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28화 (28/88)

28.

“라일라,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요?”

“응.”

“사생아를 낳는 게 뭔지 정확하게 아는 것 맞아요?”

“알아. 네가 방금 설명해 줬잖아.”

“라일라, 마음은 고마워요. 하지만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동반되는 행위가 있고, 또 그건…….”

비오스트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설명하려 했다. 그리고 그런 비오스트를 보며 라일라는 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자신은 지금 거절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긴, 처음부터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저주받은 아이였고, 상대방은 고귀하신 황태자였다. 그런데 감히 자신이 황태자를 구하느니 마느니, 행복하게 만드느니 마느니 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필요 없으면, 말아! 기껏 남이 도와주려고 했더니!”

라일라는 버럭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바로 그래서예요, 라일라.”

화난 라일라와는 달리 비오스트의 목소리는 슬프고도 애잔했다. 오히려 흠칫한 쪽은 조금 전에 화를 낸 라일라였다.

“당신이 말했죠. 사랑이 없는 결혼은 불행할 거라고. 그러면 그사이에 태어난 아이는요? 사랑 없이 태어난 아이는요?”

조용히 비오스트는 라일라에게 물었다.

“분명히 말할게요. 나는 당신과의 아이를 원해요. 다른 누구도 아닌 라일라가 낳아 주는 나의 아이를 원해요. 하지만 당신이 그저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 아이를 낳는 것은 원치 않아요.”

말을 마친 비오스트는 조용히 웃었다. 그것은 슬픈 미소였다. 마치 라일라가 비오스트를 거절한 것 같은, 그래서 슬퍼하는 것 같은 미소였다.

자신의 마음은 그게 아닌데!

“비오스트.”

말해야 했다. 그냥 얼버무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자신이 인정해야 비오스트를 도울 수 있었다.

그에게 말을 해야 결혼을 막고, 그의 아이를 낳아 줄 수 있었다.

“네가 좋아.”

용기를 그러모아서 라일라는 마침내 자신의 진심을 고백했다.

“아마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

사랑이라는 감정이 뭔지 라일라도 확실하게는 몰랐다. 애초에 그런 것을 느껴 본 적도, 누군가 가르쳐 준 적도, 자신이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자신이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바로 지금 눈앞의 남자였다.

자신의 고백에 멍한 표정을 하고, 이내 따뜻한 미소를 짓는.

라일라의 구원자.

“비오스트.”

* * *

“정말 괜찮겠어요, 라일라?”

“당연하지. 뭘 자꾸 물어?”

라일라는 자신을 걱정하는 비오스트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둘은 라일라의 침대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비오스트의 눈에는 보였다.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라일라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 것도, 라일라의 손이 치맛자락을 꼭 쥐고 있는 것도.

강한 척을 하고 있지만, 그야말로 ‘척’이라는 것이 비오스트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늘 그랬듯이.

“라일라는 괜찮을지 몰라도 제가 긴장을 해서 그런지 목이 마르네요.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비오스트는 침대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향했다. 그 틈을 타 라일라는 잔뜩 경직되어 있던 몸에 힘을 풀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주먹을 쥔 손가락이 차가워진 것이 라일라의 손바닥에서 느껴졌다.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사이, 비오스트가 물 한 잔을 가지고 라일라의 앞에 서 있었다.

“마시겠어요?”

“그래.”

라일라는 비오스트가 내민 잔을 받아 들었다. 안 그래도 긴장으로 입이 바삭바삭 말라 가던 터라 라일라는 물을 아주 달게 마셨다.

그리고 비오스트는 그런 라일라를 슬쩍 미소를 띠고 바라보고 있었다. 뭘 보냐는 듯, 라일라는 물을 마시면서도 눈을 돌려 비오스트를 향해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봐?’

눈빛만으로 라일라는 물었고, 비오스트는 그런 그녀의 눈빛을 읽어 냈다.

“여기가 귀여워서요.”

비오스트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라일라의 목울대를 슬쩍 문질렀다. 갑작스러운 비오스트의 손길에 놀란 라일라가 물을 넘기는 것을 멈추자, 제 속도대로 움직이던 물이 갈 곳을 잃고, 라일라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몇 방울의 물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또 몇 방울의 물이 라일라의 옷에 떨어졌다. 그러고도 남은 물은 라일라의 입가에 묻어 있었다.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손에서 잔을 빼서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놓았다. 슬쩍 미소를 지으며 라일라의 입가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닦아 내었다.

“사실은, 이 입술도 귀여워요.”

“무, 무슨 헛소리야?”

난생처음 듣는 귀엽다는 말에 라일라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생각해 보면 난생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그 말을 한 사람은 있었다.

라일라에게 귀엽다고, 예쁘다고, 아름답다고 한 사람. 바로 지금 라일라의 눈앞에서, 정말이지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다는 듯 웃고 있는 비오스트였다.

“그리고, 이 눈도 귀엽고요.”

라일라의 반응이 어떻든지, 비오스트는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방금 라일라의 입가에서 물기를 닦아 낸 비오스트의 젖은 손이 라일라의 눈 가까이에 다가왔다.

그 손길에 살짝 움찔했지만, 라일라는 비오스트의 손을 쳐내거나,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자신의 눈을 만지는 것을 허락한 것이었다.

“가끔 이 손도 참 귀엽고요.”

또 다른 비오스트의 손이 이번에는 라일라의 손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커다란 손은 라일라의 손가락을 감싸는 듯하다가 이내 깍지를 끼며 라일라의 손을 붙들었다.

라일라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커다란 비오스트의 손이 조그만 자신의 손을 감싸고 은밀하게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또 그 기분이었다.

비오스트가 제 손가락을 치료해 주었을 때 느꼈던 그 기분. 발가락이 간질간질하고,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그 기분. 발끝에서부터 열이 오르고, 손끝에서부터 떨림이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기분.

풀썩하고 라일라의 몸이 침대에 눕혀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일순간 눈을 감아 버렸던 라일라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보았던 방의 천장과 그 아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비오스트의 얼굴이었다.

“라일라.”

비오스트가 라일라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입을 열면 분명 목소리가 너무 떨려서 염소 새끼 같은 목소리가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듣고 있다는 뜻을 담아 가만히 비오스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몹시 나쁜 놈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그래도 말해도 될까요?”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나는 라일라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비오스트의 말에 살짝 라일라의 눈이 커졌고, 살짝 라일라의 입술이 벌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혹은 너무도 믿고 싶다는 듯이.

그리고 그 순간, 비오스트가 라일라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를 유혹했던 향기가 더욱더 진해졌다.

마치 그를 질식시켜 죽여 버릴 것처럼 진한 라일라의 체향이 뿜어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그 향에 비오스트는 잠시 굳어 버렸다. 제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그라도 이제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조금 전 그가 말했던 대로, 라일라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비오스트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그가 열망했던 모든 행위를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일부는 지금 가능했다.

라일라에게 키스하고, 탐스러운 향기를 내뿜는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고, 그 향기를 혀로 싹싹 닦아 먹으며, 그녀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비, 비오스트?”

“말해요, 라일라.”

비오스트의 이름을 부르는 라일라의 목소리는 떨렸고, 라일라의 이름을 부르는 비오스트의 목소리는 욕망으로 탁해져 있었다.

“눈을 감아야 하나?”

“좋을 대로요. 나는 눈을 뜬 당신도, 눈을 감은 당신도, 모두 좋아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일라가 눈을 감을지 뜰지를 결정하기도 전에, 입술이 부딪혔다. 정말이지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목마른 자가 감로수를 탐하듯,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입술을 탐했다. 그의 입술이 라일라의 아랫입술을 물어뜯을 듯이 빨아 당기고, 그것도 부족하다는 듯 이내 윗입술까지 탐냈다.

비오스트의 혀가 라일라의 안으로 들어온 것은 순식간이었고, 라일라가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아주 한참 뒤였다.

그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을 부딪쳐 올 때, 라일라는 발바닥에 찌릿해져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비오스트가 라일라의 혀에 자신의 혀를 비빌 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번쩍이는 번개 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 라일라가 몽롱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자신의 안으로 침범한 약간 까슬하면서도, 물컹거리는 습한 것이 비오스트의 혀임을 알아차린 것이 한참 뒤인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가 뒤틀리는 것도, 앓는 것 같은 신음이 자꾸만 튀어 나가는 것도, 몸 한구석의 어딘가가 자꾸만 움찔거리는 것도, 전부 라일라에게는 이상한 일이었다.

“으읏……. 아앗…….”

거의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드는 것 같은 비오스트 탓에 라일라는 목구멍부터 숨이 막혀와 죽을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약탈자와 같았다.

라일라의 숨을 빼앗고, 라일라의 호흡을 빼앗고, 라일라의 정신을 모조리 앗아 가려는 잔인하고 포악한 약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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