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라일라는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천장이 보이자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눈을 뜨지 못하리라 생각했고, 만약 눈을 다시 뜨게 된다면 그것은 지옥, 혹은 천국에서 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라일라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황태자궁에 마련된 자기 방의 천장이었다.
더 신기했던 것은 아프고 난 다음 날이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들어했던 라일라가 혼자서 자기 몸을 일으켜 세웠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쓰러지기 전보다 더 기운이 나는 것도 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야말로 어리둥절해서 라일라는 신기한 듯 제 손을 쳐다보았다.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아이를 지키느라 생긴 커다란 흉터가 있는 오른손까지도 그대로였다.
새삼스럽게 앞뒤로 손을 뒤집어 가며 살펴보던 라일라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휘청이지 않았다.
자신이 제 다리로 혼자 서 있는 것도 신기해서 라일라는 고개를 숙여 얇은 다리를 쳐다보았다. 다리도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상하네.”
보통이라면 당연할 일이 신기해서 라일라는 슬쩍 옷을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고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어?”
잠옷을 들어 올리는 손이 허벅지를 스쳤을 때, 라일라는 처음으로 평소와 다른 것을 하나 발견해 냈다. 그녀는 잠옷의 스커트 부분을 잡고 있던 것을 놓고 제 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차가워.”
조금 전까지 이불 속에 있던 라일라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 손 역시 이불 안에 얌전히 있었다. 그런데도 라일라의 손은 차가웠다.
그제야 조금 춥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았다.
“설마 내가 아주 오래 누워 있었던 건?”
라일라는 얼른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산책을 했던 그 정원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얀 눈이 내리지도, 가을의 울긋불긋한 단풍이 들어 있지도 않았다.
늦여름, 혹은 초가을의 정원이 그대로 라일라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닌데…….”
제 생각이 틀렸음을 알곤 라일라는 습관처럼 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배도 그대로였다.
“아가야. 무슨 일인지 너는 알까?”
일단 라일라는 다시 침대를 향했다. 이불 안으로 차가운 손을 밀어 넣고, 데워지기를 기다렸다.
아주 한참을 기다려도 데워지지 않을 테지만, 라일라는 아직 그것을 몰랐다.
* * *
“라일라 님이 일어나셨습니다.”
수리의 말에 비오스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떻지?”
그가 겨우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였다.
“몸은 괜찮으신 것 같은데, 손발이 차다고 합니다.”
“부작용인가?”
“그런데 무엇에 대한 부작용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황실 의원이 처방한 진통제와 산모에게 좋다는 약초를 함께 먹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쓰러졌을 때는 신관이 신력을 불어넣어 몸의 회복을 도왔고, 그 이후에는 황궁 마법사가 라일라 님의 신체 작용이 느리게 되게 하는 마법을 불어넣었으니까요.”
수리는 당시의 상황을 매우 말끔하게 설명했지만, 사실 그 당시의 상황은 그다지 말끔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당연히 황궁에서 거주하고 있는 황실 의원이었다. 몇 번이나 라일라를 진료했던 그인지라, 이번에도 늘 그랬던 대로 익숙하게 아기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아기는 이상이 없습니다.”
라고 가장 첫마디를 꺼냈을 때, 그는 바로 멱살을 잡혔다.
“라일라의 상태를 보란 말이다.”
라는 낮고 위협적인 말과 함께.
이제까지와는 다른 명령에 그는 당황했다. 아기가 최우선이라는 명을 받았었는데, 그게 언제 바뀌었는지 말도 해주지 않고, 일단 화부터 내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기절하신 듯 보입니다.”
“아마?”
저를 쳐다보고 있는 황태자의 눈에 다시 살기가 어리는 것을 보고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상황이 바뀐 것 같았다. 이전에 분명 아이를 최우선으로 하고, 산모는 아이를 낳을 때까지 되도록 목숨이 붙어 있는 쪽으로 하면 된다고 했었는데, 지금 황태자의 눈을 봤을 땐 그게 아니었다.
지금 최우선인 것은 산모였다. 아니, 최우선 정도가 아니었다. 이 산모가 죽는다면, 제 목숨도 여기서 끝이라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다시 마른침을 꿀떡 삼키고 황실 의원은 다시 제 앞에 있는 산모를 보았다. 이전에 보았을 때와 다름없이 마른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배는 그때보다 조금 더 나온 듯도 했다.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진료를 보고 있으니 그 차이는 미세했다.
“기절하신 게 분명합니다.”
“생명의 지장은 없는 건가?”
바로 그게 문제였다.
“그게…….”
그는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지난 몇 개월간 라일라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알아낼 수 없었다.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데 사람은 사나흘이 멀다 하고 아프다고 몇 시간씩 끙끙거리고, 살은 점점 빠지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데, 그게 심지어 임산부였다. 그런 환자를 돌보는 자신도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살려 내.”
서슬 퍼런 목소리로 황태자가 말하자 그 위압감에 의원의 입이 더욱 딱 다물어지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 놔.”
자신이 현재 제국에서 가장 솜씨 좋은 의사라며, 그렇기에 황실 의원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큰소리를 떵떵 치고 다니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이 제국 제일의 의사인 것이 저주와 같이 느껴지는 그였다.
그 재주 덕분에 이 자리에 올랐는데, 지금은 그 재주 덕분에 죽게 생긴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저 파리한 안색을 가진 여자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자신도 죽은 목숨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신의 지팡이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라일라를 찾은 것은 신관이었다.
그는 어쩌면 황실 의원보다는 조금 나은 처지였다. 그저 신이 주신 힘을 사용하는 그에게는 비오스트가 질문을 할 것이 없었으니, 그 역시 모르는 질문에 대답할 일이 없었다.
그저 누가 봐도 환자인 라일라가 자신이 치유해야 하는 사람임을 알아보았고, 눈짓으로 비오스트에게 확답을 받은 뒤에는 라일라의 손을 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성스러운 힘이 그에게서 흘러나와 라일라의 쇠약해진 몸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라일라는?”
한참의 기도가 끝나고 나자, 라일라의 얼굴에는 약간의 핏기가 돌기 시작했고 대신이라도 하듯 신관은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글쎄요.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10년이 넘게 신관 생활을 했지만, 이런 환자는 처음이었다. 전쟁에 나가 부상병을 돌본 경험도 있었고, 귀족 중 큰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치료해 본 적도 있는 그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는, 뭔가 묘했다.
“마치 구멍 뚫린 항아리 같은 느낌입니다. 아무리 신력을 쏟아부어도 그것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제가 100을 쏟아 넣으면 흡수하는 것은 고작 2~3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가 손쓸 수 없는 죽음 직전의 사람이라면 아예 신력을 밀어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시체나 다름이 없는 신체에는 신력을 불어넣을 수가 없었다.
혹은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시한부라면, 신력을 받아들이되 그것이 빠르게 소진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래서 아무리 신력으로 살리려고 해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덜어 주고, 삶의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정도였다.
신관인 그는 그것이 신께서 그 목숨을 거두기로 하신 것이라 신의 지팡이인 그가 그것을 거스를 수 없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들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였다. 아주 흡수를 못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거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양상이었다.
“100중에 2~3이 흡수된다면, 1000을 불어넣으면 20~30씩 효과가 있겠지.”
신력으로는 온라이언의 저주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비오스트였다. 신력으로 가능한 것이었으면, 이미 선대에서 신력으로 문제를 해결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신관의 말에서 희망을 쥐어 짜내며 말했다.
“신력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한한 것이 아닌지라…….”
“최선을 다해서 살려 내.”
“…….”
더 이상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잘라내는 황태자의 말에 신관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곧 신의 곁으로 갈 것 같은 여자를.
“저를 왜……?”
마지막으로 불려온 마법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궁에서 급하게 찾는다는 이야기에 마탑에서 가장 세속적인 자신이 자발적으로 오긴 했지만, 제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창백한 안색의 임산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죽어 가고 있다.”
“그래 보이네요.”
“살려 내라.”
황태자의 말에 마법사는 눈을 끔벅끔벅 떴다.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같았다. 자고로 마력은 파괴 지향적이었다. 사람을 살린다거나 뭔가 고치는 것은 신전의 담당이었다.
“그런 건 신전에 의뢰하셔야……”
“이미 다녀갔다.”
자신의 말을 잘라 내는 비오스트 덕분에 마법사는 다시 한번 눈을 끔벅거려야 했다. 슬쩍 여자의 몸에 손을 대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희미하게 신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여자가 죽어 가는 것을 멈출 수 있는 마법은 없나?”
“그런 게 있으면 우리 마탑주 영감이 벌써 썼을 겁니다. 불로불사로 영원히 마법 연구를 하는 게 그 미친 영감탱이의 꿈이니까요.”
“…….”
아차, 싶었다. 자신이 말을 끝낸 순간 황태자는 자신을 쓸모없는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신이 원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미래 황제의 눈에 잘 보여서 부귀와 권력을 누리려고 했는데!
“멈출 수는 없지만, 조금 늦출 수는 있지요.”
그의 말에 황태자가 다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신체에 마나의 흐름을 천천히 흐르게 해서 눈속임을 하는 방법인데 말입니다…….”
이제 적어도 황태자가 자신을 재활용 쓰레기 정도로는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열심히 설명을 시작했다.
부귀와 권력, 명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자의 목숨줄을 붙어 있게 만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