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혼잣말을 하며 배를 쓰다듬는 모습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도, 문을 열어 달라는 몸짓을 하자 어찌할까 살짝 망설이는 표정도, 결국 주저하면서도 창문을 열어 주는 모습까지도.
경계심 가득하면서도, 애정에 목말라 결국 쉽게 사람을 믿어 버리는 그 모습이 예전 플로라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르미에르는 행복하면서도 슬퍼졌다.
라일라의 운명이 결국 플로라와 같을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보는군. 그동안 잘 지냈나?”
라일라가 열어 준 창문 너머로 훌쩍 몸을 날려 안으로 들어온 르미에르가 인사를 건네자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르미에르의 눈이 자연스럽게 라일라의 배로 향했다. 이제는 임산부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살짝 드레스를 들어 올리고 있는 둥근 배를.
“왜, 문이 아니라 그쪽으로 들어오신 거예요?”
“그건…….”
라일라의 질문에 르미에르는 잠시 망설였다. 황족이자 대공인 자신이 황태자궁에 몰래 숨어들고, 도서관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경비병의 눈을 피해 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들어온 이유는 하나였다. 비오스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이 지금부터 라일라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비오스트가 알아차린다면, 그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아주 잠시, 르미에르는 마음이 흔들렸다.
이렇게 자신의 조카를 배신해도 되는 것일까?
플로라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어 낳은 아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자신이 방해해도 되는 것일까?
“아!”
르미에르가 잠시 망설이며 입을 다문 사이, 그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라일라의 입술이 벌어졌다.
“으읏!”
벌어졌던 라일라의 입술은 이내 꽉 다물어지고, 그 입술 사이로 아픔을 참는 듯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라일라?”
‘참는 듯한’이 아니었다.
라일라는 조금 전보다 더욱 심하게 복통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의 아픔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었다면, 지금은 누군가가 배 속을 바늘로 긁어내리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읏!”
자기도 모르게 배를 감싸 쥐고,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는 라일라의 이마에는 이미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라일라, 괜찮아? 어디가 아픈 거야?”
“배, 배가……!”
한 손으로는 라일라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라일라의 손을 쥐며 르미에르가 묻자, 라일라는 겨우 배라는 단어를 끄집어냈다.
그러자 르미에르의 표정이 라일라가 아프기 전보다 더욱 굳어졌다.
“아…….”
허리를 새우처럼 구부리며 고통을 참고 있던 라일라가 바닥을 바라보던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다. 아픔이 잦아들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하는 라일라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고, 단시간에 식은땀을 쏟아낸 얼굴에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아이가 저를 닮아서 그런지 좀 별나요. 발차기를 너무 세게 해요.”
“발차기?”
“네. 아주 건강한 아이인가 봐요.”
고통의 흔적이 아직도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로 제 배를 바라보며 라일라는 웃었다. 이렇게 자신을 아프게 만들었을지라도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사랑스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그런 라일라의 얼굴을 보자, 르미에르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약간의 망설임이 단박에 날아가 버렸다.
“라일라.”
여전히 라일라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또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채, 르미에르는 라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건 아이가 발로 차는 게 아니야.”
르미에르의 손안에서 라일라의 손이 움찔했다.
“그렇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발차기를 세게 하는 아이는 없어.”
아이의 아빠와 닮은 금안이 또렷이 라일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흔들리는 것은 라일라의 푸른 눈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방금 그건 보통의 아기들이 하는 발차기가 아니라는 거야.”
“그럼 이게 뭔데요?”
“네 배 속의 아이가 널 죽이고 있는 거야.”
“네? 지금 무슨 말을……!”
라일라는 르미에르의 손안에 있던 자신의 손을 거칠게 잡아 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깨에 놓인 그의 손을 털어내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비오스트의 숙부라고 해서 믿었는데, 정말 무례하시네요.”
보호하듯 제 배에 손을 얹은 라일라가 르미에르를 쳐다보는 눈빛은 경계와 혐오가 가득했다. 플로라를 닮은 소녀에게 그런 눈빛을 받자, 르미에르의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라일라.”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아픈 마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라일라에게 진실을 말해 주고,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설득해야 했다. 라일라가 당장이라도 바깥의 경비병을 소리쳐 부른다면 그에게 주어진 이 짧은 시간마저도 언제 사라질지 몰랐다.
“넌 속고 있어.”
르미에르의 말에 라일라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고, 그녀의 눈빛에서 경계심 또한 더욱 짙어졌다. 마치 산노루처럼 지금 당장 뒤를 돌아 뛰쳐나가 버릴 것 같은 라일라의 모습에 르미에르는 초조함을 느끼며 바로 본론을 꺼내리라고 마음먹었다.
“비오스트는 널 사랑하지 않아. 널 이용하기 위해서 그런 척했을 뿐이야.”
르미에르의 말에 찌푸려있던 라일라의 인상이 살짝 펴졌다. 대신 르미에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비오스트가 절 속였다는 말인가요?”
“그래.”
르미에르의 단호한 대답을 듣은 라일라는 외려 피식 웃었다. 마치 이제껏 자기가 들은 농담 중에서 가장 시시한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라일라.”
라일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 조급해진 르미에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비오스트가 왜 절 속이죠? 난 부모마저 외면한 버려진 아이였어요. 세상 모두가 날 싫어했죠. 가진 것이라곤 이 몸뚱이밖에 없고, 그것마저도 예쁘지 않아요. 이용 가치라곤 없다고요.”
라일라가 만약 가진 것이 많았다면, 비오스트를 의심할 수도 있었다.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서 접근한 것이 아닌가 하고.
혹은 라일라가 아주 절세 미녀였다면, 그 또한 비오스트를 의심했을 것이다. 자신을 하룻밤의 놀잇감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고.
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처지였다. 오히려 비오스트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라일라에게 나누어 주었다.
갈 곳 없는 라일라를 거두어 주고, 처음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쏟아 주었으며, 심지어 죽을 뻔한 것을 두 번이나 구해 주었다.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그래서 라일라는 믿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받은 친절을 믿었고, 처음으로 받은 다정함을 믿었다. 아무도 라일라를 그렇게 대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라일라는 비오스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착한 조카를 모함하다니, 당신 참 나쁜 사람이네요. 당장 경비병을 부르겠어요.”
라일라는 굳건한 표정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당장 문 쪽을 향해서 소리를 치려던 라일라의 입을 막은 것은 르미에르의 목소리였다.
“네가 왜 부모에게 버림받았는지 알아.”
르미에르의 말에 라일라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냄새가 났을 거야. 그것도 아주 지독한 냄새가. 그래서 마녀라고 불리었을 거고, 아주 지독한 취급을 당했겠지.”
“제 뒷조사라도 했나요?”
“그리고 비오스트와 자고 나서는 더는 냄새가 나지 않았을 거야.”
“당신 정말!”
“그 아이는 그날 만들어진 아이겠지. 이미 열매를 맺었으니, 꽃은 시들어 사라지고, 향기도 사라진 거야.”
“향기가 아니라 악취…….”
“사람들은 그렇게 느꼈겠지. 온라이언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비오스트는 네게 좋은 냄새가 난다고 말했을 거야. 아니, 그 아이라면 아주 냄새를 맡지 못하는 척했을지도 모르겠군. 널 평범한 여자로 대해 주었겠지.”
라일라의 눈이 흔들거렸다. 그의 말이 전부 맞았다. 아무리 르미에르가 뒷조사한대도 비오스트와 자기의 둘 사이에 주고받았던 말은 알아낼 수 없었을 텐데.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 다쳤던 그 손을 꼭 말아 쥐자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 고통이 흔들리는 라일라를 붙잡아 주었다.
그날 라일라를 구해 준 것은 비오스트였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정도쯤은 뒷조사하면 알아낼 수 있겠죠. 내가 살던 곳에 가서 물어보고, 또 황태자궁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보거나.”
르미에르를 거짓말쟁이 취급하며 단호하게 말했지만, 주먹을 쥔 라일라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르미에르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네게 벌어진 일을 알고 있는 건, 조사해서가 아니야. 너와 똑같은 여자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
“나와 똑같은 여자라뇨?”
“비오스트의 어머니.”
“비오스트의…… 어머니?”
“그래. 당시 황태자였던 내 형이자 비오스트의 아버지에게 희생된, 아니 온라이언 혈통의 저주에 희생된 가여운 여자.”
“저주라뇨? 비오스트가 저주를 받았다는 건가요?”
라일라가 르미에르 쪽으로 스스로 한 발자국 움직였다.
비오스트가 자신을 속였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그가 저주받았다는 이야기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라일라를 보자 르미에르는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온라이언 황실은 재규어의 수호를 받고 있어.”
“그건 세실에게 들었어요.”
“그래? 황족들은 모두 재규어의 현신과 다름없다는 것도? 그리고 수호와 동시에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나?”
“…….”
“그래. 그 부분은 쏙 빼고 말했겠지. 그녀도 결국 비오스트가 고용한 사람일 테니까.”
“저주가 뭔데요?”
“온라이언의 혈통을 이을 자는 아무 여자의 태에 자리 잡지 않아. 오직 선택받은 여자만이 온라이언의 후계자를 낳을 수 있지. 그리고 그걸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냄새야.”
“악취가…… 난다는 건가요?”
“평범한 사람에게는 악취로 느껴지지만, 온라이언 혈통이라면 아주 향기롭게 느끼는 냄새지. 어떤 꽃보다도 향기롭고, 관능적인. 그 향기를 맡기만 하면 홀려 버릴 아름다운 향기로 느끼는 거야.”
“그게 왜 저주인 거죠? 그렇게 해서 운명의 상대를 찾을 수 있다면, 그건 오히려 축복 아닌가요?”
라일라에게는 그랬다.
지난 세월 악취로 인해서 마녀 취급을 받은 세월은 분명 혹독했고, 서러운 날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비오스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그 세월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앞으로는 행복할 테니까. 비오스트와 자신의 배 속에 있는 작은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될 테니까.
“온라이언의 혈통을, 재규어의 현신을, 인간은 버텨 내지 못해.”
“버티지 못한다는 게 무슨 뜻이죠?”
“죽음.”
르미에르가 내뱉은 한 단어에 라일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온라이언의 피를 이은 이들은 대대로 자신을 잉태한 어미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나오지. 배 속의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쯤 그 어미는 이미 제 생명력을 모두 소진하여 죽게 되는 거야.”
“…….”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나면, 제 소임을 다했다는 듯이 말라 죽는 한해살이 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