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집으로 돌아온 르미에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따뜻한 침대도, 허기를 채워 줄 음식도 아니었다.
“당신 짓이지?”
대공저의 응접실이 아니라 르미에르의 사적인 공간인 침실에서 비오스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르미에르는 비오스트가 입고 있는 옷의 여기저기에 피가 튀어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검은색이라 표시는 나지 않았지만, 서로 엉겨 붙은 머리카락이나 미처 닦아 내지 못한 귀 언저리에 말라붙은 피를 보며 비오스트의 얼굴에도 피가 튀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비오스트의 눈은 그것만큼이나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핏발이 선 금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비오스트와 눈이 마주치자 르미에르는 그가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소름이 쭉 돋았다.
지금의 비오스트는…… 뭐랄까…… 광기 어린 모습이었다.
“라일라는 어딨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황태자궁에 있을 그 아이를 왜 내게서 찾는 거지?”
순간 비오스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의 표정이 더욱 사납게 변하는 것을 보며 르미에르는 그가 재규어로 변신하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만큼 지금의 비오스트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국에서 가장 경비가 심한 황궁에서 임산부가 밤중에 갑자기 사라졌어. 누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게 왜 나라고 생각하지?”
“그 애가 아는 사람 중에서 걜 도와줄 만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까. 황궁에 있는 라일라가 아는 사람 중에 그 애를 배신하지 않은 사람은 당신뿐이야.”
사나운 눈빛이 르미에르를 향했다. 정작 라일라가 그런 배신을 당한 원인은 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게다가 마침 당신은 어딜 다녀온 것 같군.”
“잠시 볼일이 있어서.”
“잠시라고 하기엔 시간이 긴 것 같은데? 대공저의 하인들은 당신이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지금은 이미 저녁 시간이야. 온종일 뭘 한 거지?”
“내가 너에게 꼭 그걸 이야기해야 할까? 내 사적인 스케줄인데?”
“사적인?”
르미에르의 말에 비오스트는 비쭉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남의 여자와 붙어먹는 것이 사적인 건가? 내가 분명 이야기했을 텐데? 라일라를 만나지도 말고, 눈도 마주치지도 말라고. 그 애는 내 거라고.”
그야말로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비오스트는 르미에르를 노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그를 죽이고 싶다는 뜻을 비오스트는 굳이 숨기려고 들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이미 선을 넘었을 수도 있었다. 비록 황위 계승서열로는 비오스트가 높다고는 하나, 엄연히 손윗사람인 르미에르에게 ‘숙부’나 ‘대공’이라는 호칭이 아니라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남이라니, 너는 내 조카이지 않으냐?”
르미에르는 그 점을 지적했다.
너는 내 조카인 것을, 나 역시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온라이언의 혈통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네가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역시 새삼스럽게 비오스트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라일라를 여자로 보지 않아.”
“그걸 나한테 믿으라고? 온라이언이라는 짐승 새끼들은 그 향기만 맡으면 대번에 발정이 난다는 것을 내가 아는데, 그걸 믿으라고?”
비오스트는 별 개 같은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말했다.
라일라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비오스트는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보잘것없는 라일라에게서 나는 그 관능적인 향을, 참으로 자제하기 힘들었던 그 충동을, 그녀를 보는 순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그 느낌을, 그 무엇도 비오스트는 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시작이었는지도 몰랐다.
“비오스트.”
라일라를, 그리고 자신을 동시에 천박하게 만드는 비오스트의 언사에 르미에르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온라이언의 특이체질에 대해서 얼마나 적대적인지는 충분히 알겠다. 다만, 나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야. 사람은 그렇게 본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
“아아~ 고고하신 온라이언 대공께서는 저와는 다른 것으로 이루어진 모양이군요? 피와 살과 본능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요.”
비오스트는 별 우스운 이야기를 다 듣는다는 듯이 조롱하는 어투로 말했다. 르미에르는 그런 비오스트를 고요히 쳐다보았다.
“내가 일평생 사랑했던 여자는 한 명 밖에 없다.”
르미에르의 말에 이제까지 이죽거리느라 바빴던 비오스트가 일순간 굳었다. 그 한 명이 누군지 비오스트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르미에르가 라일라를 도왔던 것은 그녀를 사랑해서는 아니었다. 물론 안타까웠고, 구해 주고 싶었던 것은 맞았다. 좋아한 것도 맞았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르미에르에게 사랑은 세상에 단 한 명, 플로라뿐이었다.
플로라와 닮아서 안타까웠고, 플로라와 닮아서 구해 주고 싶었으며, 플로라와 닮았기 때문에 라일라를 좋아했었다.
“너도 그러냐?”
“…….”
“그래서 라일라를 찾으려는 거야?”
“…….”
르미에르의 질문에 비오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르미에르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황제의 자리가 인생의 목표인 것 같이 굴던 비오스트가 갑자기 그 목표를 버리고 라일라를 살릴 방법을 찾고 있었다면, 그 답은 간단했다. 게다가 그녀가 없어졌다고 이렇게 이성을 잃을 정도라면 그 답은 더욱더 간단했다.
비오스트는 라일라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도 미치도록.
“반드시 찾을 겁니다.”
핏발 선 눈으로, 광기가 어린 눈빛으로, 비오스트는 말했다.
“그 애가 자신을 찾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해도 말이냐?”
비오스트의 한쪽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마치 르미에르의 질문이 아주 가당찮다는 듯이.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그 아이는 죽음을 원한다고 했어. 그러니 아이를 낳아 주겠다고 했지. 너도 그날 도서관에서 들었을 텐데?”
“제가 기억 못 할 리가요. 아무 필요도, 쓸모도 없는 목숨이니 내게 주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제가 필요합니다. 제가 라일라가 필요하고, 저에게 라일라가 쓸모 있습니다. 그러니, 라일라는 이제 아무 필요도 없고, 아무 쓸모도 없는 목숨이 아니지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과 좌절이 비오스트의 안에서 끓어올랐다.
“그러니, 저는 그 애를 찾을 겁니다. 반드시요.”
* * *
“안녕, 라일라!”
소피는 명랑하게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도 그녀의 바구니는 커다랬고,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놓을 때는 제법 묵직한 소리까지 냈다.
“아침은 먹었어요?”
“아직…….”
“어머나! 그러면 안 돼요, 안 돼. 임산부는 든든하게 먹어야지. 아침, 점심, 저녁은 물론이고 간식과 야식까지 챙겨 먹어야지. 홑몸이 아니라 두 사람이니, 2인분을 먹어야 해.”
그렇게 말하며 소피는 바구니에서 빵과 수프를 꺼내 간단한 상을 차렸다.
“자, 지금은 간단하게 이걸 먹어요. 점심은 내가 아주 맛있는 닭고기 스튜를 끓여 줄 테니까.”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라일라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음식 솜씨가 좋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듯, 수프는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어디 보자, 에구~ 여긴 냄비들이 왜 이렇게 다들 조그맣담? 우리 막내 혼자 먹을 분량밖에 안 되겠는걸?”
세간살이를 둘러보던 소피는 투덜대면서 자신이 가지고 온 바구니에서 음식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양배추, 흙이 아직 묻어 있는 싱싱한 감자와 양파, 당근. 종이 싸인 생닭과 몇 개의 양념들. 그리고 사과 몇 알과 포도 두 송이, 토마토, 양상추, 커다란 빵까지.
모두 꺼낸 양이 어마어마해서 라일라는 순간 소피가 마법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커다란 바구니였지만, 저 안에 담긴 것들은 저기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 같았다.
“너무 많지 않나요?”
그리 많이 먹지 않는 라일라가 보기에는 거의 일주일 식량은 되어 보였다. 소피는 분명 2~3일에 한 번 정도 올 거라고 했는데 말이다.
“어머나! 아까도 말했듯 2인분인걸요. 많지 않아.”
반말과 존댓말이 반쯤 섞여 있는 소피의 화법은 라일라를 헷갈리게 했지만, 이상하게도 친근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약간 호들갑스러운 말투와 환하게 웃는 미소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었다.
“그래. 몇 개월이나 되었어요?”
능숙한 솜씨로 양배추를 다듬으며 소피가 물었다. 라일라는 뭐가 몇 개월이라는 건지 몰라 눈만 깜박였다.
“아기 말이야, 아기!”
소피는 그런 라일라가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눈으로 배를 가리켰다.
“아…….”
라일라는 그제야 소피가 뭘 물었는지 알았지만, 대답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날짜를 헤아려 본다면 거의 9개월이나 10개월쯤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에 마력 때문에 출산을 늦췄으니, 지금이 몇 개월쯤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려웠다.
아마도 7개월, 혹은 8개월쯤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9개월쯤 되었을 수도 있었다.
“어휴, 깜빡깜빡하는구나. 나도 그랬지. 애들이 무슨 기억력을 먹고 자라는지 나는 내 생일도 잊어버렸다니깐?”
소피는 감자를 집어 들며 다 이해한다는 듯이 웃었다. 라일라는 소피의 어림짐작에 감사해하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름은 지었고?”
“아직요.”
“그래그래. 평생 부를 이름이니 신중해야지.”
소피는 그것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능숙하게 감자를 깎기 시작했다.
“자, 이제 기억났어요? 아기가 몇 개월인지? 언제쯤이면 귀여운 아기님 얼굴을 보게 될까?”
“아마 곧 낳을 거예요.”
라일라는 웃으며 배에 손을 얹었다.
“곧…….”
그저 느낌일 수도 있지만, 손이 조금 따뜻해진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