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아기 곰은 딸기를 머것, 먹엇? 머것? 먹엇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라일라는 결국 ‘먹엇’으로 결정을 내리곤 진지하게 글자를 적었다.
그것을 본 세실은 순간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할 뻔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은 채점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것 좀 이상하지 않아?”
곧이어 다음 문장을 부르려던 세실은 라일라의 말에 넌지시 고개를 돌렸다.
“곰은 육식 아니야?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들었는데? 걔가 딸기를 먹어?”
“아마 육식이 아니라 잡식일걸요?”
“그래?”
“네. 꿀을 좋아한다고도 들었던 것 같네요.”
“곰이?”
세실의 말에 라일라는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제로 그녀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럼 혹시 늑대나 사자 같은 것도 잡식이야?”
“걔들은 아마 육식이 맞을걸요?”
“아, 그래?”
라일라가 알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상식 중의 하나였는데 그게 틀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곰은 잡식, 곰은 잡식.”
새로운 지식을 잊어먹지 않으려는 듯이 라일라는 몇 번이나 그 말을 곱씹었다.
다행이었다. 아기에게 곰은 육식이라고 엉터리로 가르쳐 줄 뻔했다. 아기가 그런 것을 궁금해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 세실. 이제 그만해야겠어.”
시계를 힐끗 본 라일라는 이제 채점해 달라는 듯이 세실에게 자신이 쓴 받아쓰기 노트를 내밀었다.
“다른 할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오후에는 도서관을 가 봐야겠어. ”
“도서관요?”
세실은 의아하다는 듯이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이제 더듬더듬 동화책을 읽는 수준의 라일라였다. 황태자궁에 있는 도서관에서 그녀가 볼 만한 책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설마 청소하시게요?”
세실은 황태자가 시킨 아니, 라일라가 억지로 맡은 도서관 청소를 하러 간다는 이야기인가 하고 물었다.
“응. 한동안 못 했잖아.”
“안 돼요!”
단호한 얼굴로 안 된다고 말하는 세실의 기세에 라일라는 눈을 깜박거렸다.
“내 일인데 왜?”
“임산부가 그런 일을 하면 안 되니까요. 위험해요.”
“책이 임산부에게 안 좋은 거야?”
슬쩍 노트에게서 몸을 멀리하며 라일라가 물었다.
종이에 아기에게 안 좋은 것이 있는 건가? 그게 아니면 잉크에? 하지만 태교에 좋을 것이라며 책을 적극 권장하고, 자신이 글을 모른다고 하자 자신이 가르쳐 주겠다고 한 건 다름 아닌 세실이었는데?
“아뇨. 임신 초기의 임산부는 뭐든지 조심해야하는데, 청소 같은 것을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였어요.”
“괜찮아. 청소는 그렇게 위험한 일이 아니니까.”
라일라는 그제야 부자연스럽게 멀찍이 물렸던 제 몸을 자연스럽게 다시 당겼다.
“하지만 무거운 걸 들거나,”
“책은 그렇게 무겁지 않아.”
“높은 곳에 있는 책을 정리하려다가 넘어진다거나,”
“높은 곳은 그냥 내버려 둘게.”
“먼지가 많을 수도 있고.”
“먼지는 이전에 이미 다 털어 냈어. 새로 조금 쌓였을 수도 있지만, 그건 얼마 되지 않을 거야.”
“…….”
따박따박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라일라 덕분에 세실은 할 말을 잃었다. 항상 막무가내로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던 라일라가 제법 이유를 달아 가며 대꾸를 하자 더욱 그랬다.
“모처럼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책 정리도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아가씨. 그 일은 공짜로 먹고 자고 할 수 없다면서 황태자님께 받은 일거리잖아요. 지금의 아가씨는 그런 처지가 아니세요.”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세실은 다시 말을 했다. 이번에는 라일라가 무슨 말로 반박을 해도 꼭 그녀를 말리고 말겠다고 생각하면서.
“아가씨는 지금 귀한 황손을 잉태하신 몸이세요. 자고로 온라이언은 손이 귀한 황가입니다. 지금 배 속에 계신 아기님께서 얼마나 귀한 분이신지 모르셔서……”
거기까지 말한 세실은 말을 멈추고 말았다. 라일라가 냉큼 반박을 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라일라는 입을 꼭 다물다 못해서 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서.
“아가씨?”
“나, 나도, 알아.”
입술을 깨물고 있던 라일라가 더듬으며 입을 얼었다.
“나도 귀한 아기라고 생각해. 비오스트가 불행해지지 않게 막아 준 엄청난 아기야. 게다가 나에게는 기적을 가져다준 아기이기도 해.”
라일라는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마치 그게 자신의 신체 일부가 아니라 성스러운 다른 것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건강하게 태어나면 좋겠어. 그러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아.”
이제껏 세실이 본 적 없는 상냥한 말투의 라일라였다. 거기다가 이제껏 라일라에게서 본 적 없는 사랑스러운 눈빛이기도 했다.
라일라는 자신의 배 속에 자라나는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본 순간, 세실의 한쪽 가슴이 아려 왔다.
* * *
“아가씨께서 황태자 전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야? 일 이야기였습니까?”
세실이 수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꺼낸 이야기에 환하게 웃으며 세실을 기다리고 있던 수리의 얼굴에서는 흩어지는 안개처럼 그 미소가 사라져 버렸다.
“아니, 일 이야기를 할 거면 왜! 어째서! 정원 구석진 이런 곳에서 은밀하게 만나자는 이야기를 한 겁니까? 사람 설레게!”
수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세실에게 따져 물었다.
“제가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은 맞지만, ‘은밀하게’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여기 이 장소 자체가 은밀한 장소이지 않습니까? 건물 뒤편이라서 오가는 사람도 없고, 수풀이 무성해서 잘 안 보이는 장소라서 궁 안의 연인들이 은밀히 데이트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한 장소인 것, 모르셨습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수리의 말에 세실은 딱딱하게 대답했다.
“아니, 전혀 모르면서 왜 하필이면…….”
“지금 아가씨는 임신초기 단계이고, 그 시기의 여성들은 많은 것이 불안정해요.”
좀 더 투덜거리려는 수리의 말을 잘라 내며 세실은 자신이 할 말을 시작했다.
“전하께서 무슨 생각으로 라일라 아가씨를 방치하고 계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가씨가 아직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좀 아셨으면 좋겠어요. 이대로 아가씨를 내버려 두면 안 돼요.”
“완벽하고 철두철미하다 못해서 냉혈한인 분이신데 무슨 계획 없이 그러시겠습니까?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
“네, 그러시겠죠. 다만 그분의 계획에는 감정이라는 것이 없으시니까요. 라일라 아가씨가 황태자 전하를 보고 싶어 할 것이라는, 그래서 혼자 힘들어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못 하셨을 수도 있으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분이 예상 못 했을 일이 뭐가 있으시겠습니까? 예상은 했지만 무시하는 거지.”
수리는 투덜거림을 빙자해서 제 상관의 흉을 보았다.
“그 먼 시골 영지에서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여기까지 따라온 여자입니다. 남자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고 하자 기꺼이 자신의 몸까지 내어 준 여자이고요. 이유가 뭐겠습니까? 당연히 사랑하니까죠.”
그건 세실도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모든 사물을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라일라의 눈빛이 비오스트를 바라볼 때만은 달랐다. 비오스트에 대해서나, 아기에 대해서 말할 때는 말투 또한 달라졌다.
누가 봐도 라일라는 비오스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걸 설마 전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어머나! 라일라가 날 사랑한다고? 언제부터 그런 거지? 난 미처 몰랐어!’라고 하실 줄 아셨어요?”
수리는 제 손으로 제 입을 살짝 가리며 새침한 아가씨의 흉내를 냈다. 그 모습이 썩 잘 어울려서 세실은 저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다 알고 그러시는 겁니다. 그러니 라일라 님이 황태자 전하를 보고 싶어 한다, 어쩐다 해도 아무 소용 없는 일일 겁니다.”
“어쨌든 그렇게 전해 주세요. 바쁘시고, 관심 없는 일이실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나시면 황태자궁으로 식사라도, 그게 안 되면 간단한 티타임이라도 괜찮으니 한번 들러 주시라고요.”
“전해는 드리죠.”
별 소득 없는 일이라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수리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자, 잠깐만요!”
고개를 까닥여 최소한의 예의를 표한 세실이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수리는 다급하게 몸으로 그녀의 앞을 막아 냈다.
“진짜 용건이 그것뿐입니까?”
“…….”
수리의 말에 세실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수리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크게 움직였다.
“여기가 연인들의 은밀한 장소라고 하지 않습니까?”
수리는 자산에게 가능한 가장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제 팔을 대고 턱을 괴었다.
속으로 자세를 잘못 잡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수리였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이왕 이런 장소에 미혼의 과년한 남녀가 단둘이…….”
“거절합니다.”
“아직 본론은 말하지 않았는데요?”
“서론만으로도 충분히 거절하겠습니다.”
“아니, 조금만 이야기를 들어 보시면…….”
“그것도 거절합니다.”
세실은 표정에 조금의 변화도 없이 세 번 연거푸 수리에게 퇴짜를 놓았다.
그리고 사실, 그동안 세실에게 거절당한 횟수를 모두 세어 본다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횟수의 퇴짜를 맞은 수리였다.
“저로는 안 되는 겁니까?”
“…….”
“제가 당신보다 여섯 살이나 어려서 그렇습니까?”
“…….”
“비록 한미한 귀족 집안에 작위도 받지 못하는 몸이기는 하나, 제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쯤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남자입니다.”
“……수리 님께서 부족하셔서가 아닙니다.”
분명 수리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세실의 시선은 수리 어깨 너머의 저 먼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분명하고 딱 부러지게 말하던 세실의 목소리 또한 흐리고 불분명했다.
“한 여자를 불행에 빠트리려는 여자가 어떻게 자신은 행복하게 살려는 꿈을 꿀 수가 있을까요?”
천천히 세실의 눈동자가 저 먼 어딘가에서 수리에게로 옮겨 갔다.
“제 어머니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들은 이후, 저는 결심했습니다. 가엾게도 제 아이를 가슴에 한 번 품어 보지도 못하고 죽을 여자를 대신해서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겠다고요. 설마 제가 그 여자를 죽음으로 밀어 넣는 공범이 되는 건지도 모르고서 말이지요.”
씁쓸한 미소가 얼핏 세실의 입술에 걸렸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수리의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질 만큼 쓰디쓴 미소였다.
“저는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러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옆을 형체 없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세실을 이번에는 수리도 잡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