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39화 (39/88)

39.

“라일라 님이 황태자 전하를 몹시도 보고 싶어 하신답니다.”

수리의 말을 분명 들었을 텐데, 비오스트는 말이 없었다. 그저 보고 있던 서류를 그대로 이어서 볼 뿐이었다.

잠깐의 멈칫거림이나 눈동자의 흔들림도 없었다. 역시나 라일라가 비오스트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 또한 그가 예상했던 일임이 틀림이 없었다.

“시간이 가능하시면, 식사를 한 번 같이하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시간이 가능하지 않아.”

무던히 서류를 넘기며 비오스트는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라는 것을 비오스트도, 수리도 알았다. 시종이자 비서인 수리가 비오스트가 시간 여유가 어떤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늘 보통의 인간이라면 3시간이 걸렸을 서류 검토를 1시간 만에 해냈고, 황실 기사단 소속 기사 세 명과의 대련에서 순식간에 승리했으며, 외무부에서 오랜 기간 골머리를 썩인 온텔르 산맥의 채굴권에 관해서 라틸렌 공화국의 사신과 30분 만에 협의를 끌어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온종일 꼬박 걸려야 했을 일을 오전 중으로 모두 해치워 버린 비오스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그가 내일 검토해야 할 서류였다.

내일의 할 일을 미리 당겨서 하고 있는 그는 일에 중독된 사람처럼 보였다.

“요즘 일을 너무 열심히 하시는 것 아닙니까?”

“일이 밀려서.”

이 역시 거짓말이었다.

기사단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황태자의 격려차 방문에 굳이 대련을 추가한 것은 비오스트 본인이었다. 그리고 굳이 이겨 버림으로써 기사단의 사기를 외려 꺾어 버린 것또한 비오스트 본인이었고.

그가 지금 보고 있는 서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굳이 황태자를 거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자청해서 검토해 보겠다고 한 서류들투성이였다.

제국의 일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무엇이 있으며, 장차 황제가 될 자신이 알아두어야 할 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는 그의 말에 대신들은 감복했지만, 수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자기 일도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제 상관은 괴물이었지만, 자신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저 조금 유능할 뿐인 평범한 인간.

“너무 일만 하시면 건강을 해치십니다.”

“…….”

비오스트는 그제야 서류에서 눈을 떼고 수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그시 그를 쳐다보는 눈이 말하고 있었다.

‘내 건강을 걱정하다니, 네놈이 드디어 미친 거야?’라고.

“네. 물론 압니다. 이 정도 일은 전하께는 아무것도 아니시겠지요. 자신의 검술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황실 기사단의 기사 셋이 오늘 밤에 자괴감으로 잠도 못 주무시게 만드셨으니까 건강에도 아무 문제가 없으시겠지요.”

수리의 말에 비오스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처음의 시작은 적당히 봐줄 생각이었다. 그저 몸을 좀 풀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었는데, 어느 한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기사들이 바닥에 뻗어 있었다. 그것도 세 명이나.

“다만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건강을 걱정할 정도로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적당히 능력 있는, 황위를 이어받을 만한 황태자로 보이는 것이 목표 아니셨습니까?”

수리의 말에 그제야 비오스트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시간이 나시니까, 황태자궁…….”

“나가 봐.”

“네?”

“네 말대로 무리를 해서 건강을 해치면 안 되니, 좀 쉬어야겠어. 그러니 나가 봐.”

누군가 마음먹고 해친다고 해도 멀쩡하실 분이 뻔뻔스럽게도 건강을 해칠까 봐 염려되어 쉬어야 한다고 말을 하니 수리는 당연히 어이가 없었다.

“……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처치가 아닌 터라 그저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는 수리이기도 했다.

세실의 모처럼인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미련이 남기는 했지만, 더는 상대해 주지 않는 비오스트에게 질척여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더욱 잘 알았다.

결국 수리는 비오스트를 혼자 집무실에 남겨 둔 채, 조용히 제 발로 쫓겨났다.

탁.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게 된 비오스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수리의 말이 맞았다. 최근에 자신은 일 중독자라도 된 것처럼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라일라에게 일이 바쁘다고 말을 한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이었는데.

왜 그랬지?

제 행동의 이유를 찾아가던 비오스트의 코끝에 일순 향긋한 꽃내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향기의 근원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화병의 백합이 보였다.

청초한 흰 꽃의 자태를 보자 비오스트의 인상이 슬쩍 찌푸려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보자 연상되는 얼굴이 있어서였다. 또한 하나의 장면도.

‘아……!’

탄성과도 같은 신음이 비오스트의 귓가를 스쳤다. 그의 기억에서 끄집어낸 달뜬 숨소리가 뒤를 이었다.

부서질 듯 여린 뼈대가, 매끄러운 살결이, 그리고 비오스트의 뇌를 엉망진창으로 뭉개 버리던 그 향기의 기억마저도 그의 안에서 조금씩 되살아났다.

“…….”

이래서였다.

조금만 신경을 늦추면, 어김없이 그 밤의 기억이 비오스트를 유혹했다. 그날의 달콤한 그 향기를 다시 맡으러 가자고, 뇌가 녹아 버릴 것 같던 그 쾌락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고 몸이 소리쳤다.

라일라의 냄새를 다시 맡고 싶었다.

다시 라일라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라일라의 체취와 숨결과 그 모든 것을 빼앗아 삼키고, 제 안에 가두고 싶었다.

라일라, 라일라, 라일라!

“그만!”

비오스트는 제 머릿속을 가득 채워 가는 이름을 지워 내려 소리쳤다.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계획대로 다 끝난 일이었다.

순조롭게 라일라를 꼬여냈고, 그녀를 안았고, 임신까지 시켰으니 이제 라일라에게 볼일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라일라는 아이를 낳을 테고, 그리고 죽을 것이다.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다 그렇게 될 일이었다.

“그런데 왜…….”

비오스트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나면 항상 그랬듯, 쾌락의 그날 밤을 떠올리면 늘 그랬듯, 라일라를 생각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비오스트의 앞섶은 튀어나와 있었다.

“발정기의 짐승이 따로 없군.”

가능하다면 차라리 그렇게 되고 싶었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하고 싶으면 하는.

라일라의 여린 몸을 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제 코의 점막이 문드러질 때까지 그 냄새를 맡으며, 밤새도록 그 짓만 하는 짐승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반쪽짜리의 짐승은 그럴 수도 없었다.

* * *

라일라는 제 앞에 차려진 1인분의 점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갓 만든 수프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보드라워 보이는 흰 빵에서는 구수한 냄새가 났다. 싱싱해 보이는 샐러드도, 파근파근해 보이는 삶은 감자도 모두 맛있어 보였다.

“왜요? 입맛이 없으세요? 아니면 메스꺼우세요?”

“아니야.”

향긋한 차를 따라 주며 세실이 묻자, 라일라는 바로 포크를 집었다.

“저기…….”

포크로 삶은 감자를 반으로 가르며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자른 감자를 곧장 입으로 넣지 않고, 또 반을 가르며 라일라는 뜸을 들였다.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비오스트는 바쁘대?”

죄 없는 감자를 거의 으깨 놓고 나서야 라일라는 겨우 말을 꺼냈다. 마치 별로 관심은 없다는 듯이 다른 곳을 쳐다보며.

“저도 잘은 모르지만, 많이 바쁘신가 봐요.”

라일라가 무안하지 않도록 세실 역시 빵이 담긴 바구니를 라일라 쪽으로 좀 더 밀어 주며,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했다.

“그렇구나.”

먹지는 않고 감자만 더 으깨대며 중얼거리는 라일라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게 무슨 마음인지 아는 세실은 차마 그런 라일라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식사 후에는 뭘 하시겠어요?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정원 산책은 어떠실까요?”

“밥을 먹고는 도서관에 가 볼 거야.”

“청소는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비오스트도 일하고 있잖아. 황태자님도 일하는데, 나도 내 할 일을 해야지.”

라일라의 말에 세실은 더 반대를 할 수 없었다.

음식을 먹지는 않고 뒤척거리고만 있던 라일라가 그 말을 하면서 드디어 음식을 입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 * *

“A…… B…… C…… D…… D!”

자리가 잘못되어 있는 책을 발견하곤, 라일라는 기뻐하며 책을 빼내었다. 처음으로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기분이었다.

실제로는 그저 두 칸 뒤에 책을 꽂아 놓는 것일 뿐이었지만, 처음으로 글자를 읽어서 잘못된 것을 찾아내었다는 만족감에 라일라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기가 나올 때쯤에는, 그리고 아기가 옹알이를 할 때쯤에는 읽고 쓰는 것이 완벽하게 되는 것이 라일라의 목표였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보드라운 가슴으로 안아서 젖도 물려 주고,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 주며 제 곁에서 아기의 잠을 재워 주는, 사랑을 가득 주는 엄마.

“아가야.”

아직 부풀어 오르지 않은 배를 쓰다듬으며, 라일라는 배 속의 아이를 불렀다.

세실의 말로는 이렇게 말해도 아기가 다 듣는다고 했다. 아주아주 작지만, 눈도, 코도, 입도 다 있다고 했다.

“조금만 기다려. 아직은 엄마가 서툴지만, 곧 재미있는 책을 읽어 줄게.”

지금은 너무 더듬더듬 읽는 바람에 아기가 동화책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듯했다. 어제 세실과 함께한 받아쓰기도 40점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에 20점이었던 것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었지만, 아직 멀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배가 둥그렇게 불러오기 전에 꼭 100점을 맞으리라 다짐하며, 라일라는 다시 한번 배를 쓰다듬었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실 그건 자신의 심장 소리였지만, 라일라는 꼭 그게 배 속 아기의 심장 소리인 것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라일라?”

갑작스럽게 들린 자신의 이름에 라일라는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았다.

거기에는 뜻밖의 손님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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