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73화 (73/88)

73.

라일라는 달렸다.

바람이 차가운지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로, 흡사 사나운 짐승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연신 뒤를 돌아보면서 그저 달렸다.

“하아…… 하아…….”

자신이 빨리 달리고 있기를 빌었지만, 부른 배를 한 손으로 떠받치고 뛰는 걸음이 빠를 리가 없었다.

“읏!”

순간 미끄러운 진흙탕을 밟으며 라일라의 발이 삐끗했다. 몸이 기우뚱하는 것을 느낀 라일라는 허겁지겁 다리를 놀려 마른 땅을 디디고, 팔을 허우적거려 간신히 넘어지는 것을 면했다.

만약 그대로 넘어졌다면 임산부인 라일라는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안 돼. 빨리!”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시간도, 가쁜 호흡을 고를 시간도 없었다.

라일라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 *

“집 안을 뒤져 봐라.”

부서진 문을 훌쩍 뛰어넘으며 안으로 들어온 수리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수행원들이 옷장을 열고 이불을 뒤지고, 침대 밑을 살펴보는 동안, 수리는 비오스트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을 아낙의 이야기를 듣고 눈에 생기가 돌던 사람이 과연 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절망적인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비오스트를 보며 수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싶을 정도였다.

“폐하.”

아직은 입에 붙지 않는 호칭으로 그를 불러 보지만, 비오스트는 말이 없었다. 그저 멍한 눈빛으로 라일라가 있었던 집을, 그리고 그 집을 뒤지고 있는 수행원들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주 희미하게 라일라의 향기가 났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비오스트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점심으로 먹었을 빵 냄새와 차 냄새, 바깥에서 불어오는 마른 잎사귀와 젖은 흙냄새와 함께 라일라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작은 꽃송이가 햇볕에 말라 가는 것 같은 향이었고, 보드라운 어린 풀잎이 물기를 머금은 것 같은 향이기도 했다.

예전처럼 관능적이지도, 비오스트를 유혹하는 것 같은 향도 아니었지만, 그는 공기 중에서 라일라의 향을 정확하게 구분해 낼 수 있었고, 또 그것에 매혹당하고 있었다.

라일라는 아주 옅은 한 줌의 향기만으로 비오스트를 무릎을 꿇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이 아직 따뜻합니다.”

테이블 위의 티팟에 손을 가져다 댄 수리가 말했다.

“뭐?”

비오스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티팟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말대로 티팟은 따뜻했다.

“여기 뒷문이 있습니다!”

휙 하고 비오스트의 목이 그쪽으로 젖혀졌다.

티팟은 따뜻했고, 뒷문이 존재했다. 비오스트의 눈에서 다시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라일라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은.

“라일라!”

비오스트는 라일라가 나갔던 그 뒷문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뒷산으로 이어지는 그 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아!”

불현듯,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 같아서 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그저 잎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를 하늘로 뻗고 있는 나무들과 마른 풀숲뿐이었다. 다행이었다.

라일라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다시 발을 재촉했다. 이제 평소에 다니던 길은 훌쩍 지나 있었다. 이 앞에 무엇이 있을지는 라일라도 몰랐다.

그래도 숲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라일라의 생각으론 이 산은 그리 높은 산이 아니었고, 열심히 간다면 오늘 중으로는 산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피도 뒷산이 그리 큰 산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무사히 달아나고 나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어떻게든 지금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만 라일라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나를 찾았어.’

그랬다. 비오스트가 자신을 찾고 말았다.

왜 그것이 하필 지금인지 라일라는 원망스럽기만 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 거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플로랜스가 태어날 것이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또 숨이 차올랐다. 폐가 물에 잠긴 것처럼 호흡은 힘들었고,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몸은 이미 항상 무거웠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라일라는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이끌며 조금이라도 더 가려고 했다.

“라일라!”

그 순간, 분명한 목소리가 라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라일라는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것도 아니었고, 새가 우는 소리를 잘못 들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녀가 환청을 들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분명히 누군가가 라일라를 불렀다. 아니, 누군가가 아니었다.

비오스트였다.

“아, 안 돼!”

라일라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본능처럼 둥그런 제 배를 감싸 안았다.

“라일라!”

비오스트는 언뜻, 저 앞에서 붉은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온통 잿빛의 겨울 산에서 보인 그것은 꽃일 리 없었고, 화려한 털을 가진 짐승일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제가 본 것이 라일라라고 확신했다. 그 증거처럼 비오스트에게는 겨울바람의 냄새 사이로 희미하게 라일라의 향기가 느껴졌다.

조급함이 비오스트의 다리를 더욱 재촉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는 산길을 평지처럼 내달렸다.

“라일라!!”

그리고 마침내, 그가 찾아 헤매던 것과 조우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비오스트는 라일라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밤이면 밤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 속의 라일라를 덧그려 왔으니까.

낮에도 머릿속에 박혀 버린 그녀의 모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으니까.

바람결에 흔들리는 그 머리카락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파란 눈도, 제 품에 쏙 들어오던 저 작은 체구도. 비오스트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라일라…….”

비오스트의 입술에서 비어져 나온 그 이름이 주인을 찾아 훨훨 날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뺨에 톡 닿았을 때, 이름의 주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파르르 떨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 비오스트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비오스트의 모습을 제 눈으로 보고 말았을 때, 라일라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고, 애달픈 황금색의 눈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보고,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그를 보아 버렸을 때, 라일라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다시 만난 비오스트는 뭔가 달라져 있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연약해 보였다.

예전보다 혈색이 좋지 않고, 살도 많이 빠져 보였으며, 어딘지 모르게 초췌해 보이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라일라를 바라보는 눈빛이 애절해서였다. 또 그에게서 간절함이 보여서였고, 언제든 무릎을 꿇고 매달릴 수 있을 것 같은 약자의 냄새가 비오스트에게서 느껴져서였다.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그가, 지금은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비오스트…….”

라일라의 입에서 비오스트의 이름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그는 비오스트였다. 자신이 도망쳤던 상대였다.

라일라는 다시 뒤를 돌아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라일라!”

비오스트가 다시 제 이름을 불렀지만,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라일라의 뒷모습을 보며 비오스트의 마음은 더욱 타들어 갔다. 언뜻 보기만 해도 라일라의 배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당장 지금 애가 태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불러 있었다.

그런 배를 가지고 저렇게 달리는 것이 너무도 위험해 보였다. 그리고 비오스트의 막연한 예상만큼, 실제로 위험하기도 했다.

“라일라! 제발 멈춰!”

그건 명령이 아니었다. 부탁이었다. 그것도 애절한 부탁.

제발 그녀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일라는 개울이 자신을 가로막아도 서슴지 않고 그대로 차가운 개울물에 자신의 발을 들이밀었다.

“라일라!”

첨벙거리며 라일라가 개울을 건너는 동안, 비오스트의 안색은 더욱 새파랗게 질렸다.

저러다 미끄러운 물이끼를 밟기라도 한다면, 차가운 개울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자신의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니, 아무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라일라의 발이 차가운 물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걱정이 되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제발 라일라! 그러다가 다쳐!”

순간, 비오스트는 자신이 쫓지 말아야 할까도 생각했다. 그렇다면 라일라가 멈출는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는지까지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라일라를 이대로 보낸다는 것은, 그녀의 목숨을 포기하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일라에게는 시간이 없었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라일라!”

비오스트는 이를 악물고 개울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라일라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속력을 높였다.

비오스트가 강하게 마음을 먹자 거리는 금세 좁혀졌다. 당연했다. 비록 비오스트가 전 황제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고, 피곤하고 초췌한 상태이기는 하나 비오스트는 건장한 남자였다. 배부른 라일라를 붙잡는 것 정도는 큰일도 아니었다.

그저 이제까지는 라일라가 급히 달아나다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빠르게 쫓지 못했던 것이었다.

다섯 걸음.

세 걸음.

그리고 바로 눈앞.

비오스트가 손을 뻗으면 라일라를 붙잡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거리까지 좁혀졌을 때였다.

“다가오지 마!”

라일라가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질렀다.

“맙소사…….”

그리고 비오스트는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