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49화 (49/88)

49.

‘어째서?’

굳어 버린 머리가 둔탁하게 물음표를 내뱉었다.

찌르는 듯한 심장의 아픔이 어째서인지 비오스트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어째서 울고 있는 라일라의 얼굴만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지 역시도 알 수 없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라일라가 상처받으리라는 것도, 그녀가 울게 되리라는 것도, 모두 예상했던 바였다. 일말의 희망이라면 철저하게 라일라를 기만하여 그녀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죽는 것뿐이었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것은 라일라가 눈물을 떨어뜨린 순간, 자신이 굳어 버릴 것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한순간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나한테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눈물 젖은 목소리가 다시 질문했지만, 굳어 버린 비오스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상처받은 파란 눈이, 눈물 젖은 눈동자가, 비오스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 아이를 낳는 것?”

사로잡히고 붙들려서, 목구멍이 콱 막혀 버린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속삭임이었다. 그래서 비오스트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필요 없는 목숨이었어. 더 살아 봤자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일 뿐이었어. 버림받고, 손가락질당하는 비참한 인생이었지.”

하지만 이어지는 속삭임에 자신이 맞게 들은 것임을 깨달았다.

천천히 라일라의 작고 마른 손이 비오스트의 얼굴을 향해 갔다. 마치 마지막으로 자신이 사랑했던 과거의 추억을 더듬는 것처럼.

자신의 뺨에 와 닿은, 이미 시체처럼 차가운 라일라의 손을 느끼며 비오스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눈물은 멎어 있었다.

“역시 당신은 나의 구원자야.”

그녀의 목숨을 살려 주었을 때 했던 말을 라일라는 다시 이야기했다.

“난 항상 죽고 싶었어. 사는 게 지옥이니까. 하지만 겁쟁이라서 자살을 하진 못했지. 그래서 항상 누군가가 날 죽여 주길 바랐어.”

버려진 숲속 오두막에서 외로운 소녀가 밤마다 신께 빌었던 소원이었다.

“내 몸.”

제 부모마저 감싸 주지 못한 지독한 악취 나는 아이.

“내 인생.”

모두가 인상을 쓰고, 손가락질하고 외면했던 마녀.

“내 생명.”

마침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어리석은 여자.

“모두 당신에게 줄게.”

비오스트, 이 모든 것을 끝장내 버릴 영원한 나의 구원자.

* * *

‘당신은 나의 구원자야.’

머릿속에 라일라의 목소리가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흠뻑 물기를 머금은 것 같은 목소리였고, 퍼석하게 메마른 것 같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때의 라일라를 떠올리면 희미하게 웃는 것 같기도 했다.

“미친…….”

그래. 미친 소리였다.

자신을 배신하고, 죽이려는 흉계를 꾸민 사람을 보며 웃을 리 없었다. 아무리 그 자신이 죽음을 바랐다고 하더라도.

비오스트는 머릿속에 있는 라일라의 목소리를 떨쳐 내려고 애쓰며, 눈앞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기억의 파편은 비오스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서류 첫머리의 문장을 보기 위해서 눈을 한 번 깜박인 순간, 라일라의 얼굴이 그의 앞에 또렷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소녀가 제 목숨마저 포기하던 순간의 얼굴이었다.

‘내 몸.’

그것은 라일라가 가진 유일한 것이었다.

백작가에서 그녀를 처박아 둔 오두막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 안을 채운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딘지 짝이 맞지 않고 삐걱거리던 가구들은 수습생이 연습 삼아 만든 것 같았고, 살림살이들은 백작가에서 쓰다가 버리려던 것을 적선하듯 준 것들 같았다.

마치 백작가에서 버려진 라일라의 처지처럼 라일라의 오두막도, 세간살이들도 전부 그곳에 버려진 것이었다.

‘내 인생.’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라일라에게는 인생이라고 불릴 만한 것도 없었다.

태어나 버림받고, 학대받고, 외롭게, 그저 살아서 숨만 쉬고 있던 것은 인생이라고 부를 가치도 없었다.

‘내 생명.’

그래서 꼬드기기 쉬웠다.

아무것도 없는, 제대로 된 인생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도 없는 가엾은 소녀의 깡마른 손을 비틀어 그녀가 겨우겨우 움켜쥐고 있는, 단 하나의 생명마저 비오스트는 기어코 빼앗아 버렸다.

‘모두 당신에게 줄게.’

라일라는 그 말을 내뱉은 순간부터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말간 푸른 눈에서 조금씩, 조금씩,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을 비오스트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눈물로 얼룩져 있던 눈에서 물기가 사라지고, 대신 사막의 모래처럼 퍼석함이 깃들었다.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길 바라며 애원하던 눈에서는 빛이 꺼져 버렸다.

매달리듯 자신의 뺨을 쓸던 손가락은 시체처럼 차가웠고, 마침내 툭- 하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그렇게 비오스트는 라일라를 죽여 버리고야 말았다.

* * *

열매를 맺으면 져버릴지언정, 꽃은 아름다웠다.

여름 땡볕을 피할 수 있는 나무 그늘에 앉아 멍하니 화단을 바라보던 라일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은 아름답다고.

“너도 보고 있니?”

가만히 배를 쓰다듬으며 라일라는 아기에게 물었다. 대답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라일라는 자주 배 속의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은 그날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도 라일라는 이 아기가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해도 원망스럽거나, 미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쓸모없는 자신 대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꽃 참 예쁘지? 너도 분명 저렇게 예쁠 거야.”

비오스트에 대한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원망스럽거나, 밉지 않았다.

비오스트가 말한 대로였다. 그는 한 번도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자기 멋대로 착각했을 뿐이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자신은 사랑받고 있다고.

어차피 변한 것은 없었다. 변했다고 믿었던 착각에서 깨어난 것뿐이었다. 라일라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넌 남자아이일까, 여자아이일까? 궁금하다.”

그렇게 하면 배 속의 아이가 남자일지, 여자일지, 알 수 있다는 듯이 라일라는 제 배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널 보고 죽을 수 있는 거라면 좋을 텐…….”

라일라의 바람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뱃속을 긁어내리는 것 같은 아픔에 라일라는 저절로 입을 꽉 깨물었다.

요 며칠 잠잠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오늘은 고통이 더욱 심했다.

“읏!”

본능처럼 라일라의 손이 제 앞에 있던 풀포기를 잡아 쥐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던지 녹색의 풀물이 라일라의 손끝으로 배어 나오기 시작했지만,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라일라 님!”

저쪽 멀리에서 라일라를 지켜보고 있던 세실이 라일라가 파들파들 떠는 모습을 보자, 헐레벌떡 달려왔다.

“배가 아프신 건가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통으로 핏기 없이 창백해진 얼굴이, 파들파들 떨고 있는 몸이, 삽시간에 라일라의 이마를 뒤덮은 식은땀이 말하고 있었다.

그저 벌레에 물린 것이거나, 어디에 부딪힌 아픔이 아니라고. 라일라의 배 속의 아이가 제 어미의 생명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중이라고.

“배가…… 너무 아파…….”

꽉 깨물었던 이를 간신히 벌리며, 라일라가 신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풀을 한 움큼 뜯어낸 손이 공중에서 어중간하게 뜬 채 바들거리자 세실은 얼른 라일라의 손을 잡아 주었다.

풀잎이 덕지덕지 붙은 작은 손이 세실의 손을 꽉 쥐었다. 요 며칠 제대로 먹지 못해서 가뜩이나 마른 손에서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오고 하얗게 변하자 더욱 안쓰럽게 보였다.

“아기가 자, 잘못된 것은…… 아, 아니겠지?”

이제껏 아팠던 것보다 더한 고통에 더럭 겁이 나서 라일라는 더듬더듬 힘겹게 말했다.

“아뇨. 온라이언의 아이가 자라나며 생기는 고통입니다. 조금 있으면 가라앉을 거예요.”

침착한 세실의 말에 그녀의 손을 쥐고 있던 라일라의 손이 느슨해졌다.

“라일라 님?”

“너도 알고 있었던 거야?”

“…….”

냄새가 나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던, 제일 먼저 자신에게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던, 그래서 그녀의 품에 안겨서 눈물을 흘렸던 세실도 라일라를 속였었다.

지금 이렇게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며,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 질 거라고 말하는 그녀도 라일라가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가 아픈 것이 그저 아기가 배 속에서 발차기하는 것이라고 둘러댄 것도 세실이었다.

당연했다. 그러라고 고용된 유모였으니까.

라일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 고용된 세실이었다. 아기가 안전하게 나오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고, 사명이었다.

라일라가 아니라.

“…….”

라일라는 아무 말 없이 세실에게서 자신의 손을 잡아 뺐다. 그 순간, 다시 배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윽!”

라일라는 허리를 숙이며,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 냈다.

“라일라 님!”

세실은 라일라의 이름을 부르며 얼른 그녀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숙여 안색을 살피려 했다.

“꺼……져!”

하지만 라일라는 그것을 거부했다. 라일라는 세실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자 세게 제 몸을 떨어 내며 고통으로 가득 차 불분명한 발음으로 소리쳤다.

깔고 있던 자리를 작은 주먹으로 구기며, 라일라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휘몰아치는 고통의 파도에 맞서 싸우는 라일라는, 오로지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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