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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꽃-35화 (35/88)

35.

사람들과 마주치기를 싫어해서 밖에 잘 나오지 않는 라일라였기 때문에 방심했었다. 아니, 이렇게 연락도 없이 르미에르가 황궁에, 황태자궁에 올 것을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니, 보신 게 아니라 그 향기를 맡으셨냐고 물어야 할까요?”

“그래. 맡았다. 한눈에 알아보았어.”

“숙부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미리 말씀드리는데 제가 이미 잠자리를 가진 아이입니다. 그 아이의 향기에 피가 끓더라도 참아 주시길 바랍니다.”

“이미 잠자리를 가졌다는 거냐?”

“당연하죠. 그러려고 데려온 아이인데요.”

뭐 그런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비오스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이미 임신도 시켰다는 거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저는 의원이 아니니까요.”

가벼이 어깨를 으쓱이는 비오스트를 보며, 르미에르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째서 이 아이가 이렇게 자랐을까?

비오스트는 분명 사랑스러운 아이였었다. 플로라를 닮은 웃음을 짓는 사랑스러운 아이.

자라나며 영특한 아이라고도 생각했었다. 제 또래보다 똑똑한 것은 당연했고, 가끔은 오래 학문에 정진한 자신의 스승들마저도 쩔쩔매게 만드는 조카였다.

그리고 자라나면서, 똑똑함을 넘어서는 섬뜩함을 가진 것도 자신의 조카였다.

“그 아이가 임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으냐?”

자라나면서부터 비오스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르미에르는 점점 알 수 없어졌다. 가끔은 바쁘고 냉정한 제 아버지보다 자신을 더 따른다고 생각할 만큼 절친한 조카가, 어느 순간 변해 있었다.

무엇이 제 조카를 변하게 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예민한 사춘기의 소년이 어디에서 상처를 받아 왔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찌 치유해야 하는지, 르미에르는 몰랐다.

“여자가 임신하면 뭐가 어떻게 되긴요? 아이를 낳겠죠.”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에, 비오스트는 자라났다. 가끔은 예전의 자신의 조카처럼 해사하게 웃고, 가끔은 악당과도 같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 해사한 웃음은 플로라를 닮아 있었고, 비릿한 웃음은 그녀를 죽인 제 형을 닮아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 그 여자는 죽는다.”

“인간은 어차피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르미에르가 전혀 모르는 타인과 같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정녕 그 여자에게 아이를 낳게 할 셈이냐?”

“새삼스럽게 왜 그러십니까? 저도, 숙부님도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아닙니까? 인제 와서 저만 악당인 것처럼 말씀하시니 당황스럽군요.”

“그렇게까지 해서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이냐?”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황제가 돼야 하는 게 황태자의 숙명이죠.”

“어린 소녀를 희생해서라도?”

“그녀가 좀 어려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어엿한 성인입니다. 저를 어린 소녀를 임신시킨 파렴치한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거기다가 아시지 않습니까? 여성이 거부하면 까다롭기 그지없는 온라이언의 새끼 재규어는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것을요.”

비오스트가 라일라의 앞에서 연기하고, 공을 들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온라이언의 혈통을 낳을 수 있는 여자를 찾아내더라도, 그녀를 겁탈하는 행태라면 결코 임신은 되지 않았다. 거부하는 몸에서는 자라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제가 죽는다는 것은 모르겠지. 그저 순진하게 네 꾐에 빠진 것 아니냐? ……네 어머니처럼.”

르미에르의 마지막 말에 비오스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말해 주지 않았느냐. 플로라는 속은 것이라고. 네 아버지가 아무런 사실도 알려 주지 않고, 널 임신시켰어. 네 아버지가 네 어머니를 죽인 거야. 그런데, 너는 또 그 짓을 반복하겠다는 것이냐?”

“……제가 언제 그 여자를 죽이겠다고 했습니까?”

“그럼 그 아이를 돌려보내거라.”

“어디로요?”

“그 여자가 살던 곳으로.”

“그 여자는 갈 곳이 없어서 여기로 데려온 것입니다. 돌려보냈다가는 오히려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객사하기 딱 좋을 겁니다.”

“그럼 내가…….”

“대공 전하. 제가 잠자리를 가졌던 아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침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는 여자를 취하고 싶습니까?”

“비오스트!”

결국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쾅! 하고 내려친 것은 르미에르였다.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을 때도, 냉정한 무표정을 하고 있을 때도, 날카롭게 그를 노려볼 때도, 비오스트는 스스로 감정을 다스렸다.

그런 비오스트를 보며 르미에르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의 형이자 비오스트의 아버지이며, 플로라의 남편이며, 르미에르가 사랑하는 여자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살인마.

클락크 베인스 드 온라이언.

지금 비오스트의 표정은 클락크와 정확하게 닮아 있었다.

“오, 맙소사.”

르미에르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어릴 적에는 분명 플로라를 닮았던 비오스트였다.

그녀처럼 웃고, 그녀처럼 자신을 따랐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 사랑스러운 아이가 지금은 그녀를 죽인 클락크와 닮아 있었다.

잔인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잔혹한 살인마와.

“아까 말씀하셨지요. 순진한 플로라가 자신을 속인 황제를 사랑하여 저를 낳았다고요. 그리고 그 사랑의 대가로 숙부의 첫사랑이던 플로라를 죽이고 제가 태어났죠.”

르미에르의 황망한 표정을 바라보면서도 비오스트는 개의치 않았다.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듯,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그런데 순진한 그녀가 황제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집니까? 뭐, 달라졌을 수도 있겠죠. 제가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숙부의 아들로 태어날 수도 있겠군요. 그러면 뭐가 달라지나요?”

“나는 결코 플로라를 임신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아! 고귀한 플라토닉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비오스트는 참으로 우스운 단어를 제 입에 올렸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물론, 그것은 눈앞에 르미에르를 향한 조롱이 담뿍 담긴 웃음이었다.

그 냄새를 맡고 여자를 안 건드릴 수가 있다고?

머리카락 한 올에 담긴 향기만으로도 앞섶이 불룩해지고, 달콤한 체액의 향기만으로도 당장 이성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하다고?

지금의 자신도 지금이라도 라일라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 그녀를 쓰러뜨리고, 미친 듯이 향기를 들이마시고, 입술과 피부와 체향을 탐하고, 그녀의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싶었다.

라일라가 자신을 온전히 느끼며, 쾌락 속에서 신음을 내뱉는다면, 그 신음도 달콤할 테니 그것을 모조리 삼킬 것이다. 흐느끼며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도 아까워 혀로 싹싹 핥아먹을 것이다.

그렇게 야금야금 라일라의 존재를 모조리 먹어 치우고, 전부 제 뱃속에 온전히 담아 버리고 싶은 것이 비오스트의 심정이었다.

그런데 플라토닉? 그게 가능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순결하신 대공 전하께서 안 그러셨다면, 파렴치한 제 아버지가 결국에는 그녀를 임신시켰을 겁니다. 그분이시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지요. 자기 동생과 제수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걸 꺼렸을까요? 천만에요.”

비오스트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고귀하신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만 있다면, 그 작자는 달콤한 거짓말로 유부녀를 꼬여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동생의 여자라도요. 혹은 협박을 했을 수도 있죠.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러니까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숙부를 죽이겠다고 했을 수도 있죠.”

누가 들으면 반역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황제를 깎아내리는 말도 비오스트는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제가 그의 아들로 태어나고 그는 황제가 되는 거죠. 이야기는 돌고 도는 겁니다. 결국, 플로라는 누구의 아이든 임신했을 거고, 아이는 태어났을 것이며, 그녀는 죽었을 겁니다. 그게 플로라의 운명이죠.”

별것 아니라는 듯 황태자는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목숨 걸고 낳아 준 어머니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비오스트를 르미에르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지금 그 말을 하는 비오스트의 입술이 그 플로라와 판박이라는 사실이었다. 잘 웃었고, 다정한 말을 하던, 사랑스럽던 플로라와.

“라일라 또한 마찬가지죠. 그게 그녀의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야 그렇게 황족을 홀리는 향기를 가지고 태어났을 리가 없죠. 처음부터 제 아이를 낳고 죽기 위해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렇게 네가 운명을 좋아하는지 몰랐군.”

“고작 인간 따위가 신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고작 인간이라니? 너는 충분히 훌륭한 짐승 같은데. 양심도, 도덕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짐승.”

르미에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황태자의 방을 박차고 나갔다.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를 듣고도 비오스트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별안간 자신의 앞에 있던 찻잔을 집어 들어 벽으로 내팽개쳤다.

쨍그랑!!

섬세하게 세공된 유리잔이 벽을 이겨 낼 리 없었다. 산산조각이 난 유리잔의 파편 하나가 황태자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붉은 선혈이 그의 얼굴에 흘러내렸다.

하지만 비오스트는 얼굴의 상처와 그 아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번뜩이는 금안으로 허공의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지.”

비오스트의 중얼거림이 공허한 공간을 갈랐다.

“불쌍한 여자 목숨 정도는 사뿐히 즈려밟고, 황제에 즉위해야지. 그 정도는 해야 훌륭한 짐승이지.”

한쪽 입꼬리만을 끌어 올리며 비오스트가 웃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그 미소는 어딘지 쓸쓸하고, 또 어딘지 애처로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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