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그럴 리 없어요.”
라일라는 부정했다.
그것은 거의 반사적인 행위였다. 자신이 살면서 처음으로 가져 본 사랑이라는 감정을 몽땅 진창에 처박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어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라일라는 뒤로 물러났다. 마치 르미에르의 가까이에 있으면 거짓이 자신에게 달라붙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라일라.”
르미에르는 물러서는 라일라를 붙들기 위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혼란스러울 거야. 하지만 잘 생각해야 해.”
“뭘 잘 생각하라는 거죠?”
“그 아이.”
라일라가 흠칫 떨었다.
“네 배 속의 아이가 널 죽일 거야. 그러니…….”
“그만 하세요!”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라일라는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더러운 거짓말쟁이야.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취인데 자신에게는 향기로 느껴진다니, 그런 사람이 어딨죠? 게다가 엄마의 생명을 빼앗는 아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누가 믿어요!”
“그럼, 몸에서 악취가 나는 사람은 정상인가? 사람이 재규어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믿을 법한 이야기인가?”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세상에는 가능할 리 없는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 또한, 진실이라는 것을.”
“아, 아니야!”
라일라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았다. 한 손은 제 배에 얹고서.
그럴 리 없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비오스트도, 아기도 자신을 해칠 리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흔들고, 부정해 보아도 이미 들어 버린 이야기는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안에서 피어나고 있는 자그마한 의심의 싹도.
그래서 라일라는 달아나기로 했다. 현실에서 달아날 수 없다면, 당장 이 상황과 르미에르에게서라도 달아나고 싶었다.
“라일라!”
라일라가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뛰어가자 르미에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라일라는 더욱 빠르게 뛸 뿐이었다.
“아!”
문 앞에 다다른 라일라가 힘껏 문을 열어젖히자,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비오스트…….”
라일라가 그림자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푸른 눈을 충분히 지그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들어 몇 개의 책장 너머의 르미에르를 바라보았다.
‘들었나?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서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제 조카를 보며, 르미에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만큼 들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비오스트의 태도를 봐서는 자신이 라일라에게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아는 듯했다.
라일라의 앞에서 착하고 다정한 남자인 척하던 비오스트의 가면이 벗겨져 있었다.
“당신 숙부는 지독한 거짓말쟁이야. 그렇지?”
하지만 라일라는 그 사실을 아직 미처 모르는 듯했다.
“저자가 하는 말은 다 사실이 아니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기를, 르미에르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비오스트가 말해 주길 바라며 라일라는 재차 물었다.
“…….”
비오스트는 그런 라일라를 한 번 슥, 쳐다보더니 조용히 도서관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탁.
안으로 들어온 비오스트는 말없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라일라를 바라보는 비오스트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감각하게 라일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숙부님.”
여전히 라일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비오스트는 르미에르를 불렀다.
“제가 분명, 라일라와 만나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를 보고 있지만, 자신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 비오스트를 보며 그제야 라일라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의 비오스트와는 달랐다.
언제나 미소 짓는, 다정한 비오스트는 이런 표정을 한 적이 없었다.
싸늘하고, 냉혹한, 뼛속까지 한기가 들 만큼 차가운 눈빛을 가진 이 남자는 분명 비오스트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라일라가 모르는 낯선 사내 같았다.
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비오스트에게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 버렸다.
“어디까지 말씀하신 거죠?”
“전부 다.”
“전부 다라…….”
“그 아이를 해치지 말아라. 그 아이는 죄가 없어. 라일라는 그저 우리 가문의 일에 휘말린 것뿐이야.”
르미에르는 비오스트가 당장이라도 라일라를 해칠까 봐 걱정된다는 듯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르미에르에게서 달아나려 했던 라일라였지만, 지금은 그가 잡아끄는 대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시선은 싸늘한 표정의 비오스트에게 그대로 못 박힌 채로.
낯설었다. 제가 전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비오스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은, 이 남자라면 얼마든지 여자를 속여 넘기고 그 여자가 죽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을 남자 같았다는 것이었다.
“제가 왜 라일라를 해치겠습니까?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은 숙부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라일라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던 비오스트의 시선이 겨우 떨어져 나갔다. 대신 그것이 달라붙은 것은 라일라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르미에르의 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울먹이는 목소리도, 울 것 같은 표정도, 다른 사내에게 붙들린 저 손목도.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라일라가 르미에르에게 손목이 붙들린 채, 그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르미에르의 뒤편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라일라가 르미에르의 여자인 것처럼.
“제 아이를 낳을 여자이지 않습니까?”
라일라는 자신의 여자였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라일라를 안은 것도 자신이었고, 라일라의 안에 씨를 뿌린 것도 자신이었으며, 지금 라일라의 배 속에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아이였다.
그러니 라일라는 오직 자신의 손길만을 허락해야 했고, 자신의 권속 아래에 있는 것이 맞았다.
당장이라도 르미에르의 손을 뜯어내고 라일라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지만, 비오스트는 그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눈앞의 상황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이성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거짓말이지?”
라일라는 재차 비오스트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 주기를 바라면서.
라일라의 손목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위로 올라가 말간 파란 눈을 바라보았다.
저 눈이 바라는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거짓말이라고, 숙부가 지금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대답해 달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으니까.
“사실이야.”
하지만 비오스트가 내놓은 것은 참담한 진실이었다.
좀 더 속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 어쩌면 라일라가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 속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순진한 마녀는 자신을 믿었으니까.
그러면 다 좋게 끝났을 것이다. 라일라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으며 죽었을 것이고, 비오스트는 제 목표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을 어그러뜨린 것은 잘난 정의감에 진실을 폭로한 르미에르와 어리석게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라일라였다.
“사실……이라고?”
라일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처럼 살이 올라 제법 예쁘장하게 보이는 그 얼굴에서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그럼 네 숙부가 말한, 괴상한 이야기가 다 사실이라는 거야?”
“그래.”
“날 속였다는 것도?”
“그래.”
점점 격앙되어 가는 라일라의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비오스트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그럼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
비오스트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내가 널 사랑한다고 말을 한 적이 있던가?”
되물어 오는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의 눈이 커지고, 입술이 벌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비오스트는 라일라에게 직접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라일라에게 아름답다고, 결혼한다면 그녀와 하고 싶다고도, 그녀를 원한다고도, 그녀와의 아이를 원한다고도 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했던 다정한 속삭임 중에 사랑한다는 말은 없었다.
커다란 진실이 라일라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럼 정말로…… 다 거짓이었던 거야?”
공허한 물음이 다시 라일라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몇 번이나 물어도, 몇 번이나 대답을 들어도, 믿을 수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계속 묻는 수밖에는.
“그래.”
이미 산산이 부서진 거짓을 비오스트는 주워 담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어여쁜 거짓의 파편을 그대로 발로 짓밟았다.
최악의 경우까지 모두 생각해 두었던 비오스트가 아니던가? 라일라가 진실을 알게 되는 일쯤이야, 별것 아니었다.
이미 임신한 라일라였다. 이제는 그저 낳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도망가려 한다면 두 다리를 부러뜨리면 될 일이었다. 낳지 않겠다고 저항한다면, 사지를 결박해서 방에 가둬 두면 될 일이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낳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어차피 라일라의 쓸모는 그것이 다였으니.
라일라의 상처 따위, 그녀의 아픔 따위, 비오스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럼 단 한 번도, 날 사랑한 적이 없는 거야?”
허무한 질문이 또다시 공간에 흩어졌다.
비틀거리며 라일라가 비오스트를 향해 다가갔다. 차마 그런 라일라를 막을 수 없었던 르미에르는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놓았다.
“비오스트.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다고 생각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라일라는 그 처음의 사람을 향해서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갔다.
비오스트에게로 향하는 몇 걸음이 지금 라일라에겐 마치 맨발로 깨진 유리 조각이 깔린 길을 걷는 것 같았다. 고통이었고, 아픔이었고, 상처였다.
“그래. 널 사랑하지 않아.”
비오스트의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라일라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한 번도?”
가슴에 박힌 칼을 무시한 채, 라일라는 다시 한번 물었다.
“한 번도.”
단호한 비오스트의 대답이 라일라의 심장을 다시 한번 찔렀다.
비오스트의 일격에 라일라가 휘청거리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라일라의 팔을 붙잡았다.
맥없이 흔들리면서도 라일라는 비오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갛고 파란 눈에서 천천히 눈물이 고이는 모습을 비오스트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내 톡- 하고 눈물방울 하나가 비오스트의 구두에 떨어졌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비오스트의 가슴에도 비수가 날아와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