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미 알고 있으시면서 뭘 물으시는 겁니까?”
“네가 필요한 행위는 이미 했다는 것은 아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제 아들과는 달리 황제는 점잖은 단어로 돌려 말했다.
“아직 임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밤 그 짓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임신이 되겠죠. 그 애는 제 아이를 낳을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아들의 후계자를요.”
비오스트는 황제를 한 번, 그리고 자신을 한 번 가리켰다. 그에게서 이어진 자신의 핏줄. 그리고 또 자신이 잇게 될 핏줄. 온라이언 황실의 핏줄.
“저는 당신의 뜻대로 운명대로 후계자를 낳을 것이고, 아버지의 그 자리에 꼭 앉을 겁니다.”
성스러운, 혹은 더러운 운명의 그것.
“그러려고 태어난 것 아니겠습니까? 제 어미를 죽이면서요.”
비오스트는 싱긋 웃으며 홍차를 마셨다. 이번에는 그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런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물과 같은 맛이었다.
“그 여자를 좋아하면 안 된다는 것도 명심하고 있겠지?”
“아무리 예쁘고 매혹적이라고 한들, 시한부를 좋아하는 고약한 취미 따위는 없으니 안심하시죠.”
“그래. 그 여자의 쓰임새는 그게 다다.”
“네. 그 여자의 쓰임새는 저한테 쑤셔 박히고,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죽는 거죠. 배 속의 아이에게 자신의 생명력을 쪽쪽 빨아 먹히고 나서요.”
“어쩔 수 없지. 인간의 몸으로 신의 아이를 잉태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는 비오스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듯이.
신의 아이.
과거의 자신을 일컬어서, 또 자신의 앞에 있는 자기 아들을 가리켜서 황제는 그렇게 말했다. 신의 아이라고.
그가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재규어가 수호하는 온라이언 제국의 황실은 대대로 오직 남자아이만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재규어로 변신을 할 수 있었다.
어떨 때는 태어난 형체가 사람이 아니라 재규어의 새끼로 태어나는 때도 있었다. 네 발로 걷는 그 동물이 자라서 두 발로 걷는 인간으로 변신하게 되면, 그 역시 황제가 되었다. 신화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신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도 특별했다. 오로지 온라이언의 혈통들만이 반응하는 독특한 향기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그들을 위해서 존재하고, 그들의 아이를 낳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듯이 그들을 발정 나게 만드는 향을 가진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자신의 모든 할 일을 끝냈다는 듯이 죽었다.
대대로 온라이언 제국에서 외척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황후는 일찍 죽었다. 황태자비 역시 일찍 죽었다. 간혹 오래 사는 황후도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해서였고, 아이를 낳지 못한 황후에게 권세가 갈 리가 없었다.
“그러니 괜히 곧 죽을 아이가 불쌍해서 정을 준다거나 하지 말아라.”
“애초에 그런 감정 따위를 아는 아이로 낳지도 않으셨잖아요? 여자라는 생물을 과연 제가 좋아하게 될지도 미지수인데요. 그렇다고 남색에 취미가 있는 건 아니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딸그락 소리를 내며 황태자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릴 때부터 받은 예절 교육으로 전혀 소리가 나지 않게 찻잔을 내려놓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부러 그렇게 소리를 냈다.
이제 대화는 끝이라는 의사를 내비치는 것이었다.
“신께 맹세한 평생의 반려자를 죽이면서까지 낳은 아이인데, 불량품이라서 속상하시겠습니다. 황제 폐하.”
비오스트는 제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리고 싱긋이 웃었다.
화사하고 눈부신 미소라 방금 그가 한 말이 자신과 황제를 동시에 비웃은 것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찬양하기라도 하듯이 싱그러운 미소였다.
“비오스트.”
황제는 그저 조용히 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제법 머리가 컸다고 건방지게 구는 아들의 이름을.
그리고 조용한 부름과는 달리 폭발적인 기세로 제 안에 응축되어 있던 힘을 풀어냈다.
“읏!”
비오스트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황제에게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이 비오스트를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바위에 짓눌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거대한 짐승이 그를 쓰러뜨리고 그의 가슴을 커다란 앞발로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날카로운 발톱이 제 가슴을 할퀴고, 커다란 송곳니가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살기였다.
거대한 힘이었다.
황제가 황위와 함께 온라이언의 계승자로 물려받은 힘은 ‘신’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었다.
“신의 아이에겐 불량품이란 없다.”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내뿜는 살기는 날카로웠다.
“완전무결한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그 둘 중에 무엇이 진실인지는 비오스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부드러운 목소리는 거짓이었고, 비뚤어진 아이를 계도하는 것 같은 자상한 미소도 거짓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눈빛 또한 거짓이었다.
저 살기가 진실이었다.
제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제 뜻과 어긋나면 당장이라도 죽이겠다는 진심을 담고 있는 살기야말로 황제의 본모습이었다.
“온라이언의 후계자라면 명심하거라.”
황제의 충고에 비오스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황제의 기에 눌려 입을 여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알면서도, 마치 자신이 매우 배려 깊은 사람이라 아주 충분히 기다려 줄 수 있다는 듯이 그에게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네. ……폐, 하.”
비오스트의 잇사이로 겨우 대답이 흘러나오자,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빙긋이 웃었다.
“……읏!”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황제는 자신의 기를 거두어들였다. 가슴을 억누르고 있던 기가 사라지자, 그 힘에 저항하고 있던 비오스트는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나가 보거라.”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황제는 자애로운 명령을 내렸다.
가지고 싶었다.
저렇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반항하는 것들을 도살할 수 있는 힘을, 감히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할 수 있는 그 권능을 비오스트는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
비오스트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지금 그가 간절히 원하는 그 힘을 가진 이를 쳐다보았다.
제 아비이자, 자신을 힘으로 억누르고, 손바닥 위에 꼭두각시처럼 명령을 내리고, 가지고 노는 황제를.
그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 그의 목에 칼을 박아 넣고 싶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얼굴을 박살 내고 싶었다. 지금 당장 그의 숨통을 끊어 놓고 싶었다.
“네, 폐하.”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비오스트는 약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그의 명령대로 방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그랬다.
* * *
“비오스트!”
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있던 비오스트는 자신의 이름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불리어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앞에서 거울의 각도를 맞춰 주며 시중을 들던, 그의 시종 수리가 놀라서 문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목소리만큼이나 분노에 찬 표정을 한 르미에르가 서 있었다.
“숙부님, 오래간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크게 부르지 않으셔도 제 이름 정도는 황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답니다.”
채 잠그지 못한 앞섶으로 비오스트의 잘 짜인 근육이 거울에 비추어졌다. 그저 해사하기만 하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황궁에서 길러진 황태자가 아니라 거친 용병의 것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몸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
“그럼 잠시 앉으시겠어요?”
비오스트가 살짝 고갯짓하자, 수리는 얼른 거울을 치우고 물러났다. 아직 채우지 못한 단추는 네 개나 되었다. 게다가 목에는 타이도, 리본도 두르지 않은 채였다.
그저 흰 셔츠만을, 게다가 그 셔츠마저 풀어 헤친 채로 테이블에 앉는 비오스트의 모습은 고귀한 황태자가 아니라 어느 귀족가의 망나니 같은 모습이었다. 여자를 마구 후리고 다니고, 도박하고, 술을 마시는 그런 난봉꾼 같은.
하지만 아니러니하게도 비오스트에게는 그런 모습마저도 썩 잘 어울렸다.
그가 난잡한 사내임을 알더라도 여자들이 그의 발치에 몸을 내던질, 그런 모습이었다. 게다가 본인도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느긋한 미소마저도 그러했다.
사실, 어쩌면 이쪽이 비오스트의 본모습에 더 걸맞은 모습일 수도 있었다.
“말씀하시죠.”
수리가 차를 내오러 갔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비오스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인사도 없었고, 안부를 묻는다거나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신변잡기도 묻지 않았다. 누군가가 봤다면 형편없는 예법을 가진 황태자라고 했을 법했지만, 비오스트도 르미에르도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여자가 있더구나.”
르미에르의 말을 들은 순간, 귀족가의 망나니 막내아들 같던 비오스트의 표정이 일순간 변했다.
“……그 애를 보셨습니까?”
되묻는 비오스트의 목소리에서는 차가운 화가 묻어나왔다. 또한, 르미에르를 쳐다보는 눈빛은 한없이 날카로워졌다.
피를 나눈 혈육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제 것을 빼앗아 갈 경쟁자를 보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피를 보고 말겠다는 눈빛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