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25화 (25/88)

25.

세실에게 비오스트와 저녁은 함께할 것이라는 확답을 해 준 라일라는 도로 방문을 닫았다. 자기가 그 말을 하자 세실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키득키득 웃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세상에 라일라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어쨌든 그렇게 세실을 쫓아내고 나서 라일라는 제 치마를 훌렁 벗어 던졌다. 드러난 속치마의 위에 비쭉- 책 한 권이 솟아 있었다.

라일라는 그 책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제 손에 있던 먼지가 책에 묻자 손으로 탁탁 털어서 먼지를 치웠다.

<세상의 지식을 고풍스럽게 전파하는, 명망 있는 지식인 알렌드 웨르날도가 자라나는 온라이언의 희망인 유아들을 위해서 발간한 온라이언 제국 기초 철자학습>

물론 이 기나긴 책의 제목을 라일라가 읽을 리가 만무했다.

라일라는 그저 청소하다가, 아마도 황태자가 처음 글을 배웠을 때 읽었을 이 책을 우연히 집어 들게 되었다. 그것도 첫 번째 책장에서 말이다.

비록 글을 모르는 라일라였지만, 제목 아래로 보이는 철자들이 순서대로 나열된 모습이나 어린아이가 보기에 알맞은 그림이 섞인 책 내용을 보자 직감적으로 이게 글을 배우는 책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별거 없네, 뭐.”

라일라는 책을 휘리릭 넘겼다.

“혼자 할 수 있어. 이까짓 것.”

라일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책을 침대 위로 던졌다. 그리고 남은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온종일 청소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몸이 노곤하게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세실이 물이 받아 둔 욕조에 몸을 담그고, 느긋하게 목욕을 한 다음에, 비오스트와 맛있는 저녁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고 나면 혼자서 글을 공부할 것이다.

그러면 도서관 정리 따위는 비오스트가 깜짝 놀랄 만큼 완벽하게 해치울 수 있었다.

“좋아.”

라일라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그녀의 생각에는.

* * *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도서관 청소는 얼추 마무리되어 갔다.

뽀얗게 먼지가 앉았던 선반은 이제 말끔했고, 유리창으로 환한 햇살이 비쳐도 그렇게 먼지가 나풀거리면서 날리지는 않았다. 책장이나 선반, 책상과 의자도 모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으…….”

깨끗한 도서관에서 기괴한 신음을 내뱉고 있는 것은 라일라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낮에는 청소하고, 밤이면 글자 공부를 했던 라일라였다. 문제는 청소는 차근차근 진행되었지만, 라일라의 공부는 도무지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공부를 시작한 어린이들 옆에는 부모라든가, 유모, 가정교사가 붙어 있기 마련이었다. A가 뭔지도 모르고, 무슨 발음인지도 모르는 라일라는 첫 페이지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모르겠어.”

한숨과 같은 패배를 선언하며, 라일라는 책을 내려놓았다.

도서관은 이제 분명 깨끗했지만, 그 이상 라일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비오스트가 부탁한 책 정리를 끝내 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자, 초조해진 라일라는 습관처럼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윽!”

하지만 예전처럼 손톱을 물어뜯기도 전에, 입안에 감도는 이상한 맛 때문에 얼른 뱉어 버리고 말았다. 목욕이나 세수 후에 바르는 화장품 때문이었다.

덕분에 라일라의 손톱은 이전과는 달리 아주 짧거나, 우둘투둘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전과 달라진 것은 손톱만이 아니었다.

따뜻한 물로 자주 씻고, 향유를 바른 덕분에 뻣뻣하던 금발은 제법 부드러워졌다. 피부도 제법 매끈해졌고, 비쩍 마르기만 했던 몸은 아주 조금 살이 붙었다.

이전이 길거리를 떠돌던 병들고 야윈 데다가 비까지 맞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 같은 라일라였다면, 지금은 그나마 병은 나은 모습이랄까?

“하아…….”

애초에 지금 자신이 책을 거꾸로 들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라일라는 결국 책을 덮었다. 청소는 다 했지만, 책 정리는 못 하겠다고 비오스트에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의 저녁마다 라일라와 함께 식사하는 비오스트인지라 언제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할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무슨 핑계를 대야 할지는 지금부터 고민을 해 봐야 했다.

글자를 몰라서 시킨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뭐라고 말하지?”

라일라가 끙끙거리며 변명을 생각해 내는 중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온 건가 싶어서 라일라는 귀를 쫑긋 세웠다.

세실이 점심을 먹으라고 데리러 오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다. 어쩌면 비오스트일지도 몰랐다. 여기는 황태자궁이고, 여긴 황태자궁의 도서관이니까.

비오스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라일라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어머나!”

하지만 라일라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자그마한 몸집에 고운 얼굴을 한 여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라일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사람이 있었네요.”

고운 얼굴만큼이나 고운 목소리로 여자는 말했다.

라일라가 모르는 그 얼굴을 보며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자 여자는 생긋 웃었다. 순간 라일라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지금쯤이면 저 여자도 라일라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인상을 찌푸린다거나,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비오스트처럼 냄새를 못 맡는 걸까? 아니면 세실처럼 냄새가 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자신을 손가락질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아니, 사람이 아니고 마녀였던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했던 라일라는 순간 들린 단어에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여자는 아직도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단 좀 떨어져 줄래? 정말 냄새가 나서 죽을 것 같으니까.”

그녀의 말에 라일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들어도 치욕적인 말이었다.

“네가 여기서 꺼져.”

그리고 지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은 라일라였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너한테 볼일이 좀 있어서.”

처음에는 예쁘장한 아가씨라고 생각했던 여자는 인제 보니 아리아드네를 닮아 있었다. 눈, 코, 입을 보자면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지만, 고압적인 태도나, 남을 깔보는 듯한 시선이 아리아드네와 비슷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알아야 해?”

“나는 리모트 공작가의 엘리자베스야.”

타고난 듯 도도한 얼굴을 하고 콧대를 세우며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소개를 했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야.”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은 순간, 쿵 하고 라일라의 심장이 발치로 떨어졌다.

“놀랐니?”

엘리자베스는 라일라의 마음을 정확하게 짚어 냈다. 라일라조차도 지금 자신이 놀란 것인지, 왜 놀란 것인지 알지 못했는데.

“아니.”

궁지에 몰리면 늘 그랬듯, 라일라는 태연한 척을 하며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래? 난 좀 놀랐었는데. 황태자 전하께서는 장차 황제가 되실 분이시니 당연히 후궁 한둘쯤은 두시리라고 생각했고, 나도 그 정도쯤은 눈감아 줄 생각이었어. 하지만 이런 냄새나는 물건을 가지고 오실 줄은 몰랐거든.”

눈앞에 있는 라일라를 흉물 취급하며 엘리자베스는 말했다.

“누구 후궁따위 한대?”

“어머? 그래? 그럼 네까짓 게 황후가 되겠다는 거야?”

“그딴 것 안 한다는 소리야.”

“야심이 없는 아이로구나? 그게 아니면, 야심이 없는 척하거나.”

엘리자베스는 라일라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다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알겠다는 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야심이 생기려야 생길 수도 없겠다. 이런 냄새나는 애가 무슨 황후겠어? 너, 씻기는 하는 거니?”

“…….”

엘리자베스의 모욕적인 언사에 라일라는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꼭 쥐었다. 하지만 그녀를 때릴 수도,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비오스트의 약혼녀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라일라는 엘리자베스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황태자 전하와 가까운 시일에 결혼식을 올릴 거야. 신께 맹세하는 부부가 되는 거지. 내가 온 이유는 너도 그 사실을 똑바로 알았으면 해서야. 감히 주제도, 분수도 모르고 날뛰지 말라고 미리 경고해 두기 위해서 온 거라고. 알아들었니?”

엘리자베스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마치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세상의 상식을 알려 주는 언니와 같이 말이다.

라일라는 고개를 들어 엘리자베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고, 당당해 보였다. 그리고 얼굴도 아름다워 보였다.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라일라는 잠시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비오스트를 상상했다. 온화하며, 다정한 자신의 은인을. 가끔 자신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어떤 뭉클한 감정을 솟아오르게 하는 그를.

상상 속에서 둘은 잘 어울렸다. 선남선녀라는 것이 바로 이 둘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하지만 라일라의 눈에는 보였다. 엘리자베스의 아름다운 겉모습이 아니라 못된 속마음이. 아리아드네를 옆에서 보아 온 라일라는 단박에 그녀의 내면을 알아보았다.

저런 여자랑 결혼하면, 과연 비오스트가 행복할까? 라일라의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솟아올랐다.

행복할 것이다. 만약에 비오스트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한다면.

행복할 것이다. 만약에 엘리자베스가 비오스트를 사랑한다면.

둘이 서로 사랑한다면 둘은 충분히 행복한 한 쌍의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비오스트가 행복하다면, 라일라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를 사랑해?”

라일라의 더없이 진지한 물음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풉!”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것은 엘리자베스의 비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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