓에 고열에 시달렸다.

열에 들떠 있을 때면, 비오스트는 라일라를 찾았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제 죄를 고하고, 후회를 속삭이고, 또다시 라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열이 좀 내리면, 비오스트는 라일라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흘려 댄 피 때문인지 열에 시달린 탓인지 창백한 안색을 하고 당장 라일라를 찾아내라고, 그러지 못하면 다들 죽은 목숨이라고 엄포를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라일라를 찾아냈다.

하지만, 지금, 비오스트는 없었다.

“당장 아래로 내려가서 폐하를 찾아라! 마을에 가서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총동원해야 할 것이다.”

“네!”

수리의 말에 우왕좌왕하고 있던 수행원들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리고 대답만큼이나 빠르게 그들은 왔던 길을 되짚어서 내려가고 있었다.

라일라를 바라보자, 아직도 울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저러다가 탈이라도 나는 것이 아닐지 걱정될 정도로 라일라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수리는 그걸 말리지 않았다. 말린다고 저 울음이 그쳐질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수리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아래를 바라보았다.

“제발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나 찾던 분이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대답을 원했다.

하지만 수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유유히 흐르고 있는 계곡의 푸른 물뿐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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