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무심한 눈길이 책상 위에 있는 풀을 향했다.
“이걸 먹으라고?”
금테를 두른 고급스러운 흰색의 접시 위에 올려진 풀 이파리는 황궁 정원 어딘가에서 막 딴 것처럼 파릇파릇했고, 이슬과 같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접시를 내려놓은 수리를 바라보는 비오스트의 눈빛은 서늘했다. 듣도 보도 못한 잡초 같은 것을 지금 감히 황태자 전하께 권했으니, 그런 눈빛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제가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수리는 억울했다. 자신은 그저 중간 전달자일 뿐이었다.
“라일라 아가씨가 채취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라일라가?”
“네. 황태자궁의 정원에서 발견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맙소사!
진짜로 황궁의 정원 어딘가에 있던 잡초였다.
“먹으면 잠이 깨고, 피로감이 덜해지는 허브라고 했다고 합니다. 요즘 황태자 전하께서 일이 많으시니, 피곤하실 거라며, 꼭 전해 달라고 했다더군요.”
수리의 설명에 눈앞에 있는 잡초가 비로소 허브로 보였다.
비오스트는 손을 뻗어 풀잎 하나를 집어 들어 그대로 코로 가져갔다. 보통 허브에서 나는 향긋한 꽃향기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어딘지 화한, 산뜻한 향이 났다.
“그냥 씹어 먹어도 되고, 차에 우려도 된다고 했답니다.”
수리는 자신이 전해 들은 바를 정직하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오스트는 허브를 입으로 집어넣었다.
어금니로 허브를 짓이기자 살짝 쓴맛이 느껴졌고, 독특하게 입안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혀로 짓이겨진 풀잎을 건드리자 화한 느낌이 혀끝에도 옮아 갔다.
박하나 민트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그것보다는 좀더 야생의 맛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그러니까 허브라고…….”
“아니. 이름.”
“그건 저도 못 들었는데요.”
비오스트는 더는 묻지 않았다. 라일라가 이름을 말해 주지 않았다면, 이름을 몰라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도 모르는 여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쫓겨나 숲속 오두막에서 혼자 살던 라일라였다.
백작가에서 보내 주는 물품은 턱없이 부족해 배고픔에 허덕이며 살았던 불쌍한 라일라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숲속의 풀과 버섯을 직접 먹어 보며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스스로 체득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맛있어서 기뻐하며 먹고, 또 어떤 것은 독이 들어 배가 아파 뒹굴면서 배웠을 라일라의 지식이었다.
그러니 허브의 이름이 뭔지는 모를 수도 있었다. 그저 모양과 맛과 효능만을 알 뿐.
“라일라는 요즘 뭘 하고 있지?”
“이전에 말씀드린 것과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글공부하시고, 도서관에서 책 정리를 하십니다. 아, 요즘에 세실 님에게 수놓기를 배운다고 하시더군요.”
거기까지 말한 수리가 슬쩍 비오스트의 눈치를 살폈다. 말해 보라는 듯 비오스트가 쳐다보자 수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의 이름을 수놓았다고 합니다.”
“…….”
“그리고 요즘은 황가의 문양을 수놓고 있다고 합니다. 용도는 아마도 선물용이고요.”
“…….”
수리의 말에 비오스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르미에르의 말처럼 황태자궁에 라일라를 처박아 놓고, 방치한 지 벌써 열흘이 넘어 있었다. 바쁘다는 말만을 남겨 두고, 머리털 하나도 보여 주지 않은 지 이미 열흘째라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일라의 하루는 비오스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정원에서 좋아 보이는 허브를 발견하면 비오스트에게 가져다주었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 그에 선물하고자 했다.
“딸기…….”
케이크에 얹어져 있는 맛있는 딸기를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멍청하고 어리숙한 여자. 실은 그가 처음부터 그녀의 딸기를 노리고 접근한 것도 모르고서.
“네? 딸기가 드시고 싶으십니까?”
비오스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수리는 평생 뭐가 먹고 싶다고 말한 적 없는 황태자가 갑자기 입에 올린 ‘딸기’라는 단어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잠깐 황태자궁에 가 봐야겠어.”
비오스트는 수리의 어리둥절함은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드디어 가시는 겁니까? 라일라 님이 아주 좋아할…….”
벗어 놓았던 비오스트의 재킷을 손에 들고 뒤를 돈 수리의 눈에 보인 것은 텅 빈 의자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오스트가 앉아 있었던.
“아니, 갑자기 뭐가 저렇게 급하시대?”
집무실의 문까지 손수 열고 나가 버린 비오스트의 뒤에 남아, 수리는 혼자 중얼거렸다.
* * *
“왜 하필, 재규어지?”
인상을 찌푸리며 라일라가 중얼거린 소리에 세실이 움찔했다.
“너무 어렵잖아.”
수틀 속, 반쯤 완성된 재규어를 노려보며 라일라는 마저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라일라가 그런 말을 할 만큼 완벽한 재규어의 모양도 아니었다.
삐뚤빼뚤한 선들이 뭔가 둥그런 짐승의 모습을 갖추고는 있었지만, 누가 봐도 그게 재규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온라이언은 신성한 재규어의 수호를 받는 나라이니까요.”
굳이 자신에게 물어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세실은 라일라의 물음에 대답해 주며 라일라의 수틀을 들여다보았다.
“음……. 잘하고 계시네요.”
초보자가 하기 쉬운 꽃이나 풀잎부터 시작하면 수월했을 텐데, 굳이 온라이언 황가의 문양부터 시작한 라일라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지라 세실은 매우 후한 평가를 주었다.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하지만 세실의 칭찬에 라일라는 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검은색으로 하셨네요? 검은색을 좋아하세요?”
“여, 연습이니까. 그냥 아무 색이나 하는 거야.”
라일라는 세실이 보고 있는 수틀을 홱 젖혀 저만 볼 수 있게 하고는 보지 말라는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 그러세요?”
세실은 알았다는 듯이 순순히 물러났다.
이제는 라일라에 대해서 제법 파악하고 있는 세실이었다. 라일라는 지금 쑥스러워하고 있었고, 이럴 때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마도 비오스트의 머리카락 색이 검정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세실 혼자 짐작할 뿐이었다.
“곧 오후 티타임시간이네요. 차를 준비해 올게요. 조금 쉬고 하시면 더 잘되실지도 몰라요.”
세실은 방긋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불퉁한 대답을 한 라일라는 세실이 문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다시 살그머니 수틀을 내려놓았다. 반쯤 수가 놓인 블랙 재규어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라일라는 살짝 인상을 썼다.
“하나도 안 닮았어.”
굳이 검은색을 고른 것은 예전의 그날이 생각나서였다.
마을 사람들이 마녀사냥을 하기 위해서 오두막으로 쳐들어온 그날, 라일라를 구해 준 한 마리의 용감한 짐승.
라일라로선 그렇게 커다란 짐승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것이 재규어인지 뭔지는 몰랐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황가의 문양을 보았을 때, 그 짐승과 닮았다고 생각을 했었다.
세실이 뭔가 수놓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을 때, 그래서 황가의 문양을 수놓고 싶다고 했을 때, 또 좋아하는 색실로 연습을 해 보자고 했을 때, 라일라는 망설임 없이 검은색을 고른 것이었다.
“잘 있을까?”
불현듯, 라일라는 그 짐승은 잘 있는지 궁금해졌다.
사람을 해쳤다고 해코지당하지는 않았는지, 여전히 그 숲에 사는지, 여전히 우아한 자태로 그 숲을 거닐고 있는지.
“잘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그 짐승이 잘 있기를 바라며 라일라는 다시 수틀과 바늘을 잡았다.
라일라가 바늘 하나를 꽂아 넣은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평소 문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잘도 안으로 들어오는 세실이 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세게.
“세실?”
고개를 든 라일라의 눈에 보인 것은, 세실이 아니었다.
* * *
무슨 이야기를 제일 먼저 해야 할까?
황태자궁의 정원으로 들어서며 비오스트는 생각했다. 오랜만에 라일라를 보는 것이었다. 평소처럼 미소와 함께 그저 오후 인사를 건네는 것은 맞지 않는 듯싶었다.
아까 그 허브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아이의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라일라가 그동안 잘 있었는지는 물어야 할까?
‘아니지.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지. 너무 바빠서 올 수가 없었노라고. 혼자 둬서 미안하다고. 아니, 아이와 둘만 둬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비오스트의 미간이 어느새 살짝 찌푸려졌다. 바삐 걷던 발걸음도 멈춰 버렸다.
‘이딴 걸 왜 생각하고 있지?’
자신이 라일라에게 무슨 말을 해야 그녀가 좋아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이제는 라일라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꾀어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고, 라일라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애쓸 필요도 없었다.
비오스트가 무슨 말을 해도 라일라는 좋아할 것이다.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기뻐할 것이고, 반가워할 것이다.
비오스트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니까. 그를 사랑하게 만들어 놓았으니까.
그걸 알기에 라일라는 황태자궁에 처박아 놓은 것이었다. 그렇게 하더라도 임신까지 한 라일라가 자신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으니까.
“뭐, 완벽해서 나쁠 건 없지.”
고민할 것도 아닌 것에 고민하고 있던 멍청한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하며 비오스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 숙부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살아 있는 라일라를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주면 그녀가 편안히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일단 사과를 하고,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묻고, 같이 아기의 이름이라도 지어 보자고 해야겠군. 그러면…….’
라일라를 만나면 해야 할 말을 생각하던 비오스트의 생각은 중간에 뚝 끊어지고 말았다.
바람결에 손수건 하나가 나풀거리며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어설픈 솜씨로 수놓아진 황가의 문양에 붉은 피가 흩뿌려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