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74화 (74/88)

74.

“이쪽으로 와. 위험해, 라일라.”

비오스트는 최대한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게 천천히 말했다. 그 안에 제발 라일라가 이쪽으로 오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은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경계심을 그대로 내보이는 눈으로 비오스트를 바라만 볼 뿐, 그의 쪽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뒤를 보더니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라일라!”

다급한 목소리로 비오스트가 라일라를 불렀다. 마치 뒤에 뭐가 있는지 라일라가 모르는 것처럼.

하지만 라일라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뒤에 뭐가 있는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 그녀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라일라의 뒤에는 산도, 나무도, 들풀도 없었다. 길조차도 없었다. 그녀는 지금 낭떠러지의 앞에 서 있었다.

“왜…….”

더는 달아날 수 없는 다리를 대신하듯, 라일라의 입이 열렸다. 오랜만에 듣는 라일라의 목소리에 비오스트가 감격한 것은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그는 이내 불어오는 바람에 라일라가 휘청이지는 않을지, 부른 배 때문에 라일라가 비틀거리는 것은 아닐지, 배 속의 아기가 갑자기 심술을 부려 라일라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지 하는 걱정에 짓눌려서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본 라일라는…… 괜찮아 보였다. 비오스트는 가슴이 아프지만 인정해야 했다.

황태자궁에서 라일라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죽음이 턱 밑까지 다다른 지금의 라일라가 더 괜찮아 보였다.

하루하루 말라 가던 그때보다 오히려 약간 살이 오른 것도 같았고, 창백하게 질려 있던 그때보다 혈색이 더 좋아 보였다.

그리고 가장 다른 것은 눈빛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육체보다 먼저 죽어 버렸던, 그래서 비오스트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라일라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라일라.”

“가까이 오지 마!”

비오스트가 라일라의 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라일라는 바로 소리쳤다.

황태자궁에서와는 달리 지금의 라일라는 맞서 싸우려고 하고 있었다. 비록 그 싸우려는 상대가 비오스트이기는 해도, 라일라의 눈은 살아 있었다.

그 눈으로 라일라는 비오스트를 찬찬히 훑었다.

아까 산길에서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비오스트는 이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맨 처음 보았던 다정한 비오스트도, 그 뒤에 보았던 잔혹하고 차가운 비오스트도 아니었다.

지금 라일라의 눈앞에 있는 비오스트는 뭐랄까…….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라일라가 모질게 한마디 말이라도 한다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변화가 라일라를 당황스럽게 했다.

지금도 그는 라일라의 한 마디에 더 다가오지 못하고,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주인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지만, 다가가지 못해서 안달이 난 잘 훈련된 개와 같은 모습이었다.

“위험해, 라일라.”

간신히 비오스트가 내뱉은 단어는 그것이었다.

위험해. 라일라.

오직 라일라의 안전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이.

“나한테 가장 위험한 건, 너야.”

그 말을 들은 라일라가 비웃듯이 내뱉자, 비오스트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라일라를 위험에 빠뜨린 사람은 바로 비오스트였다. 그래 놓고선 지금에 와서 라일라를 걱정한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가증스럽게 들릴지는 자기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증스럽게 들린대도, 그녀가 비웃는대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가증스럽게도 비오스트는 라일라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 알아.”

바람이 제 진심을 온전히 실어다 주기를 바라며 비오스트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라일라.”

바람조차도 비오스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을 몰랐던 듯, 희미하게 떨렸다.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줬다는 걸 알아.”

그의 고백을 들은 라일라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이내 그 눈은 찌푸려졌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수작이나 꿍꿍이가 아니야. 그저 내가 저지른 짓을 후회하고 있다는 걸 네게 말하려는 거야.”

“그러니까 왜 이제 와서 이러느냐고!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려고 했어. 네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낳아 주려고 했고, 네가 원하는 대로 죽어 주려고 했다고! 그리고 그 순간이 곧이야!”

“라일라…….”

“그런데 이렇게 뒤늦게 날 찾아와서 후회니, 뭐니 하는 말들을 하는 건데?”

“내가 더는 그걸 바라지 않으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가 아니었다. 생명을 잃고 뚝 떨어져 버린 나뭇잎도, 말라 죽어 버린 꽃대도 아니었다.

“널 살리고 싶어졌어. 네가 살아 있었으면 했어. 네가…… 보고 싶었어, 라일라.”

속절없이 흔들리는 것은, 속삭이듯 전하는 비오스트의 고백을 듣고 있는 라일라의 눈동자였다.

“너야말로 왜 떠난 거지?”

그리고 비오스트의 눈동자 또한 그러했다.

“내 바람대로 해 주려고 했다며. 그런데 왜 날 떠난 거야, 라일라?”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상대에게 버림받은 상처는 컸다. 살을 도려내고, 뼈를 으스러트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었다.

자신이 스스로 불러온 상처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비오스트는 제가 받은 상처의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날 살리려 했으니까.”

“그게 왜…….”

“넌 아이를 죽이려고 했잖아.”

무슨 말을 하려던 비오스트의 말은 라일라의 목소리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정답인 듯, 비오스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와 내 아이잖아. 그런데 넌 우리 아이를 죽이려고 했어! 차라리 날 죽이면 되었잖아! 내가 죽어 준다고 했잖아! 그런 왜! 왜 죄 없는 아이에게 그러려고 했어?”

라일라는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그래서 떠나야 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라일라와 비오스트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죽이지 않아. 더는 그러지 않을 거야.”

“거짓말.”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야.”

“거짓말.”

“너도, 아이도, 둘 다 내가 살리겠어.”

“…….”

단호한 비오스트의 선언에 그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던 라일라도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짓말.”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고작 한마디 말과 한 번의 눈빛으로 비오스트를 믿어 버리기엔 라일라의 상처는 너무 컸다.

몇 개월에 걸친 비오스트의 사탕발림 같은 연극과 다정한 거짓의 가면을 벗어던진 배신의 순간을 라일라는 선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비오스트가 보여 주었던, 잔혹한 그때의 표정이 라일라의 머릿속에 떠오르자 저절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네 말은 거짓말이라고.

더는 속지 않을 것이라고.

“제발, 라일라.”

라일라의 거절에 비오스트의 목소리는 더욱 간절해졌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비오스트에게 라일라의 믿음이라는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지고 싶었다. 제가 제 손으로 부서뜨리고, 제 발로 짓밟아 이미 없어져 버린 그것을 비오스트는 가지고 싶어 하고 있었다.

“내게 기회를 줘.”

그는 정말로 그것을 간절히 원했다.

“제발, 라일라.”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을 만큼.

“라일라.”

한 방울의 눈물을 뚝 하고 흘릴 만큼.

“…….”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라일라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가끔 그를 떠올렸을 때, 거의 괴롭힘에 가까울 정도로 비오스트의 모습이 라일라의 머릿속을 헤집을 때도 이런 그의 모습을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릎을 꿇는 비오스트도, 눈물을 흘리는 비오스트도, 라일라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너를 사랑해.”

그리고 라일라에게 고백을 하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일라, 널 사랑하고 있어.”

비오스트의 고백을 들은 순간, 흔들렸다.

라일라의 눈빛도, 라일라의 머리도, 라일라의 가슴도. 폭풍우에 흩날리는 코스모스처럼 그의 고백에 라일라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의 말을 믿어야 할까?

그러기엔 그가 준 상처가 너무 컸다.

거짓말일까?

하지만 비오스트의 눈빛과 표정이 너무 진실하여 보였다.

“…….”

라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쪽으로 와, 라일라.”

그녀의 흔들림을 아는 것처럼 비오스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그 손이 라일라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저 손을 잡았었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저 다정한 손을 잡은 대가로 자신이 얻은 것은 깊은 상처였고, 고통스러운 아픔이었다.

그 상처를, 그 아픔을, 겨우 삭여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배 속의 아이였다. 이 아이만이 라일라가 가진 행복한 기억의 증거였고, 삶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비오스트는 그런 아이마저도 해치려 했었다.

“싫어.”

라일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두 번은 견딜 자신이 없었다. 지금 비오스트를 믿었다가, 또 그것이 거짓이라고 한다면 라일라는 도저히 그것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라일라는 비오스트를 믿지 않기로 했다.

“당신에게 가느니, 차라리…….”

라일라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보였고, 그 아래로는 굽이쳐 흐르는 계곡이 보였다.

라일라가 한 발을 끌듯이 뒤로 옮기자 그녀의 발에 걸린 작은 돌멩이 하나가 뒤로 또르르 굴러가며 그대로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 퐁! 하는 작은 단말마를 남기며 강으로 빠졌다.

그다음은 라일라의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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